
<임(진왜란) 돌(아보기) 코너>에서는 허남린 선생님께서 최근 푸~욱 빠져계시는 임진왜란 연구의 경험, 쟁점, 즐거움 등에 대한 산문을 격월로 게재합니다. 허남린 선생님은 캐나다 UBC(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아시아학과에서 일본사를 가르치고 계시며, 현재 인문세에서 일본 철학과 조선 연행사 세미나를 이끌어주시고 계십니다. 쓰신 책으로는 『조선시대 속의 일본』, 『처음 읽는 정유재란 1597』, 『두 조선의 여성:신체·언어·심성』, 『Prayer and Play in Late Tokugawa Japan』, 『Death and Social Order in Tokugawa Japan』이 있습니다.
되살아난 “천조국”의 망령
되살아난 “천조국”의 망령
허남린 선생님(캐나다 UBC 아시아학과 교수)
무슨 소리인가 했다. 의미가 금방 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지나쳤는데 또 그 놈이 나타났다. 유투브에 달린 제목 이야기이다. 여러 번 나타나길래 들여다보고는 아연실색했다. “천조국”이라는 단어 이야기이다. 미국을 “천조국”이라고 부르는 무지몽매한 인간들이 지금 세상에 있다는 사실이 놀라왔다.
천조라는 것은 예전 중국을 하늘의 왕조라고 지칭하면서 사용했던 단어이다. 하늘과 같은 왕조 천조국이라는 말은 그 왕조를 빼고는 모든 나라는 무지랭이 같은 왕조라는 전제 위에 서 있다. 그러니까 하늘 같은 왕조가 하나 저 높이 하늘에 솟아 있고, 나를 포함해 나머지는 모두 이를 우러러 섬기는 노비 정도에 불과하다는 뜻이기도 하다. 천조국은 이들을 보며 손가락을 들어 야만족이라고 했다. 이는 인간의 상하가 분명한 계급사회의 투영이기도 했다.
미국이 천조국이면 네가 사는 나라는 그저 노예의 나라 정도라는 뜻인가. 미국이 천조국이라고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나는 노비의 나라, 당신에게 충성하는 야만의 나라에 속합니다 하고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아직도 이러한 몽매한 인간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미국이 하늘의 왕조이면, 네 나라는 여기에 종속된 떨거지냐?
임진왜란 때 중국 명나라에서 온 군사들을 조선에서는 흔히 “천병”이라 불렀다. “천조” 즉 하늘의 왕조에서 보내주신 하늘의 전사들이란 뜻이었다. 나라가 풍지박산이 나고 있을 때, 명나라에서 조선에 군사를 파견했다. 자신들의 국경을 사전에 막기 위한 속내였지만, 조선에 와서는 충성스런 너희를 구원해 주기 위해 왔다고 했다. 이런 명나라 군사를 많은 조선 사람들은 천병이라 부르는 데 주저함이 없었다. 특히 위정자들은 명나라를 천조라 열심히 부르며 천병의 환심을 사고자 했다.
하늘의 왕조에서 보내주신 하늘의 전사들이 오기만 하면, 그까짓 왜적이야 한 방에 격멸하고 조선을 말끔히 구원해 줄 것이라고 믿었다. 천병이라고 외치던 인간들은 더 더욱 그렇게 굳게 믿었다. 그런데 천병이 와서 평양성의 왜적을 공격하다 한 방에 박살이 났다. 목숨을 겨우 건진 명나라의 패잔병들은 황급히 압록강을 넘어 자기 나라로 줄행랑을 쳤다. 천병을 외치던 자들은 주춤했고, 아니 이럴 수가 하면서 가슴을 쳤다.
자존심이 상할 대로 상한 그 “천조”의 명나라는 다시금 군대를 대대적으로 동원하고 준비를 단단히 한 후, 한 해가 넘어갈 무렵 “천병”은 다시 압록강을 건너왔다. 이들은 다시 평양성을 공격했다. 자신들 보다 열 배나 많은 명군 앞에서 이번에는 평양성의 왜적이 속수무책이었다. 명군이 퇴로를 열어주고, 얼른 사라지라고 하자, 왜적들은 남은 병력을 이끌고 한양으로 도망을 쳤다. 그러자 천병을 외치던 자들은 다시 튀어나와 환호했다. 하지만 의기양양하던 천병들은 한양의 왜적을 섬멸하겠다고 급히 내려오다 서울의 북방에서 왜적에게 일격을 맞고 뒤로 물러섰다.
왜 우리가 조선을 위해 이렇게 개고생을 하면서 죽어야 하지? 이것은 말이 안된다고 정신을 차린 후, 천조국은 전투가 아니라 일본과의 협상을 통해 어떻게 하든 결론짓자고 강화협상의 길로 나아갔다. 그러면서 전투는 소강상태로 들어갔다. 그러나 그 협상이라는 것이 아무리 천조라고 해도 제 맘대로 되는 것이 아니었다. 천조를 발바닥으로 보던 일본이 말을 들을 턱이 없었다. 비슷하게 일본에서는 美國을 米國이라 표기한다. 그 나라가 뭐가 아름답냐는 뜻이다. 전쟁은 끝날 줄 모르면서 6년이나 가깝게 더 이어져 갔다. 조선은 독자로 왜적을 물리칠 힘이 없었고, 강화협상도 질질거리다 무위로 끝나고, 왜적이 다시 대거 밀려왔다. 천조는 다시 대군을 보냈고, 조선의 인민들은 다시금 천병을 진하고 두껍게 경험했다.
그들의 경험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쇄미록>이라는 기록물이 있다. 오희문이라는 양반이 쓴 일기이다. 그는 관직이 없었지만, 자신의 큰 아들 윤겸이 전후 영의정에까지 오른 것으로 보아 어디가도 꿀리지 않는 양반이었다. <쇄미록>에는 피난을 다니며 전란을 겪은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그 가운데 그가 직간접으로 겪은 천병들에 대한 경험이 우리의 관심을 끈다.
“천병이 끊임없이 오가며 소주와 꿀, 병아리 등의 물건을 찾는 일이 많고, 조금만 여의치 않으면 큰 몽둥이로 마구 매질하며 고을 수령까지 모욕하는 등 난리를 피우지 않는 날이 없다.” “천병이 남쪽으로 내려가면서 연로의 민가에서 재물을 약탈해서 백성이 살 수가 없어, 낮이면 숲 속으로 도망해 숨고, 밤에만 와서 자는데, 가재 도구와 곡식은 모두 땅에 묻어 두었다.” 자신의 또 다른 아들 윤해도 “방아 찧어 준비한 곡식과 말린 민어 두 마리, 조개젓” 등을 갖고 오다가 길에서 모두 천병에게 빼앗기고 말았다고 적고 있다. 빼앗기면 굶어야 한다.
“근처 마을 사람들은 천병이 온다는 말만 듣고서 모두 맨발로 달아나 산에 올라갔다.” “천병 십여 명이 황폐해진 인가에 와서 소란을 피워 남의 재물을 빼앗고 주민들을 마구 때렸다.” “천병은 가는 곳마다 난리를 일으키며, 사람들의 소와 말, 재물을 빼앗고, 조금이라도 그들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인가를 불태우고 사람을 때려서 상해를 입힌다.” 하늘의 전사들인 천병이 조선 땅에서 부리는 행패와 패악질은 끝이 없었다. 그렇게 고통의 나날이 흘러갔다.
그러다 1598년 11월, “흉악한 왜적이 와서 소굴을 만든 지 7년 만에 이제야 돌아갔는데 장수 1명도 베지 못하였고, 우리네 죽은 장수와 군사는 전후로 몇 명이나 되는지도 알 수 없으니 그 분통함을 이루 다 말하랴.” 원수를 갚지 못해 억울하고 원통하지만, 그래도 그토록 잔인했던 전쟁은 끝이 났으니 이제는 두 발 뻗고 잘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오희문은 그렇게 안도의 한 숨을 쉬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천병이 남쪽에서 올라와 도성 안에 가득하고 길에 오가는 군사들이 거리를 메어 끊이지 않으니 길가에 사는 사람이 편안히 지낼 수가 없어서 들로 달아났고, 서울 길 네거리에서 말을 빼앗아 사람들이 통행하지 못한다.” 대접이 부실하거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조선의 고위 관리들도 잡아다가 두들겨 팬다는 소식도 들렸다. 왜적이 모두 물러간 지 4개월이 지났는데, “경기도 방백이 천병에게 구타를 당해 인사불성이 되었고, 그 방백을 보좌하는 관리인 도사는 피신하여 어디로 도망갔는지 알지 못한다”는 소식도 들렸다.
전쟁이 끝나자 천병은 자기 나라로 철수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은 서두르지 않았다. 철수하는 천병이 모여들자, 한성에서는 “조금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양반, 상인을 가릴 것 없이 난타하고 욕을 하며 재산을 약탈해서 사람들이 살 수 없을” 정도라 아우성이었다. 어느 봄날, 오희문 집안의 노비 덕노는 길을 가다가 입고 있던 도롱이를 빼앗겼고, 며칠 뒤에는 오희문 자신이 날씨가 더워 부채를 들고 길에 나섰다가 천병을 만나 부채를 빼앗기고, 이틀 뒤에는 길에서 우비도 빼앗겼다. 천병은 닥치는 대로 빼앗고 집어가고 주먹질이었다.
오희문은 지방 수령인 아들 윤겸의 편지를 받았다. “만세덕이 보낸 관리가 현에 들어 왔는데, 현에 배정한 인삼 백 근을 구해낼 길이 없어서 반드시 후환이 있을 것 같다”는 근심이 가득한 편지였다. 만세덕은 당시 천병의 총사령관이었다. 그 하늘처럼 높은 사령관도 자기 나라로 돌아가면서, 조선에서 인삼을 긁어 모아 가기 위해 아예 각 군현에 얼마씩 인삼을 바치라고 배정했다는 것이었다. 아들 윤겸의 현에 만세덕이 배정한 인삼은 100근이었는데, 어떻게 해서 70근은 겨우 마련해 보냈으나, 나머지 30근도 빨리 보내라고 재촉하고 있어 애를 태우고 있었다. 당시의 인삼은 최고가의 상품으로 지금으로 말하면 금은과 다를 바가 없었다. 천병이 자기 나라 천조국으로 완전히 철수한 것은 이로부터 일 년이 더 지난 1600년 10월이 되어서 했다. 전부 떠난 것을 안 오희문은 그제서야 정말로 안심했다. “이제 들으니, 천병은 모두 돌아가서 길가에 난폭한 일이 벌어질 걱정이 별로 없을 것 같다.”
천병이 압록강을 건너오자 조선 인민은 그 뒷바라지에 허덕였다. 천조국에서 건너 온 천병은 꿈으로 사모하던 구원자의 모습만 보인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여러 얼굴을 하고 있었다. 배고프면 빼앗고, 탐나는 것이 있으면 집어가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관리들도 잡아다 매질을 하고, 조선 여인들을 전장으로 끌고 다녔다. 천조국의 환상은 천병을 경험하면서 산산조각이 났다. 그렇지만 자신을 지킬 능력이 없기에 모든 모욕을 감내해야 했다.
그것은 4백년 전의 이야기이다. 그사이 세상은 완전히 바뀌었다. 그럼에도 “천조국” 타령을 하는 인간들이 있다는 것에 놀라고 말았다. 미국에 대한 환상은 독버섯처럼 번져 있다. 남의 나라 국기를 들고 구세주를 부르듯 구호를 외쳐대는 무리들을 어떻게 생각하냐고 미국 친구에게 물어 본 적이 있다. 자기 나라 국기를 흔들어 대니 고맙다고 할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러나 대답 대신 자기 머리를 향해 손가락으로 원을 세 번 그렸다. 완전 크레이지라는 대답이었다. 도무지 이해를 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넘어 아직도 그런 인간들이 지금 세상에 있냐 하는 투였다.
자기 중심을 상실해 남에게 바친 인간은 희망이 없다. 자존심을 버린 사람은 구제하기도 힘들다. 무엇을 하던 자기가 중심에 있어야 일을 이룰 수 있다. 그런 사람들이 모여야 살기 좋은 나라를 스스로 만들 수 있다. 모든 나라는 자기중심 자기자존 위에 서 있어야 한다. 누가 누구의 위에 있지도 않고, 누가 누구의 밑에 있지도 않다. 그런데 “천조국” 타령이라니, “천조국”의 망령이 되살아난 징조를 보면서 임란을 생각해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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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살아난 “천조국”의 망령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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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moonse | 2024.06.21 | 0 | 306 |
임진왜란을 겪고서도 사대에 빠져 허우적대던 조선의 위정자들과 성조기를 흔들며 천조국을 외치는 지금의 모습이 이렇게 닮아 있군요.
‘천조국’ 타령을 하며 바닥에 납작 엎드려 스스로를 깔아뭉개고 있는 이들을 보며, 임진왜란의 비통한 상황이 떠올라 얼마나 분통이 터지셨을지요.
울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