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세계종교사상사2] 16장 후기 “노자와 공자처럼 음양으로 이루는 초월”
수요 인문공간세종 대중지성 / 「세계종교사상사 2」 16장 후기 / 2025.07.16.(수) / 이성근
노자와 공자처럼 음양으로 이루는 초월!
2020년, 코로나는 인류에게 큰 시사점을 주었다. “인간들이어! 아직도 물질적 증식과 생산을 멈추지 않는가” 이는 마치 고대의 신화를 다시 보는 듯하다. 오만한 인간에게 신이 홍수를 내려서, 벌을 내리고, 신의 목소리와 자연의 질서에 부응한 소수의 인류만이 새로운 창조를 이룩했던 것처럼. 코로나의 원인은 다양한 설이 있으나, 중국의 엄청난 생산과정에서 발생한 환경오염에서 비롯된 호흡기 바이러스라고 보는 것이 대세이다. 그러나 코로나 이후 인류는 다시 오만함(?)의 길을 걷고 있다. 세계총생산(GDP)이 다시 증가추이를 보고 있다. 지구의 정화능력을 초과하는 생산과 증식은 지구의 온도를 높인다. 그래서 평균 온도가 3도 상승하면 온 인류의 50%가 죽는다. 그리고 온도 증가율이 현재와 같이 급격히 오른다면, 2100년 인류는 멸종할 수 있다고 과학자들은 경고한다.
현재 지구 인구는 80억 명. 1만 년 전 농업혁명이 시작되었을 때 500만 명, 1000년전만 해도 약 3억명이었다. 무려 고대사회와 비교하면 약 1600배, 중세와 비교해도, 26배가 늘었다. 놀라지 마시라. 현재도 인구는 늘고 있다. 약 30년 후까지 100억 명을 찍고, 감소세가 예상된다고 한다. 세계총생산도 45년후까지 정점을 찍고, 감소세가 예상된다. 이제 불과 한–두세대 안에는 주식을 사도 오르지 않는 시대가 오는 것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양(陽)의 시대에서 음(陰)의 시대로
바로 팽창과 증식만을 이뤄왔던 양(陽)의 시대에서 응축과 소멸로 가는 음(陰)의 시대로 진입하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말부터 ‘음’을 상징하는 여성의 권리와 세력이 세지는 것도 맥락을 같이 한다. 특히 최근 고령화 사회가 되면서 점점 ‘음’의 영향이 커지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K-문화를 세계에 선도하며, 유행에 민감한 한국의 청년들도 외적인 성공과 성장에서 내적인 휴식과 놀이에 앞장서고 있다. 이제는 시골에서조차 동네상가에 요가/명상 학원이 우후죽순처럼 생기고 있다. 명상의 목적은 과도한 양(陽)의 욕심을 내려놓는 것이다. 내면을 탐구하며 일상의 초점을 명확히 하며, 쓸데없는 생각을 비운다. 고요한 어둠속에 외면의 잡생각의 불을 끈다.
여기서 우리는 동양문명의 3대 문명 중 도교를 대표하는 노자의 지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남긴 유일한 저작 『도덕경』은 제왕과 정치, 군사 지도자들에게 던지는 충고를 많이 담고 있다. 공자와 마찬가지로 노자는 군왕이 도를 지켜 무위(無爲)의 방법을 실천하면 국정이 성공적으로 운영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도는 항상 작위 함이 없으면서도 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도가가 결코 정사에 개입하지 않은 이유이다.
무위란 무엇인가? “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는데, 하는 것”이다. 이는 보이지 않는 어둠과 혼돈을 상징하는 음(陰)과 통한다. 예를 들면, 예전의 동양의 큰 스승들은 제자들을 지도할 때, “가르치지 않았다.” 억지로 가르치지 않고,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지혜가 전수되도록 내버려 두었다. 주역의 ‘산수몽’ 괘사를 보자.
蒙(몽) 亨(형) 匪我(비아) 求童蒙(구동몽) 童蒙(동몽) 求我(구아)
初筮(초서) 告(곡) 再三(재삼) 瀆(독) 瀆則不告(독즉불고) 利貞(이정)
몽은 형통하다. 내가 어리고 몽매한 이를 찾는 것이 아니라, 어리고 몽매한 이가 나를 찾아옴이니, 처음 묻거든 알려주고 두 번 세 번 하면 더럽히는 것이다. 더럽히면 알려주지 말아야 하니, 바르게 함이 이로우니라.
어떠한가. 공부는 학생이 좋아서 스스로 하는 것이지, 억지로 떠다 먹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나는 「도덕경」과 「역경」을 읽으면서 스스로 반성을 많이 했다. 그동안 내가 학생들에게 지식의 주입을 지나치게 닦달했음을 깨달았다. 이후 나는 학생들이 몰라도, 답답해하지 않고 그들이 스스로 깨칠때까지 점점 기다려주었다. 그들이 실수하고 넘어지기 반복해도, 보는 듯 안보는 듯 편하게 환경을 조성한다. 스스로 깨우치는 그 엄청난 ‘재미’를 내가 좀 더 안다고 뺏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랬더니 오히려 학생들이 더 열심히하고 나를 더 잘 따르는 것이 아닌가?
음(陰)속에 양(陽)이 있고, 양속엔 음이 있다.
그렇다고 매번 그렇게 ‘음’적으로만 세상을 살 수 있을까? 아니다. 음양의 우주론은 서로 생(生)하고 서로 극(剋)하며 순환 체계로 통합된다. 쉽게 말하면 협력과 경쟁을 시공에 맞게 잘 쓸 때, 우주적 진리에 합일되고, 우리는 진정한 충만감을 맛보게 된다.
저자 엘리아데는 말했다. 음양의 교대는 대립의 관념을 극복한다고. 이것을 그는 ‘상호보완적 대립’이라 불렀다. 여기서 우리는 ‘양’의 철학도 필요함을 알게 된다. 노자의 철학이 ‘음’과 같이 개인의 몸과 내면을 향했다면, 공자는 노자에 비해 좀 더 ‘양’적으로 세상을 바꾸려 했다. 공자가 구상한 도덕적·정치적 개혁은 “총체적인 교육”, 즉 보통의 인간을 “군자君子”로 교화시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이라도 도에 준거하는 의식적인 행위, 즉 의례와 관습禮의 정확한 실천을 배우기만 하면 “진정한 인간”이 될 수 있다. 올바르게 거행되는 모든 의식 행위는 엄청난 주술–종교적 힘을 뿜어낸다.
이렇게 그는 ‘양’처럼 보이는 의식을 중요시했다. 무지한 인간이 현명한 군자가 되는 과정에서 보이는 ‘‘예’를 갖추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보고 배우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내면도 성장할 수 있다. 엘리아데는 말한다. ‘자연스러움을 잃지 않으면서 몸짓과 행동을 의례로 “변화”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훈련은 종교적인 의도와 구조를 지닌다.’ 종교적인 의도는 ‘초월’을 품고 있다. 초월이란 우리가 더 나은 존재와 행동으로 끝없이 변화하는 과정이다.
나는 공자의 「논어」, 「중용」을 보며, ‘양’적으로 학생들을 이끌기도 했다. 중요한 단어나 지식을 같이 복창하고, 외우고 시험을 보는 것이다. 특히 지나치게 자유분방하고 혼돈이 가득한 학생들에게는 적절한 형식으로 잡아주는 것이 큰 효력을 가져왔다.
공자와 노자의 시대에는 엄청난 ‘양’의 시대였다. 불과 철의 조합은 잉여생산물이 늘고, 인구의 증대를 초래했다. 자연히 더욱더 증식과 풍요를 위해 인류는 서로 피 흘리며 전쟁을 일삼았다. 그래서 그 ‘양’을 현명하게 쓰는 방도로 공자는 ‘양’의 의례와 관습을 이상향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그의 종교와 사상은 이후 무려 동양의 정치철학을 2000년간 존속시켰다.
그렇다면 공자는 ‘양’만 썼을까? 그는 이 시대 음양오행의 철학을 정립한 최고의 스승이었다. 당연히 ‘음과 양’ 조화를 추구했다. 음양을 오행으로 분화시켜, 봄–인자함, 여름–예의, 가을–정의, 겨울–지혜의 철학으로 정립했다. 만물이 돋아나는 봄/여름에는 인자함과 예의를 갖춰 물질을 성장시키고, 가을/겨울에는 정의와 지혜로서 정신을 배양시킨 것이다.
그럼 노자의 ‘음’처럼 보이는 사상은 어떻게 되었을까? 지나친 ‘양’의 시대에서 그의 제자들은 무위자연 속에서 ‘도’를 이어나갈 수 있었다. 그들은 산속에서 내면과 몸을 탐구하며 신선이 되고자 했다. 또한 후대에 신라의 ‘화랑도’는 이를 이어받아 유불도를 골고루 수련하여 도덕적, 종교적, 실천적 인재를 육성한 것이다. 특히 젊은 화랑들은 무예를 수련하며 신체 훈련을 게을리 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음양의 호흡과 동작의 균형이 무척 중요했다. 이렇듯 ‘음’속에도 ‘양’이 있는 것이다.
진정한 성인의 길, 음양의 도를 초월하라
엘리아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도는 “온 우주를 순환하며 결코 멈추지 않는다.” 모든 존재의 생과 사는 음양의 교대로 설명된다. 양은 생기를 자극하지만 음은 휴면을 초래한다. 그러나 성인은 삶과 죽음의 우주적 리듬으로부터 벗어나기를 희망하며, 자신의 존재가 공허하다는 것을 인식함으로써 그 순환의 굴레 밖에 머물게 된다. 도교도들의 장생 추구는 도 탐구의 일부에 해당한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우주의 순환은 끝없이 지속되는데, 우주의 일부인 성인은 그 리듬으로 벗어난다고? 달샘은 이렇게 설명하셨다. 자신의 개체적 순환에서 벗어난다는 것이다. 즉, 나와 세상이 연결되어있음을 알고, 나의 자의식이 없는 무아(無我)의 단계로 진입하는 것이다. 나는 이것이 자신의 욕망과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본다. 내 욕망이 나만의 욕망이 아니고, 나의 기쁨이 나만의 기쁨이 아니다. 나의 지나친 욕망은 타인의 슬픔으로 연결될 수 있고, 나의 지나친 수용과 순응은 오히려 타인의 안좋은 욕망을 부추길 수 있다.
여기서 욕망은 현재를 바꾸고자하는 ‘양’의 기운이다. 수용은 현재를 지키는 ‘음’의 기운이다. 결국 이 둘을 적재적소에 쓰는 것이 중요하다. 성인은 이것을 꾸준히 수련하면서, 굳이 논리적 판단을 하지 않고, ‘저절로’ 아는 단계로 나아간다. 이것이 통찰이다. 통찰은 지식보다 정확하고, 계산보다 빠르다. 공자가 「논어」 위정편에서 밝힌 ‘종심(從心)’의 경지이다. ‘나이 일흔에 마음이 가는데 대로 행하여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
정리하면, 성인에 이른다는 것은 덕을 쌓고, 도를 행하면서, 불교에서 말하는 카르마(업보)를 청산한다. 동양의 명리학에서는 인간의 소명을 ‘당령(當令)’이라 불렀다. 인간으로 태어나서 마땅히 해야 할 신의 명령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인간으로서 소임을 다하고, 수행을 할 때, 우리는 악업의 순환에서 벗어난다. 그리고 나와 연결된 우주의 선순환을 돕게 된다. 선순환은 우주만물의 지혜를 수련하여, 널리 실현함을 말한다.
지금 현대사회는 극단의 ‘양’의 시대로 치닫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 선진국들의 더많은 생산을 위한 이권 다툼, 치열한 자본 전쟁은 ‘음’의 고요함과 평화를 위협하고 있다. 왜 그들은 우리 인류가 하나라는 것을 모르는 것일까? 자신이 지나친 폭리를 취할 때, 아프리카의 수많은 난민들이 죽을 수 있음을 모르는 걸까? 자신의 지나친 소비행락이 지구의 쓰레기를 만들고, 우주의 질서를 위협하고, 자신 본래의 내면은 더욱 공허해지고 불쌍해질 텐데 말이다.
바야흐로 인류의 존망이 몇 십 년이 채 남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우리에게 해법은 있다. 세상이 끝없이 물질적 증식을 추구한다면, 나부터 ‘양’의 바꾸는 기운을 정신적 수양으로 활용하는 것이다. 현대의 과학기술문명 중에서 세상의 공존에 필요한 좋은 것은 ‘음’의 기운으로 지키고, 환경오염이나 지나친 소득불균형을 초래하는 안좋은 것을 ‘양’의 기운으로 바꾸는 것이다! 그렇게 일상에서 하루 하루 음양의 균형을 추구한다면, 우리는 점점 성인으로 가고 있다. 아니 이미 성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