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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의 인류학

 

 

[모든 것의 새벽](7) 이번엔 메소아메리카다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5-07-17 12:18
조회
29

『모든 것의 새벽』9장 후기 2025-7-17 김유리

 

민주주의와 사회적 공동주택의 기원, 메소아메리카

 

 

이번엔 메소아메리카다.『모든 것의 새벽』9장 “등잔 밑이 어두운”을 읽었다. 이기헌 샘이 만든 유튜브 비디오로 복습하고 수업 내용을 중심으로 정리한다.

 

개요

이 장의 숨은 주인공은 아즈텍 문명이다. 1150년경 멕시코 계곡(현재의 멕시코 시티가 있는 곳)으로 이주해온 사람들이 도시를 이루었다. 테노치티틀란은 강력한 왕권 중심 도시를 건설하고 아즈텍 3중 동맹을 중심으로 아즈텍 제국으로 팽창했다. 제국의 팽창에 맞섰던 어느 저항의 도시가 결국 더 강력한 제국주의자들의 무리(스페인)를 끌어들이게 되는 역설적 드라마가 이 장에서 펼쳐진다.

 

“멕시코 계곡”과 도시들

산과 화산이 둘러싼 분지인 멕시코 계곡은 고대 도시 테오티후아칸에서부터 현재의 멕시코 시티까지 메소아메리카의 도시들의 요람이다. 이 분지에 있는 텍스코코 호수의 늪지대 섬에 자리한 도시가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이다. 테노치티틀란이 도시 계획의 모델로 삼은 것은 과거 근거리에 있었다가 사라진 도시 테오티후아칸이었다. 그런데 테오티후아칸은 왕조를 유지하는 데 관심이 없었던 도시다. 저항 도시 틀락스칼라가 왕조를 매우 거북해 했던 곳이었던 것 처럼 말이다.

 

※참고 사진과 지도 검색

“벨리 오브 멕시코”라는 장소에 대해서

https://lacgeo.com/valley-mexico-cultural-epicenter#google_vignette

 

먼저, 테오티후아칸

아즈텍의 수도 테노치티틀란의 모델이 된 테오티후안의 도시 배치도(472~73)를 보자. 우선 밝혀둘 것은 이 배치도는 시간상의 변화를 그림 한 장에 담아놓은 합성물이라는 사실이다. 거대 건축물 세 개가 먼저 눈에 띈다. 해 피라미드, 달 피라미드, 깃털 달린 뱀 케찰코아틀(케찰은 새, 코아틀은 뱀)의 신전이다. 기원 원년부터 건설되던 이 거대 구조물들은 300년경 파괴되고 갑자기 도시의 자원이 거주용 공동주택을 짓는 데 흘러들어가게 된다.

기원 원년경부터 지진 활동과 화산 폭발로 이재민들이 멕시코 계곡에 흘러들었다. 초기 도시 형성은 팽창하는 판자촌과 같은 것이었다. 도시 중심에는 새 도시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거대 건축물들이 건설되었다. 그런데 문제가 있었다. 건축물을 올리는 데는 노동력도 많이 동원되지만, 매 단계 신적 존재에게 귀한 제물을 바쳐야 하는데, 가장 귀한 제물은 사람이었단 말이다. 여기에서 반전이 있다. 무시무시한 인신공양 관습은 300년경 끝장이 난다. 시민들은 신전과 피라미드 대신 이주민들을 위한 좋은 주택을 지어 공급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거대 구조물을 보면 강력한 권력이 있었을 것이라 해석한다. 테오티후칸의 거주용 공동주택을 보고 학자들은 초기엔 이곳이 궁전인가 하고 생각했다고 한다. 훌륭한 석조의 공동 주거지와 안락한 시설이 그렇게 생각하게 했다.

 

아파트, 아파트

도시의 자원이 훌륭한 석조 주택을 공급하는 방향으로 유입되면서, 10만 인구의 시민들이 매우 안락한 여건에서 살게 되었다. 100명 단위로 거주하는 단층 공동주택에는 통합 배수 시설이 있고 벽과 바닥이 잘 마감되어 있었다. 가구별로 각자의 단위를 가졌고 개별 현관으로 출입하는데, 중정이 있어 일상적으로 가구들이 서로 마주쳤다. 중정에는 테오티후아칸의 명물 채색 벽화가 그려져 있다. 현대의 아파트와 어떻게 비슷하고 어떻게 다를까? 그레이버와 웬그로는 “단층,” “단위,” “중정,” “벽화” 등을 강조한다. 그들은 이곳의 “도시공동체들”(아마도 “동네”)에 비해 현대의 주택단지는 핵가족이 고층 건물에 수 천 가구씩 “격리”되어 거주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 다민족 도시의 도시 공통의 정체성은 어떻게 구성되는 것일까? 신전과 피라미드 올라가는 것을 매우 거북해했던 이 시민들은 문자 기록을 남기지 않았다. 하지만 그들은 “공예와 그림 분야에서 생산성 높은 장인”이어서 벽화를 비롯해 우리에게 많은 것을 남겨주었다. 공동주택 벽화들은 가정 제의의 장소에 그려져 있지만, 엄숙하다 하기에는 너무 장난스러운 그림들이다. 재미있는 온갖 해석을 시도할 수 있을 법한 이 벽화는 선명하고 다채로운 색깔로 칠해져 있으며 식물, 인간, 동물의 몸뚱이가 흘러간다. 사람들은 거리에서 놀고 잎사귀가 달린 나뭇가지를 흔들고, 꽃을 먹고, 씨앗(? 공?)과 버섯을 쥐고, 그 사이로 나비가 날아다닌다. 입으로나 머리로 무엇인가 터져나오고 있다. 저자들은 “사이키델릭”하다고 하고 선민 샘은 “수다스럽다”고 표현한다. 특별히 더 큰 인물상이 없는 이 그림은 도시의 평등주의적 노선에 대한 의식적 지지를 보여준다. 그들은 “군주제와 귀족제에서 경로를 바꾸어 민중의 토얀이 되는 길을 갔다(477).”(토얀은 부들의 땅이라는 이 도시의 별칭)

 

드나듦과 도시붕괴론

다문화 사회는 기본적으로 반-왕조적이다. 사는 형태, 뿌리, 이주 경로가 다양하면 중심을 가질 수 없다. 드나듦이 잦다는 것은 들어오기도 쉽고 나가기도 쉽다는 것이다.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은 평등주의적 노선을 띠지만, 한꺼풀 아래서 온갖 종류의 사회적 긴장이 들끓는 곳이다.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 수 없다.

평등주의 노선이 구현하는 시민들의 균일성은 획일성과는 다르다. 획일성은 강제되는 것이라면, 균일성을 지탱하는 것은 배면의 갈등과 긴장이다. 이런 도시에서 작은 규모에서는 끊임없이 서로 싸우고 있다. ‘끊임없다’는 것은 무슨 말인가? 최종 결정자가 없다는 것이다. 싸움이 끊임없다는 것은 싸움의 중재도 함께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다는 뜻일 것이다. 누구도 최종 결정을 볼 수 없이 삶이 꼬이고 맞물리고 엮어 들여갔다고 해석한다. 그리고 오래 살고 단위가 커지다 보면 언젠가는 솔기가 터져나간다.

 

이방인 왕

와중에 이방인 왕이 등장하기도 한다. 테오티후아칸에서 적응 못하고 나간 사람이 저지대의 티칼이란 도시로 가서 왕 자리를 차지한 사례를 설명하는 부분이다. 다양한 사람이 오고 가는 곳에서 누군가 왕이 되는 것은 쌓아간 것이 아니고 어쩌다가 왕권을 차지하는 것이다. 이방인 왕이란 정말 흥미로운 역사적 현상인데, 동화 속에서도 흔적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동화에서 웃지 않는 공주를 구하는 왕자들은 이방인 왕의 사례다. 웃지 않는다는 것은 “무겁다”는 뜻이다. 지위, 왕권, 지배적 권력의 중력에 ‘끄달림’을 표현한다. 공주는 자기 영역에서 배우자를 찾을 수 없다. 공주를 웃기는 자에게 왕권을 주겠다는 선언은 무엇인가? 광대에게 왕권이 넘어가는 것이다. 그는 먼 나라 왕자임이 밝혀지는 광대다. 그레이버가 말하는 “연극-왕”이자 “이방인 왕”의 사례다. 왕자들이 걱정할 일은 자기 집 문제가 아닌 처가 문제라는 것을 기억하자.

(광대라고 하니 말인데, 왜 지배자들은 코메디언들과 충돌하는 것일까? 요새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티격태격하는 사람이 바로 코메디언이다. 성정체성이 모호하고 나이든 로지 오도널말이다. 우크라이나의 정치적 실망을 등에 업고 선거에서 이긴 현 대통령도 드라마 속 대통령이었던 코메디언 “연극-왕”이라는 점이 재밌다.)

 

사회붕괴-솔기론

하나의 도시가 붕괴할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 책에 의하면 별 특별한 이유도 패턴도 없다고 한다. 내부 원인설(구조 결함), 외부 원인설(외부 충격)을 넘어서 그냥 한 사회의 솔기가 터지는 때가 온다. 큰 이유 없이 다시 흩어져서 수백 년 살아온 도시를 떠나기 시작한다. 하다 보니까 갑자기 힘이 풀어진다는 것은 드나듦이 많았다는 걸 의미한다. 이것은 인간을 무엇이라고 보는가와 관련된 문제다. 인간은 만들기도 잘 하지만 또 놓을 때는 놓는 존재다.

그레이버의 공동체론을 엿볼 수 있는 이 부분의 해설에서 아즈텍 제국과의 차이를 생각해 본다. 아즈텍처럼 강력한 왕권이 무너질 때는 다시 다른 강력한 왕권이 들어온다. 하지만 테오티후아칸 처럼 원래 구심이 없을 때는 도시가 유지 되다가 풀려나간다. 다른 왕권이 들어오는 것도 불가능하다.

 

※공동체 일반론 요약: 공동체는 메커니즘을 복잡하게 만들어 균일하게 감싸안는다. 이 포용성은 무엇보다 여유가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들끓는 내부 긴장 때문이다. 물론 그러다가 솔기가 터지기도 한다. 솔기가 터지면 바지를 갈아입는다.

 

그리고 틀락스칼라

아즈텍 시기의 멕시코 벨리를 정치색으로 구분해보면 마치 섬처럼 다른 색을 하고 있는 도시들이 눈에 띄는데 가장 중요한 곳이 틀락스칼라다. 이 도시는 메소아메리카의 배신자로 유명하다. 왜냐하면 아즈텍 3중 동맹에 맞서기 위해서, 스페인 정복 군대와 동맹을 맺었기 때문이다.

틀락스칼라의 소위 “배신”은 민중 의회에서 토론한 결과다. 스페인의 정복이 메소아메리카에서 가장 민주적인 정치 집단이 민주주의를 확대하려는 열망에서 벌어진 사태라니 이런 역설이 있나 싶다. 그런데 이 동맹은 틀락스칼라 전사들이 코르테스의 부대의 전멸을 목전에 둔 상태에서, 도시 민중 의회에서 숙고한 결과로 이루어진다. 적은 수(천 명!)의 스페인 군대만으로 총, 균, 쇠(그리고 말馬)의 힘으로 정복이 이루어졌다는 제러드 다이아몬드 유형의 주류 역사관을 주적으로 하는 관점이다. 반-왕조적 평등주의 노선의 틀락스칼라 시민들에게는 아즈텍 제국이야말로 민중과 공동체의 배신자들이었다.

 

제국의 배신자 vs. 민중의 배신자

틀락스칼라 도시 민중 의회의 현장으로 책은 우리를 데리고 간다. 이곳은 야심적 지도자의 출현에 반대하는 방향으로 설계되고 실천되는 민주 정치의 현장이다. 이곳에서는 공동체가 복합적인 다수들의 공동체라는 것을 배신하고 지도자가 자기 카리스마로 정치를 해버리는 것을 제일 거북해한다. 의회는 공동체의 배신자를 기르지 않는 방식으로 계속 토론을 해나간다.

시민 의회에서 발언권을 가지려면(의원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통과해야 하는가? 수렵민의 입문식을 방불케하는 과정을 거쳐야 한다. 책 495쪽은 다시 봐도 재밌다. 의회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싶으면 자기 비하와 수치의 정신을 실행해야 한다. 그는 도시 주민에게 복종하기를 요구받는다. 어떠한 탁월함이라도 드러내게 되면(사실 “발언”이라는 일 자체가 그런 것이다) “자아가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조롱과 비난에 노출된다. 너덜거리는 상태로 장기간 은둔하면서 금식, 수면 부족, 피 흘리기, 엄격한 절제 등을 거쳐서 드디어 공직에 돌아와 등장하면 잔치를 연다.

우리는 이 의회의 역사적 토론 장면에 대한 기록을 가지고 있다. 코르테즈가 자기 왕에게 보고한 내용과 함께, 예수회 수도사들과 학자들의 역사 기록에 대한 열정과 노고 덕분이다. 메소아메리카의 운명적 결정이 내려지는 토론이 마치 의회 녹취록처럼 전해지는데, 그것이 서구 역사서에 인용되는 일은 거의 없다고 한다. 100살이 넘은 맹인 의원의 발언을 통해 당시 틀락스칼라 시민들이 스페인 사람들을 (아래로) 보는 관점과 자유민의 자부심이 생생하게 전달된다.

 

정복자의 역사관 비판

메소아메리카의 시민 의회에 대한 구미 역사학의 무시는 왜일까? 정치적 민주주의나 평등주의에 대해 경험해본 적 없는 스페인에 미친 “계몽주의적” 영향을 과소평가하기 위함이다. 그들에게는 민주주의의 기원은 유럽이어야 한다는 관념이 있다. 그리고 정복지의 평등주의는 (비자의식적인) 자연상태에 의한 것으로 여기는 사고 습관 때문이다. 이러한 사고 방식을 놓아 버리자는 것이 우리가 읽는 책의 주장의 하나인 것 같다.

“총, 균, 쇠”적인 사고 방식은 왜 문제인가? 그것은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가정을 담고 있기 때문에 문제적이다. 인간 역사를 기술의 모티브로 서술하는 것의 함의는 무엇일까? 기술 역사관은, 기술 발전은 생산력을 늘려주니까 사람은 생산력에 이끌린다고 본다. 기술은 누구나 갖고 싶어하는 것이고, 그것을 갖기 위해서는 불행도 감수한다고, 지구상의 누구라고 그러하다고 보는 인간관이다. 기술 관점의 선사관은 석기에서 청동기로, 그리고 철기로 역사가 진화했다고 생각한다. 마치 야금술에 비해 석공, 목공, 직조가는 비생산적이라는 듯이 말이다. 기술 인간은 진보된 무기를 가지고 부를 쟁취하고 식민 영토를 정복한다. 인간 아닌 미생물인 천연두 균마저 그들의 행운에 작용한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틀락스칼라의 노의원의 웅변 속에는 부를 탐하는 인간을 멸시하고 자원을 흡입하는 말 등의 병기에 대한 혐오와 거부가 분명히 나타난다. 그는 부와 기술을 추구하는 스페인 사람들과는 달리 “굴종 없이 살아왔으며 한 번도 왕을 인정한 적이 없는 우리가” 어째서 “우리의 피를 쏟아 스스로 노예가 되어야 하는가?”(492) 웅변적으로 묻고 있다. 이런 것이 인간이 아니면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말이다. 감동적이다.

 

소감

선생님이 맥을 짚어주시고, 유튜브 복습 영상도 볼 수 있어서 녹취에 가까운 후기를 겨우 쓸 수 있었다. 초보자의 눈에는 생소한 지명조차도 장애물인데, 어느새 입에 붙는다. 처음 읽을 때 케찰(케트찰)이라는 초록 앵무새(?)마저도 낯설었는데, 사진을 찾아보니 미모가 대단하다. 과테말라 국기에도 그려져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이렇게 자료 검색에 빠져드느라 돌아오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린다. 그리고, 유물 검색에 자주 등장하는 주요 인물들이 모두 여성들이었다. 멕시코 고고학자 젤리아 너틀과 로레트 세르주네, 미술사가 에스더 파스토리 그들의 이력도 흥미진진할 것 같다. 그레이버는 책에서 이런 여성 학자들을 의식적으로 표면으로 끌어내어 주류 학자들과 충돌시키고 있다.

 

※테오티후칸 벽화 그림은 자료를 쉽게 찾을 수 있음.

https://www.jqjacobs.net/mesoamerica/teo_murals.html

전체 1

  • 2025-07-19 11:25

    정말 책보다 더 생생한 후기입니다! @.@ 우리 유리샘의 생기발랄 문체의 힘은 후기에서 제대로 발휘되는군요. 아파트 아파트~
    그리고 마지막에 주신 말씀대로 두 그레이버 선생님들은 여성 학자들의 연구를 더 주목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