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불교] 무엇이 고인가
◎ 유쾌한 불교_무엇이 고인가?
1. 무엇이 苦인가?
불교는 고를 강조한다. 괴로움(苦)이라고 해도 좋을 고의 강조는 해탈 개념과 관련되어 있다. 고란 단지 육신의 괴로움이나 상황의 난처함을 가리키지 않는다. 오사와 선생님과 하시즈메 선생님은 고를 인간 존재의 불완전함으로 해석하는 것이 좋다고 본다. 존재는 모든 상황의 우주적 인과에 놓여 있기 때문에 끊임없이 변화하는 인과의 장에서 어제는 좋았으나 오늘은 나쁘고 어제는 불편했으나 오늘은 편한 상황을 거듭한다.
불교가 바라보는 존재론적 차원의 고는 ‘윤회’라는 개념으로도 알아볼 수 있다. 하시즈메 선생님은 이렇게 설명한다.
“인간이 죽으면 생명이 아니게 되고, 구성요소인 분자나 무기물 같은 여러 가지로 분해됩니다.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다면 사는 것은 그렇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일신교 유대인들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되돌아간다’고 말합니다. 이렇게 생각한다면 ‘고’를 극복하는 방법은 간단한 것이죠.
인도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윤회가 무엇이냐면, ‘죽어도 생물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라는 신념입니다. 그걸 끝까지 밀어붙이면 어떻게 되냐면, 죽은 뒤 다시 한번 생명이 됩니다. 그것은 영원히 사는 것이 아니라, 또 한번 죽는다는 거죠. 그리고 이것을 반복합니다. 윤회는 ‘살고 죽는다는 제약이 영속한다’는 신념으로, 죽지 않고 생명이 영속한다는 생각과는 상당히 다른 것입니다.
영원히 생물로 남는다는 제약, 이런 제한을 일단 걸어 두겠습니다. 제한이 생기면, 다른 식의 해결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힌두교가 생각해 낸 해결은 ‘죽음은 좀처럼 오지 않는다’라는 해결일 겁니다. 천인(天人)과 같은 것들이 ‘수명이 길다’는 식의 생각이죠. 그런데 수명이 길다고 하더라도 빚을 미루는 것과 마찬가지이므로 문제의 근본적인 해결이 될 수는 없습니다. 역시 언젠가는 죽기 때문이죠.
이에 비해 불교는 ‘진정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깨달음’이나 ‘니르바나’가 있다고 한다면, 이것은 ‘죽지 않는다’가 아니라 ‘생사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살아 있는지 죽었는지 확실하지 않다’와 같은 상태니까요. 이것으로 죽지 않게 됩니다.”(『유쾌한 불교』, 94~95쪽)
그러므로 고로부터의 해방은 그런 인과의 장 전체를 깨달음으로써 그 상황 자체에 얽매이지 않게 되는 상태이다. 그래서 고뿐만 아니라 깨달음과 니르바나는 완전히 개인적 사건이 된다.
유대교가 고를 바라보는 방식은 불교와 다르다. 일단 유대교의 고는 불교에서 나타나는 존재론적 차원의 괴로움이 아니다. 공동체의 수단이다. 외세의 공격, 기근, 사회적 곤란과 같은 외부 환경이 주체에게 가하는 물리적 심리적 억압이다. 이런 고의 해결은 상황 자체가 외부에 있고 그 해결도 God의 심판과 같이 외부에 있게 된다.
2. 자유의지의 신학
오사와 선생님과 하시즈메 선생님의 대담에서 오늘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자유의지의 주권 다툼 문제였다. 유대교는 전지전능한 이를 오직 God이라고 하기 때문에 선택 즉 인과의 주체는 God이다. 나에게 벌어진 모든 일은 신의 뜻이기에 행불행 전부를 신에게 묻고 신에게서 답을 들어야 한다. 반면 불교는 주체가 발휘하는 모든 자유의지 역시 인과의 장 안에 들어 있음을 강조한다. 따라서 불교에서 발심과 같은 자유의지적 포인트는 ‘용기를 가지고 바르게 살아가자’와 같은 식이 될 뿐, 어떤 괴로움의 구체적 제거라든가 어떤 행복의 구체적 달성과 같은 결론을 이끌어내는 일과 큰 관계가 없게 된다.
우리는 종종 ‘내가 이렇게 열심히 했는데 결과가 왜 이 모양인가?’하는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내가 하는 결심과 그에 따른 행위, 다시 그에 따른 결과를 산술적으로 계산해서 따지고 부당하다는 평가를 내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작업을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모든 인과의 종합자이신 God밖에 없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 주체의 선택과 책임이 강조되는 ‘열심주의’는 상당히 유대 신학적 사고라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