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쾌한 불교] ‘유식唯識’과 윤회
‘자리이타원만自利利他圓滿’
대승불교의 표어로 자신의 행복과 타인의 행복이 모순 없이 양립하고 있다는 뜻이다.
‘유식唯識’
마음의 본체인 식(識)을 떠나서는 어떠한 실재(實在)도 없음을 이르는 말(참조:표준국어대사전)
이 설을 체계화하는 데 가장 공헌했던 이는 아상가와 바수반두이다. 둘은 형제로 아상가가 형이다. 반수반두의 저작은 아주 많은데, 너무 많아서 두 사람이 아닌가 하는 설이 제기되기도 한다.
불교의 기반에는 윤회사상이 있다. 생명이 있는 모든 것을 죽음을 맞이한다. 생이 끝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윤회하는 것일까? 여기에 대한 답을 바수반두가 인간의 정신활동을 여러 층위로 나누어 설명했다고 했다. 책의 설명을 따라가보자.
인간이 죽으면 의식들은 해체되고 만다. 의식은 인간의 몸에 지탱하고 있지만, 그 몸이 뿔뿔이 흩어지기 때문에 그곳에서 의식은 사라지고 만다. 윤회한다는 것은 육체에서 벗어난 영혼이 윤회한다는 게아니다. 영혼이라는 것을 불교는 인정하지 않는다. 의식을 실재하는 물리적 프로세스에서 파생되는 것으로 생각하면, 육체가 파괴되어 윤회할 것이 없는 것이 되기에 그렇게 생각하면 안 된다. 그래서 육체가 파괴되어도 정신활동의 모든 것까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부분이 보전되어 거기에서 다시 의식적인 부분이 다음 생에서 재생된다고 생각한다. 유식론은 이런 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유식론의 정신활동의 층에는 가장 표면적인 것부터 오식(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말나식(末那識), 아뢰야식(阿賴耶識)이 있다. 말나식은 자아의식 같은 것으로 ‘이런 나’라는 의식과 아집이 여기에서 나온다. 말나식은 아뢰야식을 ‘아트만’(자아)으로 착각하기도 한다고 한다. 무의식에 해당하는 정신활동이 바로 ‘아뢰야식’이다. 무한한 과거로부터 현재까지 윤회를 통해서 계속되고 있는 무의식적이고 비인칭적인(나라는 의식보다 앞서는) 생명적·정신적 활동 같은 것이다. 전생의 업이 현생의 바탕이 되듯이, 전생의 흔적이 ‘종자種子’ 즉 씨앗이라는 형태로 아뢰야식에 쌓인다. 이 축적을 ‘훈습薰習’이라고 한다. ‘현행 종자는 아뢰야식에 훈습된다’고 한다.
윤회에 의하면 현생에 아무리 공덕을 쌓아도 만약 전생에 포인트를 잘 쌓아두지 못했다고 지금 삶은 괴로울 뿐이다. 다른 측면에서 현생에 포인트를 잘 쌓아둔다면 다음 생의 나는 좀 편할 수 있다. 윤회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마음 깊이 믿지 않아서인지, 내가 기억하지도 못하는 전생들의 업에 의해 현생이 영향을 받는다고 생각하니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든다. 또 기억하지도 못할 다음에 생에 어떻게 되든 내가 알 바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책에서 축구 경기의 예를 보니 내가 삶을 현생에 국한하고 있기에 그런 생각을 하는구나 싶다. 축구 선수가 열심히 훈련을 했다. 그런데, 이번 경기의 성적이 좋지 않았다. 그랬다고 그의 노력이 헛되다고만 할 수는 없다. 이번 경기의 결과가 아니더라도 훈련의 포인트는 다음 경기나 그 다음 경기에 분명 좋은 결과로 따라올 것이기 때문이다. 윤회가 진리이든 아니든, 윤회는 깨달음이라는 궁극적 목적을 위해 그 프로세스를 귀하게 가져갈 수 있는 하나의 방편이자 전제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