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강
[채식주의자] 물구나무선 사람
『채식주의자』
물구나무선 사람
2024.11.25. 최수정
고대 신화에서 ‘변신’은 죽음의 위협을 모면하게 하는 유일한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아폴론의 유혹에서 벗어나기 위해 월계수로 변신한 다프네 신화도 그 중 하나다. 나는 『채식주의자』를 읽으며 그 오래된 고대의 나무 신화가 떠올랐다. 우리가 잊고 있지만 아주 오래전 나무가 사람이 되고 사람이 나무가 되던 시대가 있었다. 한강 작자는 『채식주의자』 통해 그 시간의 기억을 떠올리게 한다. 그리고 그 기억으로 우리 고통이 조금은 치유되길 바라고 있다.
『채식주의자』는 고통을 아버지, 남자의 폭력적 위협으로 표상한다. 그리고 그 강압적 위계로 대변되는 육식을 거부하는 주인공을 그린다. 그녀는 고대의 나무 신화처럼 자신에게 가해지는 위협을 피해 스스로 식물이 되고 싶어 한다. 그리고 자기가 먹은 고기, 목숨들이 끈질기게 명치에 달라붙어 넘어가지 않는 고통으로 괴로워한다.
하지만 그녀는 자신의 살길을 찾는다. 살아야 하는 것이 생명의 이유이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을 위협하는 것들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해, 다른 탄생을 위해 자신의 죽음을 꿈꾼다. 그것을 위해 그녀는 자기 고통을 직시하고 그 그통을 극복하기 위해 물구나구서기를 한다. 땅 속 깊이 손을 뻗어 자신을 소생시킬 흙을 다시 움켜잡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채식주의자
『채식주의자』 주인공 영혜는 꿈을 꾸기 전날 아침, 고기를 썰다가 자기 손을 썬다. 피를 흘린 자기 손가락을 입에 넣자 마음이 편해지는 것은 왜일까? 손가락을 썰다 부러진 칼날이 고기에 섞여 들어가 남편의 입에서 씹히고 남편의 고함으로 이어진다. 그러나 영혜는 놀라지 않는다. 오히려 침착해지고 모든 것이 한꺼번에 자신으로부터 미끄러져 밀려나가는 것처럼 느낀다. 그녀만이 그 무한한 공간 속에 남은 것처럼 모든 것으로부터 아득히 멀어져가는 것 같다. 당연하게 느껴지던 것들이 천천히 뒷걸음질로 물러나고 있었다.
영혜는 그 뒤로 몇 번 더 꿈을 꾼다. 그리고 그 꿈속에서 자기 뱃속을 들여다본다. 그녀의 뱃속에 남아 있는 낯익거나 혹은 낯선 피투성이의 얼굴을 본다. 그 안에 그녀가 날카로운 위협과도 같은 칼날과 함께 삼킨 목숨들이 웅크리고 들어앉아 있다.
몽고반점
영혜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은 영혜가 광합성하는 식물의 성질을 내포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가족들 사이에서 고기를 먹고 사는 동안에도 영혜의 내부에는 나무의 속성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에게 꿈의 시간이 찾아온다. 꿈은 영혜가 자신을 알기 이전의 시간으로 그녀를 데려가 스스로 자신의 고통을 바라보게 만든다. 그리고 고통을 직시하며 영혜는 그녀의 육체가 어떤 ‘힘이 있는 덧없음’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된다. 육체의 덧없음과 넘치는 생명의 힘을 동시에 갖고 있는 그녀의 육체는 ‘어떤 성스러운 것, 사람이라고, 그렇다고 짐승이라고도 할 수 없는, 식물이며 동물이며 인간, 혹은 그 중간쯤의 낯선 존재’(128)임을 받아들인다.
꿈의 시간
영혜는 꿈에서 본 얼굴들이 사는 세계를 갔다 왔다. 선형적 시간의 질서를 넘어 자기 생명의 근원인 식물이 되기 위해 매일 물구나무를 선다. 자기 몸을 거꾸로 세우고 물구나무를 서며 깨어있는 상태에서도 꿈의 시간을 산다. 영혜는 물구나무서기를 하며 죽음처럼 자신을 벗어나 다른 세계에 가 있다. 꿈속에서 그녀의 몸에 잎사귀가 자라고, 손에서 뿌리가 돋고, 땅속으로 끝없이 파고 들어간다. 물구나무서기를 하는 영예의 표정은 ‘어린 시절의 어느 순간과 닮아 있다’(216) 그리고 무구한 웃음을 짓는다.
영혜는 매일 죽음의 의식과 같은 ‘물구나무’서며 시간을 되돌리고 있다. 꿈의 시간을 갔다 오며 자신의 고통을 ‘치유’한다. 꿈속에서 자신이 무구했던 때로 돌아가며 회복된다. 그때는 그녀가 광합성을 하며 식물로 살던 시대다. 영예는 날마다 두 세계의 시간을 살며 ‘내장의 퇴화’를 꿈꾸고, ‘이제 곧 말도 생각도 사라지게 될’(224) 순간을 기다린다. 영혜는 되돌아오고 순환하는 시간 속에서 산다.
하지만 사람들은 모두 영혜를 미쳤다고 한다. 미치지 않은 정상인 사람들의 시간은 흐른다.(225) 시간은 멈추지 않는다.(244) 이제는 더 이상 시간이 남아 있지 않다.(250) 종말이 있다. 그러나 그것이 누구의 종말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