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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과 스웨덴 특파원이 들려주는 슬기로운 외국살이

[슬기로운 tOkyO살이] 에도시대로의 시간여행

작성자
토토로
작성일
2025-02-01 21:03
조회
79

나라이쥬쿠


  모처럼 가족 모두 일정이 없는 주말이라 아침에 일어나서 애들에게 “드라이브나 다녀올까?” 했더니, ‘학원 숙제가 있다.’ ‘시험이 다음 주다.’ ‘피곤해서 쉬고 싶다.’ 등 가기 싫은 이유를 계속 대고 있었다. “일단 옷을 입고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자.”고 완강하게 거부하던 애들을 차에 태웠다. 목적지는 우선 고속도로를 타고 정하면 되는 것. 준비하고 나가는 것이 귀찮아서 그렇지, 일단 나가면 잠시 투덜거리다 곧 즐거워할 것임을 알기에 잠시 뒷좌석의 투덜거림을 참아낸다. 

  최대한 내 두뇌를 풀가동시키며 어디를 가면 좋을지 생각을 했다. 짧은 당일치기 여행이라도 늘 가던 그곳에 가고 싶을 때도 있고,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풍경을 보고 싶을 때도 있다. 이번에는 새로운 곳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검색도 해 보고 남편과 애들에게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이 없냐고 물어보기도 하다가 갑자기 고속도로 휴게소의 관광 안내 책자에서 우연히 본 사진 한 장이 생각이 났다. 나가노현에서 유명하다고 하는 곳은 거의 다 가보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곳은 나가노현의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다소 생소한 그런 모습이라 기억을 해 두고 있었지만, 지명도 모를뿐더러 그곳의 특징이라고는 사진에 나온 그 풍경 밖에 없어서 무작정 ‘나가노현 전통 마을’이라고 구글에서 검색을 했다.

  그곳은 ‘나라이쥬쿠(奈良井宿)’라는 곳으로 ‘나카센도(中山道)’라고 하는 에도(현재의 도쿄)와 교토를 잇던 옛길 상에 있는 역참마을((宿場町, 슈쿠바마치) 중 한 곳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풍경도 멋지고, 역사적 의미도 있는 이곳을 당일치기 여행의 목적지로 정했다. 애들은 “거기 맛있는 거 뭐 있어요?”하고 목적지에 대한 만족감을 표시했다. 

  도쿄에서 두 시간가량 고속도로를 달리다 국도에 내려 한 시간쯤 시골길을 가니 나라이쥬쿠에 도착했다. 차를 주차하고 내리니 눈발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쉽게 그칠 눈은 아닌 것 같아서 챙겨온 등산화로 갈아 신었다. 일단 우리는 야마나시나 나가노 쪽으로 가게 되면 습관처럼 등산화를 챙기는데, 이번에도 잘 챙겨왔다 싶었다.

마을 입구에 기차역이 있는데 레트로 향기 물씬 난다. 아직도 이런 기차역이 있는 것이 반갑다. 전광판으로 가득한 기차역에 익숙해져 있는데, 덕지덕지 붙어있는 안내문을 하나하나 보니 정겨움이 느껴지며 나도 모르게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조그만 시골 역 구경을 얼마 하지 않았는데, 밖으로 나오니 이미 눈이 조금 쌓여 있다. 마을에 들어서니, 마치 시간이 멈춰버린 듯 고즈넉한 풍경이 펼쳐졌다.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목조 건물 위에 하얀 눈이 쌓여 마을 전체가 그림 같은 풍경을 만들어 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다. 에도시대로 걸어 들어가는 기분이 들며 이 길이 끝나지 않기를 속으로 바라며 천천히 걸어갔다.



  차로 2-3시간만 달리면 오는 이곳을 에도시대 사람들은 몇 달을 짐을 지고 힘겹게 걸어왔겠지 싶었다. 에도에서 교토까지 딱 중간 지점쯤에 해당하는 이곳까지 오면 이제 온 만큼만 더 가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아직도 온 만큼이나 더 가야 한다고 걱정의 한숨을 내쉬었을까? 번성했을 당시에는 치열한 그들의 생활터전이었을 텐데 지금은 한적한 여느 시골 마을과 다르지 않다.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는 지점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걷다 보니 좁은 도로와 집들 사이에 작은 신사와 절이 눈에 많이 띄었다. 절도 다양한 종파의 절들이 있었는데, 전국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드니 종교도 다양했을 것이다. 먼 길을 떠나거나 돌아오는 이 길에서 삶에 대한 고단함과 불안함을 조금이나마 해소했었기를… 하며 감상에 젖어 걷다, 따뜻한 차 한 잔이 간절해져 작은 찻집에 들어섰다. 창밖으로는 눈이 내리는 풍경이 보이고, 아늑한 실내에는 달콤한 향이 가득했다. 우리는 달콤함의 정체를 찾아 당고와 고헤이모치를 주문했다. 마침, 출출하던 참이었는데 구워지는 그 사이를 참기가 어려웠다. 고헤이모치는 나라이쥬쿠에서 유명한 간식거리라고 한다. 쌀가루를 반죽해 만든 떡을 나무 꼬치에 꿰어 숯불에 구운 뒤, 된장과 간장을 섞은 소스를 발라 먹는 음식이다. 먼 길 이동해야 하는 이들에게 이보다 빠르고 간편하게 배를 채워줄 수 있는 간식이 또 있었을까? 역사와 문화가 응축된 그 맛은 정말 특이했다. 고소하면서도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껍질이 바싹하게 구워져서 씹을 때마다 고소한 풍미가 입안에서 퍼졌다. 간장과 된장이 어우러진 소스는 그 자체로 깊은 맛을 느끼게 했다. 나에게 고향의 맛은 아니지만, 누구에겐 분명 고향을 느끼게 하는 맛일 것 같았다.

  나라이쥬쿠에서 보낸 시간은 잠시 바람이나 쐬고 오는 여행을 넘어서, 마음속 깊이 남는 경험이었다. 겨울의 차가운 공기, 눈 내리는 풍경, 그리고 그곳의 고요한 신사와 절들, 그리고 고헤이모치의 따뜻한 맛까지. 모든 것이 어우러져 나에게 진한 감동을 전해주었다. 나라이쥬쿠의 그 길은 단순한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삶을 찾아 나서는,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길인 것 같았다.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것들의 소중함을 그곳에서 느낄 수 있었다.

전체 6

  • 2025-02-19 19:25

    나라이주큐의 눈 오는 풍경이 진자 인상적이네요. 천천히 눈이 내리는 소리가 들리는 글입니다.
    레트로한 역 사진도 좋아요. 역이라. . 길들의 정류장. 인연의 정류장. 낯선 시간과 경험이 교차하는 곳. . 토토로샘 글을 읽고 있으니 긴 겨울 산책이 땡깁니다. 고헤이모치도!! ^^


    • 2025-03-02 22:19

      눈은 마법입니다. 선생님.ㅎㅎ 옛스러운 것이 멋져보이니 저도 이제 나이가 많이 들었나봅니다. 하하하. 선생님과 함께 걸으면 더 좋을 것 같습니다!!


  • 2025-02-02 22:58

    차가운 겨울, 눈은 내리고, 고요한 신사와 절. 당고와 고헤이모치까지. 구글 맵을 확인해보니 정말 나라이쥬쿠는 도쿄와 교토의 딱 중간이네요. 풍경이 약간 우리나라 강원도 정선, 태백 같은 느낌의 눈 많고 고즈넉한 분위기에 산이 많은 도시 같습니다. 아이들이 특히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특히 간식도요.


    • 2025-03-02 22:22

      의외로 애들이 이런 곳을 좋아합니다. 눈이 있으니 금상첨화겠지요. 도쿄에서 교토까지 걸어서…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는데, 몇 달을 걸어야겠지요?


  • 2025-02-03 23:38

    과거와 현재의 중간, 그 어디즈음에 서 있는 토토로 선생님이 그려집니다. 과거를 간직한 나라이쥬쿠에서 맛보는 당고와 고헤이모치의 맛은 더욱 특별했을 것 같아요.
    강평 선생님 말씀처럼 언젠가 가보고 싶은 곳의 리스트에 나라이쥬쿠를 올려봅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떠올릴 토토로 선생님의 여행도요.^^


    • 2025-03-02 22:24

      저 곳에 외국인들만 가득하니, 참 묘한 기분이었습니다. 영화 세트장에 들어 와 있는 느낌이라고 할까요? ㅎㅎ 꼭 나라이쥬쿠에서 저를 떠올려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