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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쿠노 카츠미] 바람 계곡의 애니미즘(2/2)

작성자
덕후
작성일
2025-05-24 17:50
조회
48

일본어 강독팀에서 읽은 오쿠노 카츠미의 モノも死者きている世界から人類學者わったこと(물건도 돌도 죽은 자도 살아 있는 세계의 사람들로부터 인류학자가 배운 것)을 연재합니다. 이한정 선생님의 지도 아래 오선민 선생님, 김미향 선생님, 조혜영이 함께 번역했습니다.

 

 

알파벳, 자연의 탈 신성화

 

무라세 마나부(村瀬学)가 지적하듯이 미야자키 애니메이션에서는 나우시카부터 바람이 분다에 이르기까지 바람의 모티브가 많이 사용되고 있다(무라세 2015: 230). 마사키도 또한 나우시카의 바람에 착안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호흡과 바람이 매우 닮아 있다. 따라서 모든 동물은 바람이 체내로 들어가고, 바람은 체외로 나감으로써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그 바람이 멈출 때 모든 동물은 죽는다.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것이다. (중략) 바람은 아득히 옛 시대부터 호흡에 비유되어 생명을 관장하는 것, 좀 더 단적으로 말하면 생명 에너지라고 여겨져 왔다. (마사키 2011: 27-8)

 

인간을 포함해서 모든 생명은 호흡 즉 바람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바람이 체외에서 체내로 들어와 체외 쪽으로 다시 나가는 과정을 반복함으로써 생명이 존재한다. 생명 쪽에서 바라보면 그것은 바람을 들이마시고 바람을 내뱉는다고 하는 것의 끊임없는 왕복 운동에 의해 살아 있다. 그렇다면 바람이란 생명을 살리는 것, ‘생명에너지임에 틀림없다.

나우시카의 바람을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에코크리티시즘(ecocriticism) 연구자 데이비드 에이브람(David Abram)의 논의가 시사적이다. 에이브람은 알파벳에 의한 문자문화를 손에 넣기 이전에 인간은 바람, 즉 공기를 생명의 원천이며 성스러운 것이라고 파악하는 애니미즘을 살아가고 있었다는 이색적인 애니미즘 논의로 유명하다(에이브람 2017).

바람은 눈으로 볼 수 없다. 볼 수 있는 것은 공기나 바람이 일으키는 끊임없는 움직임 쪽이다. 미루나무 가지가 휘어지는 상태나 작은 시내의 수면에 잔물결이 이는 상태를 야기하는 힘이 공기나 바람에는 있다(에이브람 2017: 292). 삼라만상의 활동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서 예전부터 공기, 바람, 숨 등에는 신성성이 부여되어 있었다.

그러한 고대로부터 존재했던 바람 애니미즘은 알파벳을 사용하는 문자문화의 발달과 함께 점차 상실되었다. 알파벳은 인류의 가장 오래된 스크립트인 설형문자가 사용되고 있었던 땅에서 그 2000년 후에 모든 셈족에 의해 기원전 1500년쯤에 만들어졌다. 히브리어나 아라비아어 같은 셈족 계통의 모든 언어는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모음의 체계를 갖지 않는다(1991: 186-7).

고대히브리어는 22개의 자음 알파벳만으로 구성되어 있다. 히브리어에는 모음 알파벳은 없는 것이다. 모음이란 숨 그 자체이고, 자음을 움직여 말을 만들어내는 바람이라는 힘도 있어서 그런 고로 신비롭기도 했다. 히브리어에서 ()’을 나타내는 문자는 자음으로 이루어진 ‘YHWH’이다. 히브리인은 자음으로 공기 혹은 바람을 내보내고 흙덩어리에게 생명을 불어넣음으로써 말을 자아내고 있다(에이브람 2017: 318).

그 후 자음문자 체계 안에 모음을 도입하고 모음의 문자화를 발전시켰던 것은 고대그리스인들이었다(1991: 188; 에이브람 2017: 323). 그 일로 인해 발화를 종이 위에 그대로 베껴 쓰는 것이 가능해짐과 동시에 숨이나 바람은 신비롭지 않게 되었다고 에이브람은 말한다. 바람은 탈신성화된 것이다(에이브람 2017: 324-5).

수목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말은 고대그리스인의 감각이 자연의 풍경에 대한 직접적인 참여에서 멀어지기 시작하고 있었음을 나타내고 있다(에이브람 2017: 160). 자음과 모음을 모두 포함하는 그리스어의 알파벳 성립 후에 숨과 공기, 혹은 바람의 근원적인 힘은 소멸로의 길을 따르게 되었다(에이브람 2017: 325).

 

두개(頭蓋)로 들어가기 전의 아니마

 

그 후 유럽, 더욱이 남북아메리카에까지 알파벳(문자문화)이 퍼졌던 것에 관하여 에이브람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알파벳이 진출하는 장소에서는 공기로부터 환영이나 보이지 않는 힘이 내쫓겨 공기로부터 그런 아니마가, 그 영혼적 깊이가 제거되었던 것이었다. (에이브람 2017: 327)

 

자음과 모음의 양쪽으로 구성되는 알파벳이 온 세계에서 정착함에 따라 공기와 바람으로부터 아니마가 빼앗겨지고 있었다. 아니마는 영혼과 힘을 말한다. (바람의) 애니미즘의 쇠퇴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쓰여진 텍스트가 말해지고 비로소 숲이나 강의 소리가 자취를 감추었다. 이때에 처음으로 언어는 보이지 않는 숨과의 옛날부터의 결속을 풀고, 혼은 바람으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영혼은 주변의 공기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았던 것이다. (에이브람 2017: 328)

 

자연 속의 음이나 소리로부터 완전하게 독립된 언어 텍스트가 나타나, 공기나 바람으로 만들어졌을 아니마가 자연 속에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디로 가버린 것인가? 한때 자연 속에 있었던 아니마는 인간의 두개(頭蓋) 안으로 서서히 감금되었다고 에이브람은 말한다(에이브람 2017: 329). 알파벳에 의해 자연의 영혼적 깊이가 소실되어 인간 안으로 혼이나 힘이 이동하여, 인간중심주의가 진행되어 갔다고 바꿔 말해도 좋다.

에이브람은 또한, 알파벳 이전에 보였던 공기나 바람의 위상을 미국 선주민 안에서 탐구하고 있다. 나바호 사회에서는 지상의 모든 존재자가 창조되는 것에 앞서, 바람이 있었다. 나바호의 원로에 따르면, 지하세계에는 최초에 바람이 있었다. 바람이 남자여자’, ‘말하는 신이나 부르는 신에 대해 숨 즉 생명을 주고 이끌었다(에이브람 2017: 300). 가수는 노래하는 것을 통해서 공기를 변화시키고 반대로 노래는 커다란 자연의 아니마 활동에 작용을 미쳤다(에이브람 2017: 305).

나바호에게 있어서 바람은 세계의 소유물이며 그 세계에 인간이 융즉(融卽)하고’(에이브람 2017: 306) 있었다. 융즉이란 19세기 철학자 뤼시앵 레비브륄(Lucien Lévy-Bruhl)에 의해 제시된, 형태나 정도에서는 차이가 있는 생물과 사물을 하나로 결합시키는 심성을 말한다. “이 심성에 있어서는 하나와 다수, 같음과 다름 등의 대립은 그 한쪽을 긍정하는 경우, 다른 것을 부정하는 필연을 포함하지 않는다”(레비브륄 1953: 95). 나바호 사회에서는 인간과 바람은 어느 쪽이 어느 쪽이라고 하는 것이 어려울 정도로 일체화하고 있었다.

 

 

바람 계곡에서 바람을 느끼고 바람에 순응하다

 

에이브람에 의한 바람의 아니마를 둘러싼 이 대담한 주장을 그대로 인간 문명 붕괴 후의 이야기인 나우시카에 적용하는 것은 무모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단서로 하여 한번 쯤 생각해보는 것은 가능할 것이다. 다음에는, 인간 두개골 깊숙한 곳에 틀어박혀 버린 이전 시대에 불고 있었던 바람을 상상하면서 바람 계곡의 바람을 읽어보자.

나우시카에서는 바람에 대한 모종의 의식이 행해지거나 바람에 대한 신앙이 그려지거나 하는 것은 아니다. 바람은 연이나 풍차나 비행 장치 메베 등의 물건뿐만 아니라, 인간에 대하여 커다란 영향을 주지만 겉으로는 무엇인지가 제시되지 않는, ‘행위 주체성(에이전시)’을 띤 아니마와 힘의 원천으로 등장한다. 바람 계곡의 주민들은 그 바람을 읽고 바람에 순응하며 바람에 의지해 살고 있다.

바람 계곡은 계곡을 지나는 바람 덕에 부해에서 기인하는 장기(瘴気)가 닿지 않는 변방으로 그려진다. 그곳을 지나는 바람이란 사람들의 생존을 위협하는 사악한 바람인 장기(瘴気)에 대항하는 좋은 바람이다. 마사키의 말을 다시 인용하면, 바람 계곡의 주민들에게 있어서 바람은 생명을 관장하는 것, 생명 에너지임에 틀림없다(마사키 2011: 28).

나우시카는 바람의 보이지 않는 힘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는 존재, 변방 제일의 검객인 유파가 말하는 바 뛰어난 바람의 사용자로서 등장한다. 나우시카의 초반에는 유파가 잘못 쏜 화살 때문에 사납게 날뛰는 오무를 달래어 숲으로 돌려보내기 위해 나우시카가 무시부에(虫笛)를 사용한다. 무시부에란 바람을 구멍으로 통과시켜 소리를 내는 악기이다(마사키 2011: 28). 벌레 소리를 바람의 힘을 빌려 재현한 것이 무시부에다. 나우시카는 오무의 사나운 마음을 진정시키기 위해 자연의 아니마의 화현(化現)음색을 이용한다. 그곳에서는 공기와 바람의 아니마가 세계를 통제하는 알파벳 문화 이전의 애니미즘세계가 펼쳐지고 있다.

나우시카는 바람을 자유자재로 조종할 수 있다고 여겨지는데, 그녀는 반드시 주체적인바람의 사용자는 아니다. 그녀는 바람이 부는 대로, 바람의 뜻에 따라, 바람을 읽는 요령 같은 것을 깊이 이해한 매개적 존재라고 보는 편이 좋을지 모른다. 그런 의미에서 고야마가 말하듯이 나우시카를 샤먼적 존재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우시카는 바람의 보이지 않는 힘에이브람의 말로는 아니마, 영혼적 깊이, 성스러운 존재, 신성성을 길들이거나, 통제하거나 하는 것이 아니라, 거스르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여 순응하면서 나바호처럼 바람의 세계에 융즉되어, 바람의 뜻대로 움직임으로써 바람 계곡에서 살고 있다.

 

공감각과 융즉(融卽)

 

마지막으로 에이브람의 말을 인용하자.

 

애니미즘적 담론은 사실에 근거한 세계와의 관계를 왜곡하고 있기는커녕,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대지와의 직접적이고 공감각적인 관여에 필연적으로 대응하고 있다. (중략) 직접적이고 전반성적인 지각은 본래 공감각적, 융즉적, 애니미즘적이고, 우리를 둘러싸는 물건이나 요소를 활기 없는 대상으로서가 아니라 표정이 풍부한 주체, 존재물, , 잠재력으로써 개시하는 것이다. (에이브람 2017: 175)

 

에이브람에게 있어서 애니미즘이란 왜곡된 세계이해가 아니다. 그것은 대지와의 공감각, ‘융즉적인 경험이다.

지각된 것은 힘을 갖춘, 표정이 풍부한 주체가 되어 우리 앞에 출현한다. 대지와 자연에 내던져진 인간의 지각이란 공감각적 즉, ‘시각적 초점과 청각적 초점은 구별이 안 된다’(에이브람 2017: 174). 감각기관 전체를 통하여 그때그때 터득할 수 있는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주위 자연과의 사이에서 주고받을 수 있는 지각임에 틀림없다.

나우시카에서는 바람과 곤충들은 공감각적으로 지각된다.

또한 자신이 거주하고 있는 대지와의 직접 무매개적 경험이 타인이 느끼는 것을 내가 느끼게 해줄 수 있다는 마술적인 융즉’(에이브람 2017: 172)을 초래한다. 사람과 대지, 인간과 자연 사이에는 이쪽에 있을 뿐이고 저쪽에는 없는, 저쪽에 있을 뿐이고 이쪽에는 없다는 것이 아니라 이쪽에 있고 동시에 저쪽에도 있다고 하는 융즉률(融卽律), 인간이 주인이면서 동시에 대지와 자연도 또한 주인이라는 융즉률이 작동하고 있다.

나우시카에서 그려지고 있는 것은 바람과 곤충과 동물과 식물 등의 삼라만상을 인간이 감각기관 전체를 통하여 느끼는 공감각적 애니미즘이고, 인간이 주인이면서 동시에 대지와 자연도 또한 주인이라고 하는 융즉적인 애니미즘이다. 바람 계곡의 사람들은 삼라만상과의 관계를 스스로 단절하는 일 따위 없다. 그것들의 마음을 읽고, 순응하고, 의지하면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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