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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철학답사 탐구생활_종교인류탐구] 영성과 어머니
6장 종교인류탐구 (1)
영성과 어머니
오 선 민
1. 종교의 젠더
종교에도 性(젠더)이 있을까? 나는 평소에 종교의 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보지 못했는데 이번 답사를 통해 인간의 영성과 젠더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우리가 아는 대부분의 종교에는 신이 있다. 그리고 신이라고 하면, 휜수염 펄펄 날리는 엄격한 얼굴의 아버지가 떠오른다. 이 점은 대충 종교의 얼굴을 떠올리기만 해도 분명해진다. 부처님, 예수님, 마호메트는 전부 남성이다. 뉴스에서 보면 최근 성하하신 교황의 뒤를 잇기 위해 개최된 콘클라베에서 카톨릭 최고 사제를 뽑는 회의의 참가자는 모두 남자 추기경들뿐이었다. 석가탄신일에 조계종에서 열리는 대법회에서도 비구니 스님을 찾아보기는 어려웠다. 이런 여러 인상 때문에 종교의 젠더를 묻는다면 남성, 그리고 피조물을 낳고 길러 깨달음의 길로 인도한다는 의미를 더해 ‘아버지’라고 간주하게 된다. 답사를 준비하면서 우리가 함께 읽은 책 『일본철학사상사』도 철학사상의 슈퍼 히어로들은 대부분 남성들이어서 애써 ‘여성’과 관련된 장을 따로 뽑아야 할 정도였다. 거론되는 여성 철학자들도 그리 많지 않았다.
일본 고대의 고승들과 철학자들 전부가 남성임을 감안하고 떠난 답사 여행은 아니었지만, 나도 막연히 아버지–지도자의 얼굴을 떠올리면서 답사를 시작했었다. 그렇지만 실제로 첫날부터 나의 마음을 끈 것은 지도자도, 아버지도 아니고 어머니였다.
답사를 전반적으로 개괄하자면 훌륭한 스님들의 업적에 대해서는 생각 이상으로 큰 감동을 받았다. 답사는 일본 고대 철학을 지탱한 불교의 두 중파 진언종과 천태종의 모태가 되는 절의 방문으로 시작했는데, 책에서는 각 종파의 시조로 구카이(空海; 774~835)와 사이초(最澄; 767~822) 스님을 소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몇십 페이지 되는 두 분의 업적에 대한 소개는 그 자체로도 방대했다. 책을 읽으면서도 헤이안 시대에 당나라에 목숨을 걸고 배를 타고 건너 불법을 배워 온 두 승려가 보여준 구도의 염원은 대단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실제로 진언종의 본산인 고야산(高野山)의 엄청난 규모라든가 현재까지도 꾸준히 산을 오르내리며 순례를 하는 많은 사람들을 보니 책에서 읽었던 것보다 훨씬 더 그 영력이 대단함을 알 수 있었다. 한 인간의 영적인 통찰력과 구법에 대한 신념이 천 년의 세월을 견인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런 인간도 하늘에서 뚝 떨어지거나 땅에서 불쑥 솟아나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로부터 태어나고, 누군가의 응원으로 구도의 길을 닦는다.
2. 만물을 기르는 것은 가슴
압도적 규모의 사찰들과 줄기찬 순례객들에 대해 종합적으로 생각해 보기 전, 우리는 진언종의 본산이라고 할 수 있는 고야산 입구에서 아주 독특한 사찰 한 군데를 방문했다. 구카이 당시 여성들은 영산(靈山)에 들어갈 수 없었다. 그래서 시코쿠 출신이었던 교조(敎祖) 구카이 스님도 아들을 격려하러 온 어머니를 만나려면 산 아래까지 내려와 뵐 수밖에 없었다. 산 아래라고 하지만 고야산이 해발 1000정도 높이에 되는 곳에 있으므로 구카이 스님은 먼 길을 걸어 내려와야 했다. 지금도 고야산 입구에는 사찰들이 모여 있는 마을 입구까지 오르는 길 180m 마다 이정표 같은 비석을 세워두고 홀로 산을 오를 순례객들이 응원한다. 혼자 순례하는 이가 느꼈을 고요한 산길에서의 두려움과 외로움을 격려하고 응원하는 표지다.
구카이 스님은 산 아래에서 아들을 기다렸을 어머니를 기리기 위해 절을 만들었다. 이름을 지손인(慈尊院)이라 하는데, 입구부터 아름답게 가꾼 꽃들이 절문 앞 계단에 층층히 놓여 있었다. 일주문을 들어서자마자 오른쪽으로는 진언종의 상징인 불탑이 있었다. 그리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희안한 기도 부적들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에는 사람의 눈 두덩이인가 싶었는데 아니었다. 여성의 가슴이었다. 신성한 절에 적나라한 여성의 가슴 부적이 켜켜이 쌓여 있고 종무소에는 베개처럼 크고 푹신한 가슴 조형물까지 걸려 있었다. 그리고 그 밑에서 엄격한 모습의 주지 스님과 부주지 스님이 종무 일을 보시고 계셨다. 부드럽고 둥근 젖가슴들과 네모단정한 두 스님의 모습이 너무 극단적인 대조를 이루어서 아주 그로테스크했다.
가슴이라니? 구카이 당시에는 굶어 죽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이들이 어미의 젖을 잘 먹고 쑥쑥 힘차게 크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부모들이 절을 찾아 기도를 했다. 그러던 것이 물질이 풍부한 현대에는 유방암에 걸린 여성들을 치유하는 의미로도 받아들여져 잘 크고 잘 먹이는 모두의 바램을 이루도록 하는 절이 되었다. 허남린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일본의 사찰들은 대부분 직능화되어 있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성물이 언제 누가 어떤 의미로 만들었는지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기에 각각의 사찰마다 기도하는 포인트에 따라 각기 다른 불상이 모셔져 있으며, 같은 불상이라도 먼저 제작된 것의 효험이 더 뛰어나다고 한다. 나중에 엔랴쿠지에서 14세기 불상을 보고 아주 옛것이라며 감탄을 했는데, 허남린 선생님께서는 14세기면 너무 최근이라 효험이 없다고도 말씀해주셔서 한참을 웃었다. 그런 맥락에서 생각하면 이 고야산은 다른 누구의 어머니도 아니고, 일본 최고의 밀교 스승 어머니의 절이니 정말 영험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고야산을 오르기 전에 꼭 들르게 되는 지손인이고 보면, 고야산은 스스로를 자식으로 되새기면서 올라야 하는 성지라 할 수 있다. 나는 처음에는 엄숙해야 할 사찰에 적나라한 적가슴이 걸려 있어 당황스러웠지만, 점차 많은 젖꼭지를 앞에 두고도 종무에 힘쓰시는 스님들이 누군가의 아들로 보여 안심이 되었다. 왕도 사제도 절간을 쓰는 누군가도 모두 어머니의 자식이다. 그런 우리가 낳아진 존재로서 낳은 자를 향해 축복을 내려달라고 조르며 절을 찾는다. 기도란 무한한 경외와 지극한 자비를 동시에 느끼는 일이다.
3. 무엇이든 낳아야 지모신
다음날은 본격적으로 고야산에 올랐다. 고야산은 진언종의 많은 사찰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우리는 곤고부지(金剛峰寺)라는 핵심 사찰을 방문했다. 이 절은 1582년,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1537~1598)가 어머니의 극랑왕생을 기원하며 기부한 영지 위에 세워졌다. 당시에도 고야산에 여성은 제사나 순례를 위해 입장할 수 없었는데, 죽음 이후에는 남성도 여성도 없고 모두 평등하니까 곤고부지와 같은 절도 만들 수 있었다고 한다. 전국시대, 전란으로 엉망진창이 되어 있었던 고야산이 이 기부를 통해 재건할 수 있었다. 절 내부에는 전국시대 그리고 그 이후에 벌어진 일본의 정치사와 관련된 유물도 많았다.
나는 임진왜란을 일으킨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만든 절 앞에서도 기도를 해야 하는지 잠깐 망설였다. 전쟁을 일으키고 엄청나게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몬 그 아들의 어머니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피비린내 나는 전쟁의 인과를 그 어머니는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마음이 복잡해졌지만, 결국 어머니는 어머니라는 생각에 이르렀다. 내가 어진 어머니의 모진 딸이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옳고 바른 것만 낳지는 않는다. 자연은 선악의 저편에 있다. 그래서 어머니는 갖가지 것을 낳고, 온갖 꼴을 보며, 무한히 기쁘지만 지극히 절망한다. 떄문에 모성이라고 해서, 천진난만한 어린아이 앞에 마냥 웃고 있는 그림만 찾을 수는 없는 것이다.
본래적 신성함, 즉 만물을 낳고 기르고 죽이고 또 낳는 그 원초적 영성은 무한한 것을 무한한 방식으로 낳는다. 비교종교학자이자 신화학자인 미르치아 엘리아데(Mircea Eliade; 1907~1986)는 각 문명권의 초기 종교에서 발견되는 지모신 개념이 인류사에서 서서히 탈각되는 과정에 주목했다(『세계종교사상사』). 인류 최초의 도시라고 할 수 있는 현재 튀르키에 지역의 차탈휘위크(Çatalhöyük)에서는 동물들을 데리고 의자에 앉아 있는 여신상이 나왔다. 그리스 크레타섬의 신전을 꽉 채운 것은 여신들이며 수메르나 고대 이집트에서도 지모신을 모시는 풍습이 있었다. 엘리아데는 양성구유의 신상을 여성성의 관점에서 설명하기도 한다. 고대에는 남성으로 상정된 신조차 몸으로 그 피로 누군가를 잘 낳고 있었다는 것이다.
압도적으로 산과 들, 바다와 정령들을 낳던 지모신이 급격히 인간적 얼굴을 하게 된 때가 고대 그리스 시대다. 오시리스의 시신으로도 임신을 하던 풍요의 이시스는 어디로 갔나? 제우스가 정의를 휘두르게 되면 이제 여신들의 우두머리인 헤라는 자기 가족만 지키고(헤라는 제우스 바람기에만 전전긍긍한다), 아르테미스는 처녀들만 응원하며, 아테네는 남자를 전쟁 동료로 보고, 아프로디테는 그저 정열만 붙들고 사는 모습이 된다. 무자비한 모성은 제우스에 의해 길들여지고, 압도적인 생명력은 순진한 성욕의 차원으로 떨어진다. 고대 지중해에서 어머니는 이제 제 자식만 챙기는 이기심의 화신이 되었다. 그러나 미야자키 하야오도 《라퓨타》(1986)의 도라 할머니나 《벼랑 위의 포뇨》(2008)의 그란만마레를 통해 말하지만, 본디 어머니는 낳았으면 그뿐이라고 생각하는 존재다. 키워줄 만하면 힘을 보태주기도 하지만, 때로는 우주의 거친 생명력을 더 겪도록 가차없이 내몰기도 한다. 어머니는 낳는다. 어떤 결과도 상관하지 않고. 그것이 자연–어머니다.
곤고부지를 생각하면 어떤 아이러니가 느껴진다. 곤고부지가 있는 고야산에는 오쿠노인(高野山 奥之院)이라고 일본에서 가장 사랑받는 공동묘지가 있다. 옛사람들이 영산인 고야산이야말로 저승으로 가는 입구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답사팀도 천천히 성스러운 오쿠노인의 무덤들 사이를 걸었다. 저승으로 가는 길을 꽉 채운 비석들은 이끼에 덮여 독특한 무게감을 나타내고 있었다. 생의 온갖 비애와 무상함을 다 품고 있기에 오쿠노인의 전체적 분위기는 가라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임박한 종말의 공포 같은 것은 없었다. 우리 모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간다. 오쿠노인은 인과의 저편에서 우리 각자가 맛볼 어떤 생의 신비를 알려주는 듯했다.
이 오쿠노인에 임진왜란 때, 일본으로 끌려 온 조선인들의 영복을 비는 비석이 있었다. 어떤 어머니는 전쟁의 화신을 낳았다. 그 아들이 쓸어버린 폐허 위에서 원망과 증오가 태어나고 거기에서 다시 또 감사함과 깨달음이 일어난다. 모든 일에는 끝이 없다. 어머니라는 말의 신성함이 아찔하게 다가왔다.
4. 모두 돌아가리라, 어머니에게로
답사단은 오사카에서 교토로 넘어오는 길에 천리시를 방문했다. 천리시는 천리교(天理教てんりきょう)라고, 19세기 중반 나라현에서 나카야마 미키(中山みき, 1798~1887)라고 하는 한 여성이 문득 천리왕의 계시를 받았다며 창시한 일본의 신흥 종교다. 나카야마 미키는 무학의 여성으로 악질인 남편과 고된 가사 노동으로 엄청나게 고생을 했다. 우리는 나카야마 미키가 살던 집터였다가 현재 천리교 본부 자리로 되어 있는 곳을 방문했다. 하나의 종교가 깨달음에 아무런 뜻이 없던 한 사람의 주부의 통찰력에 의해 제창되고 200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엄청난 기세로 일본 안에서도 독특한 종교 집단으로 세력화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종교는 교주가 바로 ‘핍박 받는’ 어머니다.
현대에 오면 무엇이든 마구 낳고 기르고 다시 흙으로 돌아가게 하는 어머니 대신에 고통을 껴안는 어머니가 등장한다. 천리교가 일본 사회 안에서 갖는 지위라든가, 일본의 다른 종교들과 갖는 역학 관계에 대해서는 전혀 모른다. 하지만 천리교가 그토록 빨리 세를 확장하고, 또 그 안에서 종교가 일상 전반에까지 힘을 미칠 수 있도록 했던 데에는 약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세계의 진실에 대한 통찰이 있어서가 아닐까? 천리교가 세를 확장하게 된 구체적인 이유는 나카야마 미키를 포함해 교단 관계자들이 여러 가지 질병과 애환을 직접적으로 잘 치료해주었기 때문이다. 천리교의 어머니는 자신의 고통을 초월해 중생들의 고통 속으로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고야산의 지손인을 다시 떠올렸다. 어머니는 대상을 가리지 않고 먹이고 기른다. 그리고 최후의 자리로 그를 돌려보낸다. 우린 그런 자연–어머니의 자식이다. 인류의 모든 신성함에 대한 철학 즉 종교는 이런 어머니와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에서 나왔을 것이다. 영성이란 존재가 처한 무지막지한 생의 파노라마를 통찰해야 한다는, 존재의 숙명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