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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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먹는다는 것(4)
잘 싸는 게 잘 먹는 일
주제문 : 나는 먹음으로써 세상과 연결된다.
글의 취지와 의의 : 먹거리의 풍요와 빈곤이 공존하는 지금의 상황이 뭔가 이상하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먹는다는 행위를 뭐라고 생각하고 있는지 살펴보고, 생명의 근간이 되는 먹음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자.
서론 – 다시 생각해보는 먹기
본론 – 내가 먹는 풍경들
생명을 먹는다
내 입으로 들어와서 항문으로 나간다
잘 먹고 잘 싸기
결론 – 이 연결 안에서 먹기–달라진 먹는 풍경
서론
모든 생명은 먹어야 살 수 있다. 인간뿐만 아니라 식물도 마찬가지다. 뭘 먹고 어떻게 먹느냐가 다를 뿐 생명은 먹어야 산다. 먹을 게 넘쳐나는 요즘 세상에 살기 위해 먹는다는 사람을 만나기는 드물겠지만, 먹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는 걸 생각하면 먹는다는 일이 생명에게 얼마나 근원적인 일인지 생각하게 된다. 존재에 있어 이렇게 근원적인 일을 나는, 우리 사회는 어떻게 생각하고 대하고 있을까.
내가 혼자 먹을 때 먹거리를 고르는 기준은 최대한 간편하게이다. 먹거리를 준비하고 먹는 데 걸리는 시간, 노력이 가장 적게 드는 것으로 나는 먹을 것을 고른다. 보통 그 선택지는 라면, 빵, 떡, 과자, 냉동피자, 김밥 등이 된다. 두 아이의 엄마로 내가 먹거리를 고르는 기준은 영양이다. 최대한 필수영양성분이 부족하지 않도록 메뉴를 고르고, 부족하다 싶은 것들은 영양제 등으로 보충한다. 내 가족의 몸에 들어가는 것이니 식재료도 친환경, 유기농 스티커가 붙은 것, 모양이 고르고 벌레 먹지 않은 것 위주로 가능한 고른다. 즐기기 위해 먹을 때는 맛과 분위기가 우선이 된다. 먹어서 기분이 좋아지고 즐거워지는 식당의 음식을 고르는 식이다. 무엇을 먹을지를 결정할 때 내 선택의 기준은 효율, 영양, 맛이었다. 나는 먹는 일을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거나, 내 몸에 필요한 영양소를 주입하는 일, 또는 다채로운 맛의 세계를 탐닉하는 일로 생각하고 있었다.
오늘은 또 뭘 먹을까?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우리는 매일을 이 고민 앞에 선다. 인간이라면 평생에서 가장 많이 하는 고민이 아닐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메뉴를 고를 때는 물론이고 누군가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 경우에도 무엇을 먹어야 하냐는 질문은 꼭 따라붙게 마련이니 말이다. 어렸을 때 엄마 따라 시장을 갈 때면 가장 많이 듣던 말도 오늘은 또 뭘 해먹나였고, 엄마가 된 지금도 나는 마치 숙제처럼 매일을 오늘은 뭘 해먹어야 하나 하고 고민한다. 직장에서 점심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나눴던 질문이 오늘은 또 뭘 먹을까였고, 친구를 만나 꼭 하는 얘기도 뭘 먹으러 갈까이다.
이처럼 삶에서 가장 자주 화제가 되는 먹는 행위는 개별의 신체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먹는다’는 행위를 ‘내’가 ‘나’를 위해 하는 개인적인 차원의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즉 내 입을 즐겁게 하고(맛) 내 배를 불리고(허기) 나를 살찌우는 일(영양)이라고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기술인류학 시간에 함께 읽었던 『전쟁과 농업』(후지하라 다쓰시 지음, 최연희 옮김, 따비)은 경쟁 시스템으로 인한 사회 전반의 문제들을 풀기 위해서는 생명의 근원이 되는 먹는 문제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고 했다. 이 책의 저자 후지하라는 ‘먹는다’를 개인적인 일로 생각하면, 나 말고 다른 것은 못보게 된다고 한다. 그는 ‘먹는다’는 일이 이 세상의 연결 통로로 내가 놓이는 일이며, 작게는 내 몸의 세균을, 크게는 자연 전체를 가꾸는 우주적 차원의 일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내가 먹는 풍경들
커피 한 잔을 내려 텀블러에 담아 서둘러 집을 나선다. 냉동실에 있는 포장된 떡이나 빵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나는 컴퓨터를 켜고 가방에서 커피와 준비해 온 주전부리를 꺼낸다. 왼손에는 떡을 들고 오른손에는 마우스를 쥐고 눈은 모니터를 향한다. 떡을 한 입 베어 물고 입에서 여러 번 씹다가 커피 한 모금을 마셔 넘기기를 반복하며 간단한 업무를 처리한다.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나의 아침 식사다. 단 1분이라도 잠을 사수하기가 목표인 나는 아침을 이렇게 해결하며 시간을 번다.
회사 앞에 오토바이가 멈춰서는 소리가 들리면 벌써 시간이 이렇게나 되었나 싶다. 점심시간마다 오늘은 또 뭘 먹어야 하나는 고민에 매일이 고심이었는데, 사무실 인근에 매일 엄선된 반찬들로 백반을 배달해주는 식당을 발견하고 난 후부터는 메뉴를 고민할 것도 없이 땡! 하면 휴게실에 식사가 차려진다. 반찬이나 국의 종류가 식당의 식자재 사정에 따라 조금씩 변화가 있긴 하지만, 메인 메뉴는 주로 요일별로 고정이 되어 있다. 월요일은 장조림, 화요일은 오징어볶음, 수요일은 닭볶음탕, 목요일은 제육볶음, 금요일은 생선조림이다. 생선을 싫어하는 동료 중 한 명을 일부러 금요일에 외근을 잡았다가 목요일과 금요일의 메뉴가 바뀌는 상황이 생기면 무척이나 억울해한다. 이렇게 사무실 안에서 간편하게 해결하는 식사는 15분이면 모두 끝난다. 그러고 나면 남은 45분은 자유시간이다. 낮잠을 자고, 산책을 하고, 개인적인 일을 보기도, 커피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기도 하면서 그 자유를 즐긴다.
저녁 준비를 위해 집 앞 마트에 들린다. 간편하게 해먹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오늘은 밀린 업무 처리로 하루를 바쁘게 보냈으니 에너지 보충을 위해 잘 손질된 안심을 배부르게 먹을 수 있도록 장바구니에 담는다. 비타민 섭취도 필요하니 같이 구워 먹을 아스파라거스와 버섯, 양파를 사고 파채도 듬뿍 담는다. 국이나 찌개는 조리하는 데 시간이 걸리니 패스하고 여기에 김치만 한 접시 내놓으면 대략 한 끼에 필요한 영양분은 해결될 거 같다. 식사에 들이는 공(功) 대비 가족의 만족도가 가장 높은 메뉴다. 저녁식사를 가족이 다 같이 하는 경우는 드물다. 각자의 스케줄에 따라 저녁식사 시간이 다르고 먹고 싶은 메뉴도 다르다.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엄마인 내가 차려주는 대로 먹었지만, 세상의 온갖 맛집에 입이 길들여진 아이들은 이제 내가 해주는 웬만한 음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그러다보니 이것저것 조리하며 시간을 들이는 일은 옛날이야기가 돼버렸다.
우리 집 식탁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아니 항상 준비되어 있는 식품이 있다. 바로 건강기능식품이다. 일어나자마자 공복에 먹는 유산균, 식사 후에 바로 먹는 종합비타민, 피로회복용으로 먹는 건강보조제, 간에 영양을 주는 비타민 B복합제, 뼈를 튼튼하게 해주는 칼슘제, 위장에 좋은 양배추 추출물 등이다. 가끔 먹는 일이 버거울 때 나는 저런 알약으로 대충 해결할 수 있는 날이 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생명을 먹는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 가고 누린내 나는 축산시장에 가야지만 생선을 사고 고기를 살 수 있을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시장엘 가면 내 눈앞에서 고등어의 머리가 두 동강이 나고 정육점에는 도살된 돼지의 몸이 쫙 벌려진 채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자반고등어는 가시까지 손질되고 심지어는 이미 초벌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나온다. 육고기도 마찬가지다. 마트에 가면 고기는 부위별로 잘 손질이 돼 팩에 그램 수별로 담겨 있고, 아이들의 최애 메뉴 치킨은 주문만 하면 조리된 채로 바로 배달이 된다.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식재료나 먹거리는 상품으로서의 그것이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떠한 모습이었다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내 식탁 위에 올려졌는지를 알기가 어려운 상태로 우리는 먹거리를 만난다.
처음 살아 있는 꽃게를 사서 꽃게탕을 끓였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하고 살이 꽉 찬 꽃게를 골라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게를 솔로 문질러 닦고 게딱지를 뒤집고 다리를 자르면서 나는 연신 게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전에 꽃게탕을 먹고 게장을 먹으며, 그 게가 한때는 바닷속을 유영하던 살아 있는 생명이었음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서 살아 있는 꽃게를 직접 고르고 내 손으로 그 생을 마감시키는 경험은 내 안에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내가 먹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나는 원래도 게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특히 꽃게살과 국물을 더 열심히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다.
농학자 고이즈미의 산골 체험 에세이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고이즈미 다케오 지음, 박현석 옮김)에서 그의 친구 사냥꾼 욧상은 멧돼지를 사냥할 때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게’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잡은 멧돼지기에 대충 먹고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그는 멧돼지의 가죽, 고기, 내장, 뼈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용하며, 자신이 잡은 멧돼지들에게 법명까지 지어 올린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 해체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 다름없는 생명임을, 그리고 그 무게가 자신과 다르지 않기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에는 이처럼 그것이 ‘생명’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그것이 한때는 나처럼 자연의 한 존재로 살아 숨쉬는 것이었으며, 내 식탁 위에 놓여지기 위해 뽑히고 잡히고 죽여졌다는 것을 나의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먹는다. 그렇기에 먹으면서 나는 배부르다, 맛있다 외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겪지 않는다. 『전쟁과 농업』에서 후지하라는 먹거리의 특징으로 ‘비내구성, 자연성, 정신의존성’을 꼽는데, 먹거리란 부패하기가, 쉽고 동식물의 사체이며, 다양한 감정이 개입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먹는 것에서는 그런 특징이 확실히 결여되어 있다.
우리 집 냉동실과 냉장실에는 내용물이 뭔지, 언제 넣어뒀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봉지들과 통들이 가득하다. 아마도 그것들은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더 이상 그곳에 둘 수 없다고 판단될 언젠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 먹을 게 없다며 핸드폰을 열고 장바구니에 뭔가를 담거나 물건을 고르듯이 음식점을 골라 식사를 해결할 것이다.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의 욧상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한때 나와 같은 무게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취급하고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내 입으로 들어와서 항문으로 나간다
『전쟁과 농업』에서 후지하라는 어느 날 산오징어를 먹으며, 과연 그 오징어가 언제 사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그 경험으로부터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일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식도를 거쳐 위, 십이지장, 대장을 거쳐 항문으로 나온다. 이렇게 보면 먹는 일은 내 입안으로 들어가는 데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그는 먹는다는 행위를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가 소화기관을 통과해서 항문으로 배설되는 과정의 일로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게 내 몸으로 먹거리를 들여 넣는 일이 아니라, 먹거리가 내 몸을 통과해서 항문 밖으로 나가는 일로 보자고 말이다.
나의 배설물은 하수관을 통해 정화조와 같은 처리를 해서 자연으로 흘러간다. 그것을 먹고 자란 벌레나 미생물이 식물과 동물의 먹이가 되고, 그 생명들은 다시 내 식탁 위에 놓이게 된다. 내가 싼 오줌과 똥이 언젠가 내가 다시 먹을 음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모습이지만 자연의 일부로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 또한 다른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자연 안에 나 아닌 것이 없고 내 안에 자연이 아닌 것이 없다. 외부로부터 경계를 치고 있던 나를 뚫려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자, 협소하고 갇혀 있던 내가 광대하고 풍요로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일이 나를 살리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생명들을 연결하는 일이 된다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이때 내 몸은 위아래가 뚫려 있어 매일 외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고, 내 몸을 통과한 것들을 자연으로 배출하며 바깥과 끊임없이 교류하게 된다. 생태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외부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먹는다는 걸 외부와의 연결로 보게 되면 ‘나’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일까? 나를 ‘내’ 신체로 끊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잘 먹고 잘 싸기
먹는다는 것을 내 몸에 먹거리를 집어넣는 것이 아닌, 먹거리가 내 몸을 통과하는 일로 생각하면, 여기에는 책임도 따르게 된다. 내 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의 생명이 내 몸을 통과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간다. 내 몸을 통해 다른 것과 연결되는 것이다. 많은 생명들이 이런 식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먹거리가 통과하는 내 몸의 관에 문제가 생기게 되면 그것이 생태계, 자연의 문제로까지 확장될 수가 있다. 평생 장염을 앓아본 적이 손에 꼽히는 나는 몇 년 전 베트남 여행에서 장염을 앓은 이후로 그 횟수가 늘었다. 얇게 편 밀가루 반죽에 바나나, 딸기와 같은 토핑을 넣어 구워주는 ‘로띠’라는 길거리 음식을 먹고 탈이 났는데도, 그 맛의 유혹을 못이기고 계속해서 먹어서 생긴 참사였다. 나는 이때 이후로 생굴이나 회와 같은 날음식을 먹으면 장에서 요동을 치며 반응이 온다. 내 입의 쾌락만 생각하다가 먹거리가 이동하는 관이 손상된 것이다. 건강하지 못한 관을 통과해 나온 배설물이 자연의 생명에 좋을 리가 없다. 이런 일도 내 몸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생태계에까지 이어져 내가 먹게 될 상추가 배추와 같은 식품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니, 정말 잘 먹고 잘 싸고 볼 일이다.
또한 나만 잘 먹는다고 될 일이 아니다. 나의 먹음뿐만 아니라 내 옆 사람의 먹음도 내게 중요하게 된다. 그가 먹고 싼 것 또한 내 식탁에 올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후지하라는 잘 먹는 일을 이런 차원에서 생각해봐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먹는다는 게 내 몸에 들어오는 것에서 끝나지 않기에 나가는 것까지 고려해서 생각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 내 몸으로 들어온 것이 나를 통과해 다른 것들과 연결되니까 말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다는 측면에서 우리는 잘 먹고 잘 싸는 일을 생각해야 한다. 후지하라가 이 시스템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을 잘 먹는 일로부터 생각해보자고 하는 데는 이러한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결론–이 연결 안에서 먹기–달라진 먹는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