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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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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먹는다는 것(5)

작성자
진진
작성일
2024-12-02 23:14
조회
58

 

먹음으로서 연결되기

 

주제문 : 나는 먹음으로써 세상과 연결된다.

글의 취지와 의의 : 맛있게 먹고 배부르게 먹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먹는 현장이 위태로워 보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후지하라 다쓰시의 먹는다의 재정의를 통해 먹는다는 행위를 살펴보고, 어떻게 먹을 것인지 생각해보자

 

서론 다시 생각해보는 먹기

본론 먹는다의 정의

생명을 먹는다

연결로서의 요리하기

연결로서의 먹기

결론 달라진 나의 범위

 

바쁘다 바빠

커피 한 잔을 내려 텀블러에 담아 서둘러 집을 나선다. 냉동실에 있는 포장된 떡이나 빵을 챙기는 것도 잊지 않는다. 회사에 도착해 자리에 앉은 나는 컴퓨터를 켜고 가방에서 커피와 준비해 온 주전부리를 꺼낸다. 왼손에는 떡을 들고 오른손에는 마우스를 쥐고 눈은 모니터를 향한다. 떡을 한 입 베어 물고 입에서 여러 번 씹다가 커피 한 모금을 마셔 넘기기를 반복하며 간단한 업무를 처리한다. 눈치 채셨는지 모르겠지만, 이게 나의 아침 식사다. 1분이라도 잠을 사수하기가 목표인 나는 아침을 이렇게 해결하며 시간을 번다.

한승태의 노동에세이 어떤 동사의 멸종‘3부 요리하다에는 뷔페 식당의 관리자 조윤진 씨가 주방 구석에서 고추장에 비빈 밥을 콜라와 함께 꾸역꾸역 목구멍 속으로 집어넣는 장면이 나온다. 없는 것 빼고는 다 있을 법한 뷔페 식당에서 고추장밥이라니, 바쁜 업무에 그마저도 몇 숟가락 뜨지도 못하고 그릇에는 키친타올이 올려져 있다. 그는 주방을 생각하면 마감 청소를 마칠 때까지 그대로 있던 시뻘건 그 밥그릇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고 했다. 음식이 널려 있고 먹고 싶은 음식을 담기만 하면 되는 시간까지도 아껴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극한에 내몰린 모습이라고 할지 모르겠지만,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우리는 먹는 일을 빨리 처리해야 하는 일로 생각한다.

먹는 일뿐만이 아니다. 인생의 많은 일들이 미션을 수행하듯이 하나를 끝내면 또 하나가 밀려오는 식이다. 뭐 대단한 부귀영화를 누리고자 하는 것도 아닌데 해야 할 일은 넘쳐나고 시간은 없다. 남들에게 뒤처지지 않고 인정받기 위해서는 일의 중요도와 우선순위를 따져서 착착 해내야만 한다. 그 일의 목록들 앞에서 먹는 일은 뒷전이 되고 만다. 먹거리와 농업을 통해 사회 시스템의 문제를 살펴보는 전쟁과 농업의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이러한 경쟁 원리가 가장 잘 반영되는 곳이 먹거리 체계이고 우리의 먹는 행위라고 한다. 먹는다는 일은 먹지 않고 사는 사람은 없을 만큼 근원적이고 매일 반복하는 일인 만큼 몸에 배기 쉽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시스템이 가진 문제의 탈출구로 먹는 일을 근본적으로 다시 생각해보자고 한다.

전쟁과 농업에서 후지하라는 먹는다는 행위를 음식이 인간이라는 관을 통과하는 일로 정의한다. 이렇게만 보면 뭔가 주객이 전도된 느낌이다. 내가 빵을 먹고 커피를 마시는 일이 아니라 빵과 커피가 내 입, 식도, , 소장, 대장을 통과해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일이라는 것이다. 먹는 게 내 신체에 뭔가를 넣는 일이 아니라 들어왔다가 나가는 일이라고? 실제로 먹는 일은 들여 넣기만 하지 않는다. 그랬다간 사실 큰일이 난다. 흔히 내 몸에 양분이 되고 남은 찌꺼기라고 하는 똥과 오줌이 밖으로 나가야만 나는 살 수 있다. 며칠이라도 배설이 안 돼 몸에 독소가 쌓이면 사람은 혼수상태에 빠진다. 가족 중에 그런 경우를 봤기에 나는 잘 알고 있다.

간편하게 사먹고 쫓기듯이 먹는 일을 해치우거나 자극적인 맛을 탐닉하며 먹거리를 찾아다니고, 건강보조제로 영양을 보충하는 식으로 나는 먹거리를 해결한다. 반복되는 그런 먹음 속에서 나는 종종 내가 먹는 일을 즐기지 못하고 단지 소비하고 있으며, 내 먹음이 세상과 단절되어 있다고 느낀다. 나뿐만 아니라 아이들이 먹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런 위태로움을 느끼는데, 정작 그들은 아무렇지도 않은 게 더 불안해진다. 식사를 좀 더 느긋하게 즐기기 위해서라도, 여기에 더해 내 몸에 그런 습성이 좀 배게 하기 위해서라도 후지하라의 먹는다를 자세히 들여다 봐야 겠다.

 

먹는다

내가 생각하는 먹는다는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지극히 개인적인 일이다. 혀에 느껴지는 촉감과 미각의 조합으로 맛을 느끼고 허기진 배를 채우고 내 신체의 각 부분에 영양을 주입하는 일이다. 내가 느끼는 맛은 다른 사람과 공유할 수 없고 맛의 느낌은 누군가와 공유할 수도 없다. 내 안에 뭔가를 집어넣으면 먹는 행위는 끝난다. 그래서 내가 먹거리를 고를 때 고려하는 점은 그것이 내 몸에 들어가서 맛, 배부름, 영양에 있어 어떤 영향을 주는지 만이다. 맛이 있고 적당히 포만감이 있어야 하며 내 몸에 해가 되지 않거나 건강에 좋아야 한다.

전쟁과 농업에서 후지하라는 어느 날 산오징어를 먹으며, 과연 그 오징어가 언제 사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그 경험으로부터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일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먹는다는 것범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앞에서 이야기했듯이 그는 먹는다는 행위를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가 소화기관을 통과해서 항문으로 배설되는 과정의 일로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게 내 몸으로 먹거리를 들여 넣는 일이 아니라, 먹거리가 내 몸을 통과해서 항문 밖으로 나가는 일로 보자고 말이다.

나의 배설물은 하수관을 통해 정화조와 같은 처리를 해서 자연으로 흘러간다. 그것을 먹고 자란 벌레나 미생물이 식물과 동물의 먹이가 되고, 그 생명들은 다시 내 식탁 위에 놓이게 된다. 내가 싼 오줌과 똥이 언젠가 내가 다시 먹을 음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나는 다른 모습이지만 자연의 일부로 이미 존재하고 있고,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 또한 다른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자연 안에 나 아닌 것이 없고 내 안에 자연이 아닌 것이 없다. 외부로부터 경계를 치고 있던 나를 뚫려 있는 존재로 생각하게 되자, 협소하고 갇혀 있던 내가 광대하고 풍요로워진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먹는 일이 나를 살리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생명들을 연결하는 일이 된다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이때 내 몸은 위아래가 뚫려 있어 매일 외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고, 내 몸을 통과한 것들을 자연으로 배출하며 바깥과 끊임없이 교류하게 된다. 생태계의 영향을 받기도 하고 주기도 하며 외부와 항상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먹는다는 걸 외부와의 연결로 보게 되면 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일까? 나를 신체로 끊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생명을 먹는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 가고 누린내 나는 축산시장에 가야지만 생선을 사고 고기를 살 수 있을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시장엘 가면 내 눈앞에서 고등어의 머리가 두 동강이 나고 정육점에는 도살된 돼지의 몸이 쫙 벌려진 채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자반고등어는 가시까지 손질되고 심지어는 이미 초벌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나온다. 육고기도 마찬가지다. 마트에 가면 고기는 부위별로 잘 손질이 돼 팩에 그램 수별로 담겨 있고, 아이들의 최애 메뉴 치킨은 주문만 하면 조리된 채로 바로 배달이 된다. 이처럼 우리가 만나는 식재료나 먹거리는 상품으로서의 그것이다. 어디로부터 왔는지, 어떠한 모습이었다가 어떤 과정을 거쳐서 내 식탁 위에 올려졌는지를 알기가 어려운 상태로 우리는 먹거리를 만난다.

처음 살아 있는 꽃게를 사서 꽃게탕을 끓였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하고 살이 꽉 찬 꽃게를 골라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게를 솔로 문질러 닦고 게딱지를 뒤집고 다리를 자르면서 나는 연신 게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전에 꽃게탕을 먹고 게장을 먹으며, 그 게가 한때는 바닷속을 유영하던 살아 있는 생명이었음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서 살아 있는 꽃게를 직접 고르고 내 손으로 그 생을 마감시키는 경험은 내 안에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내가 먹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나는 원래도 게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특히 꽃게살과 국물을 더 열심히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다.

농학자 고이즈미의 산골 체험 에세이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고이즈미 다케오 지음, 박현석 옮김)에서 그의 친구 사냥꾼 욧상은 멧돼지를 사냥할 때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게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잡은 멧돼지기에 대충 먹고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그는 멧돼지의 가죽, 고기, 내장, 뼈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용하며, 자신이 잡은 멧돼지들에게 법명까지 지어 올린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 해체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 다름없는 생명임을, 그리고 그 무게가 자신과 다르지 않기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에는 이처럼 그것이 생명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그것이 한때는 나처럼 자연의 한 존재로 살아 숨쉬는 것이었으며, 내 식탁 위에 놓여지기 위해 뽑히고 잡히고 죽여졌다는 것을 나의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먹는다. 그렇기에 먹으면서 나는 배부르다, 맛있다 외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겪지 않는다. 전쟁과 농업에서 후지하라는 먹거리의 특징으로 비내구성, 자연성, 정신의존성을 꼽는데, 먹거리란 부패하기가, 쉽고 동식물의 사체이며, 다양한 감정이 개입되기 쉽다는 것이다. 내가 먹는 것에서는 그런 특징이 확실히 결여되어 있다.

우리 집 냉동실과 냉장실에는 내용물이 뭔지, 언제 넣어뒀는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봉지들과 통들이 가득하다. 아마도 그것들은 한쪽 구석에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더 이상 그곳에 둘 수 없다고 판단될 언젠가 음식물 쓰레기통으로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집에 먹을 게 없다며 핸드폰을 열고 장바구니에 뭔가를 담거나 물건을 고르듯이 음식점을 골라 식사를 해결할 것이다.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의 욧상이었다면 과연 그럴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냉장고 안의 음식들이 한때 나와 같은 무게의 생명이었다는 것을 생각한다면 그렇게 함부로 취급하고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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