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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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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수정)

작성자
보나
작성일
2024-12-06 23:00
조회
100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

 

우리는 자신의 잇속을 따지지 않고 행동하며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가르침을 받는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관이 반영된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이러한 고민이 무색하게도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는 여타 권선징악을 논하는 동화와는 사뭇 다르다. 자신의 기준에 따라 쓸모를 재단하고 쓸모가 없으면 배제 시키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상식은 숲속 세계에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저자는 우리에게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이전에 선악을 가르는 자신의 잣대와 그 잣대의 기반이 되는 사고체계를 검토해 보기를 제안한다. 다름을 이유로 이웃의 조롱을 받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 미야자와 겐지의 숲속 세계를 좀 더 살펴보자.

사화산(死火山) 기슭의 들판에 베고라는 별명을 가진 둥근 모양의 크고 검은 화산탄이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다. 베고는 소가 움직이지 않을 때 소가 돌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쓸모없다는 의미에서 주변의 모난 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모난 돌들과 베고는 모두 화산에서 분화했을 때 떨어졌는데, 모난 돌들에 비해 베고만 둥글둥글했기 때문이다. 사화산의 모난 돌들과 주변의 떡갈나무, 여랑화, 작은 모기와 베고 위에서 자란 이끼는 모두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베고의 모습과 크기, 쓸모없음을 조롱했지만 베고는 화를 내지 않는다.

반전은 도쿄 제국대학의 지질학자들이 사화산 들판에서 베고를 발견했을 때 일어난다. 작은 이끼에게 놀림을 당하던 베고는 지질학자들에게는 화산이 분화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완벽한 화산탄의 표본이었다. 화산탄 위에 살면서 베고를 천년만년 변하지 않을 검댕이라고 놀리던 작은 이끼들은 화산탄 표본에는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베고에서 떼어지게 된다. 미야자와 겐지는 이를 통해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숲속 세계에도 그들의 윤리가 존재함을 보여준다. 베고를 발판 삼아 자랐지만, 그 고마움을 모르던 이끼는 지질학자의 등장과 함께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사태에서 우리는 자신을 성장시켜 주는 존재의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교훈을 얻는다. 또한 편협한 관점으로 상대를 놀리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길 수 있다든지, 베고의 입을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굴하지 말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모색해보라는 가르침을 준다.

그런데 이야기를 읽으면서 고개가 갸웃해지는 지점이 있었다. 하나는 베고가 쓸모없다고 놀림을 받던 들판이 화산탄의 완벽한 표본으로 인정해주는 연구실보다 밝고 즐거운 곳이라고 말하는 부분이다. 다른 하나는 베고가 들판의 친구들과 헤어질 때 어려운 상황에서도 모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만 한다고 말했지만, 정작 베고가 한 일이 떠오르지 않았다는 점이다. 첫 번째 의문은 화산탄에 붙은 이끼를 떼어버리는 지질학자의 태도를 통해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었다. 도쿄제국대학의 연구실은 베고가 사는 숲속 세계와는 달리 쓸모의 여부에 따라 가치를 매기고, 가치가 없다면 그 존재를 제거하는 무정한 곳이다. 베고는 지질학자의 태도를 통해 완벽한 표본인 자신도 연구실에서 쓸모를 다하면 바로 버려질 것을 예견했다. 완벽한 화산탄으로 쓸모를 인정받는 기쁨도 잠시, 베고는 쓸모없으면 버려지는 무정한 연구실로 옮겨지는 곤란한 상황에 처했다. 베고는 연구실에서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연구실에서 베고를 상상해본다. 베고는 연구실에서 자신이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며 슬퍼하고만 있을까? 사화산에서의 베고는 모기가 말한 것처럼 두더지처럼 땅을 파서 공기를 신선하게 해주지도 않고, 풀잎처럼 이슬을 반짝여서 모기의 눈병을 낫게 하지 못한다. 그럼, 사화산에서 베고가 한 일은 무얼까? 사화산 들판의 베고는 자신보다 작았던 새싹이 헌 잎을 버리고 새잎을 피우며 자라기를 반복해 베고보다 다섯 배는 커진 떡갈나무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매년 눈이 내리는 겨울이 오면 베고는 하얀 왕관을 뽐낼 수 있지만, 황금 왕관을 쓴 것처럼 고운 자태를 뽐내는 여랑화는 꽃이 져서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베고는 사화산의 들판에서 오랫동안 하늘과 바람, 달과 별을 관찰하며 자연의 모든 것이 쉼 없이 모습을 달리하며 살아가는 것처럼 좋고 나쁜 입장이 언제든 변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또한 친구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좋고 나쁨의 구별은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았다. 마음씨가 고와 화를 내지 않는 베고는 친구들의 놀림에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친구들이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할 만큼 통찰력이 깊고 너그러웠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숲속 세계에서 만물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능력에 따라 다채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자신과 다르다는 것은 일상의 지루함에 놀림의 대상이 될지언정 쓸모없음을 이유로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린다는 사고가 부재한다. 동물, 식물은 물론이고 돌멩이, 전봇대, 기찻길의 신호기와 산도깨비까지 모두가 다양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살아가는 숲속 세계의 이야기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상식이 어느 시대, 누구에게 통용되는 상식이냐고 묻는다. 베고는 연구실에서도 숲속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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