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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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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상상으로 가벼워지는 현실(3)

작성자
오월연두
작성일
2024-12-08 09:58
조회
44

상상으로 가벼워지는 현실

 

미야자와 겐지는 25살부터 5년 동안 하나마키 농업학교의 교사였다고 한다. 그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이하토브농업학교의 봄>의 이야기를 구성했을 수도 있었을 것 같다. 농업학교의 봄은 분뇨를 보리에 뿌리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뇨통을 지게에 매달아 두 명이 짝을 지어 보리 밭으로 옮기는 일을 상상해보면 너무 냄새가 나고 더럽다는 생각이 들어서 나라면 도저히 못 할 것 같다. 그런데 이 학교 학생들은 이 일을 경쾌한 노래를 부르며 즐겁게 한다. 하늘도 파랗고 구름도 빛나며 나무도 햇빛에 반사되어 반짝거린다. 달갑지 않은 분뇨를 옮기고 뿌리는 고단한 일이 밝고 빛나고 기분이 좋은 분위기와 잘 버무려져 왠지 가볍게 느껴진다.

무거운 현실을 가볍게 만드는데 상상만 한 게 없다. 이하토브 농업학교 선생님과 학생들은 그들이 놀러 가는 기타가미 강의 기슭을 이기리스(영국) 해안으로 부른다. 그들이 강기슭을 영국의 해안으로 부르는 데에는 간절한 마음이 있다. 다른 학교들은 이시노마키 근처의 해안으로 여행을 가고 인근 여학교는 임해학교를 시작하지만 이하보트 농업학교는 그럴 수 없다. 이기리스 해안으로 산책을 나오기 직전까지도 보리 운반을 하고 농장일도 해야 할만큼 바쁘기에 잠시 짬을 내야 강에 갈 수 있다. 그렇지만 그들은 학교 근처에 있는 하얀 이암층으로 만들어진 기타카미 강변을 하얀 절벽으로 유명한 영국의 도버 해안으로 상상하며 이기리스(영국의 일본식 발음) 해안으로 이름 붙인다. 분뇨도 뿌리고 보리도 옮기는, 해야 할 일이 끊임없는 농사에서 벗어나 아름다운 해안에서 보낸다고 상상해보자. 그것도 일본이 선망하는 영국에 있는 해안에서 말이다. 현실의 고단함은 사르르 녹아 가벼워지지 않을까.

학생들에게 이곳은 여러 가지 이유로 이기리스 해안일 수밖에 없다.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신생대 제 3기 즈음에는 바다 둔치였던 적이 있었고, 이암은 점토와 화산재가 섞인 것이라 물속에 잠겨있었던 점이 명확했다. 기타카미 산지 부근의 붉은 자갈에서 바닷물에서만 사는 굴 같은 조개 껍질 화석이 나왔다는 점을 고인 물이 짠물이었던 증거로 삼는다. 강물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밀려간다는 것도 해안이 되는 근거가 된다. 지금은 강이지만, 몇 천 년 전에는 바다였다는 추측은 그들의 눈에 강변을 해안으로 보이게 한다.

학생들과 선생님은 이기리스 해안에서 과거에 살던 동물의 발자국으로 추측되는 흔적도 발견한다. 이기리스 해안에는 훈련을 위해 기병대도 오고, 강에서 수영하는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주는 구조 요원도 있다. 그런데 선생님은 이기리스 해안에서 수영을 하고 기병대를 목격하고 동물의 발굽을 발견하고 그 발자국을 채취한 일이 어제의 일이라고 한다.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는지 상상 속의 일이었는지 헷갈린다.

선생님과 학생들은 실제 이기리스 해안에 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선생님과 학생들에게 현실에서 해야 할 일은 보리타작이다. <어느 농업학교 학생의 일기>에 나오는 농업학교 학생처럼 잠시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다. 지난 2년 동안 동네가 극심한 가뭄을 겪어 농작물 소출이 적어 집과 마을 전체의 분위기가 침울하기 때문이다. 농업학교 학생은 학교에서 배운 측량과 비료 사용법을 활용하여 자기 집과 마을에 생기를 돌게 할 것이라 다짐한다. 수학여행을 갈 때도 더 많이 배워 집과 마을의 농사에 도움이 되겠다는 생각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아무리 애써서 배워도, 배운 것을 현실에 적용하려 하더라도 계속된 가뭄과 폭우에 하늘만 쳐다볼 뿐, 할 수 있는 일이 없다. 앞이 보이지 않는 현실과 깊은 절망 속에서도 일상을 살아내는 힘은 눈앞의 풍경을 보고 이를 이기리스 해안으로 상상하는 여유에서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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