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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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먹는다는 것
먹는다는 것
주제문 : 나는 먹음으로써 세상과 연결된다.
글의 취지와 의의 : 맛있게 먹고 배부르게 먹고 몸에 좋은 것을 먹고, 먹는 현장이 위태로워 보인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후지하라 다쓰시의 먹는다의 재정의를 통해 먹는다는 행위를 살펴보고, 어떻게 먹을 것인지 생각해보자
서론 – 다시 생각해보는 먹기
본론 –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
생명이 제거된 먹거리
썩지 않는 먹거리
의미가 사라진 먹거리
결론 – 달라진 먹는 모습
생명은 먹어야 살 수 있다. 뭘 어떻게 먹는지가 다를 뿐, 식물이든 동물이든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모두 먹어야 살 수 있다. 먹지 않고는 생명을 이어갈 수 없듯이 먹는 일은 살아가는 데 가장 기본이 되는 일이자 꼭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인 우리도 매일 무언가를 먹는다. 그것도 다양한 것들을 다양한 방법으로 먹기 위해 궁리한다. 육해공(陸海空) 어디든 먹을 것을 찾아 나서고, 굽고 찌고 튀기고 볶는 등의 조리기술도 각양각색이다. 생명으로서, 인류 역사적으로도 먹는 일이 이렇게나 중요한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먹는 모습은 그 기본과 필요, 모색에서 빗겨나 이상한 데로 넘어가 있다. 넘쳐나는 먹거리의 풍요 때문인지 먹는 일에 대한 가치는 헐값이 돼버렸고, 먹는 양만 늘어났지 그 안의 그 깊이는 온데간데없다. 잔뜩 쌓아놓고 누가 많이 먹나 내기하듯이 먹는 방송이나 먹지도 않고 내버려지는 음식물쓰레기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준다.
‘먹는다’는 내가 나를 위해 하는 일이다. 내 입의 쾌락과 내 배의 부름, 내 몸의 건강을 위한 일이고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로 이 감각을 누군가 나눈다는 것은 어렵다. 내 몸에 양분을 넣는 일인 만큼 나는 먹는 일이 어떤 일보다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내 몸의 입장에서 잘 먹으려고 애써 왔다. 그런데 어느 날 나는 내가 먹는 게 중요하다고 하면서, 먹거리를 대하는 태도는 그것과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먹는다는 행위와 먹거리는 떨어질 수 없는 것인데, 어떻게 이 둘에 대한 태도가 다를 수 있는 것일까. 나는 먹는 일에서 분명 뭔가 잘못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때부터 나는 얽혀 있는 이 고리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알 수 없는 답답한 마음으로 먹거리를 마주하게 됐다. 보통은 그 목 메이는 마음도 잊고 음식들을 내 입속으로 잘도 들여 넣었지만, 냉장고와 찬장에 쌓여가는 음식들과 먹다 남겨지고 때를 놓쳐 버려지는 음식들을 볼 때마다 다시금 불편함이 올라왔다.
인간에게, 생명에게 정말 중요한 먹거리가 어쩌다 이렇게 마구 담겨져 구석에 처박히는 신세가 돼버렸을까. 어디서부터 뭐가 잘못 됐을까. 이런 문제를 품고 답을 알지 못한 채 나는 이 글을 시작했고, 글을 쓰고 고치며 그 정답을 어렴풋이나마 알게 되었다. 나는 먹거리를 상품으로 보고 있었다. 마치 물건을 고르듯이 장을 보고 식당을 골랐고, 먹을 때도 내 몸으로 들어간다는 것만 달랐지 먹거리는 여느 상품과 다르지 않게 나를 만족시켜주기만 하면 되었다. 먹는다는 행위와 먹거리를 재정의하며 현대의 먹는 현장을 문제 삼는 『전쟁과 농업』은 내가 보지 못했던 고리를 볼 수 있게 해주었다. 이 책의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가 말하는 ‘먹는다’와 ‘먹거리’의 정의를 따라가면 먹는다는 행위는 우주의 차원으로 확장이 되고 내가 먹는 것은 먹거리가 아니게 되는 값지고도 난감한 상황이 펼쳐질 것이다.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
후지하라는 어느 날 산오징어를 먹으며, 과연 그 오징어가 언제 사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그 경험으로부터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일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먹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먹는다는 것’ 범위를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그는 먹는다는 행위를 음식물이 입으로 들어가 소화기관을 통과해서 항문으로 배설되는 과정의 일로 생각해보자고 한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게 내 몸으로 먹거리를 들여 넣는 일이 아니라, 먹거리가 내 몸을 통과해서 항문 밖으로 나가는 일이 된다.
기껏해야 위 정도까지는 고개가 끄덕여지는데, 십이지장 소장 대장 항문을 거쳐 변이 되어 바깥으로 나오는 일까지 먹는 일로 보자니 그는 먹는 행위를 왜 이렇게까지 확장하는 걸까? 책에서 이에 대해 밝히고 있지는 않지만, 나는 그 이유를 그가 먹거리체계를 비판하는 데서 생각해보려고 한다. 지금의 먹거리체계에서 식품회사는 사람들이 구입만 해주면 그만이다. 그게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든 말든, 들어간 후에 어떤 피해가 오든 식품회사는 관심이 없다. 지금의 먹거리시스템은 식품 판매에만 혈안이 되어 맹렬히 내달리게 한다. 그는 이 책의 머리말에서 시스템은 한 번 작동하면 멈추기도 어렵고 그 안에서는 시스템의 문제를 인식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그는 이런 시스템의 문제를 먹는 행위를 확장시키는 데서 풀어보려고 하는 것이다.
먹는다는 행위를 내 몸에서 끝나는 일이 아닌 바깥으로 나오는 일로 생각하게 되면, 끊어졌던 먹음의 현장이 연결하는 일이 된다. 내가 먹은 것은 나를 불리는 일에서 끝나버리지 않고 똥오줌이 되어 세상으로 나와 자연의 자양분이 된다. 또 그것을 먹고 자란 자연의 생명체들은 언젠가 또 다른 생명의 먹이나 나의 먹거리가 된다. 돌고 도는 연결고리 속에 일부분으로 내 몸의 관들이 자연의 생명들을 연결시켜준다. 먹는다는 일은 이렇게 중단이 없이 생명과 생명을, 생태계 전체를 연결시켜주며 자연에 먹거리를 제공한다. 내가 이것저것 골고루 잘 연결시켜줘야, 다르게 말해 내가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골고루 잘 먹어야 자연도 풍성한 밥상을 받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 식사란 나를 먹이는 일이기도 하지만 자연의 생명들을 먹이기도 하다. 내가 먹는 식사가 이런 의미였다니 바쁜 일정에 편의점에서 삼각김밥 하나로 초라하게 끼니를 때우더라도 값진 시간이 되고 나의 배부름만이 아닌 자연의 먹음까지 생각하니 먹는 시간이 참 깊이 있어진다. 뭘 먹을까 고민 앞에서는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이 먹을 건데 하는 장엄한 마음으로 먹거리를 고르게 되니 한 번 더 생각하고 고민하게 된다. 혼자 먹을 때도 혼자 먹는 것이 아니니 덜 외롭고 조금 더 먹는 것에 신경 쓰게 되지 않을까. 내가 먹는 것이 자연의 먹거리가 된다니 나는 무엇을 먹어야 잘 먹는 걸까 하는 질문이 뒤따라온다. 여기에서 나는 후지하라가 말하는 먹거리의 특징을 통해 그 답을 찾아가 본다.
생명이 제거된 먹거리
『전쟁과 농업』에서 그는 먹거리의 특징으로 ‘자연성, 비내구성, 정신의존성’을 든다. 먹거리란 동식물의 사체 덩어리로, 부패하기 쉽고, 신앙심이나 가족애 등 다양한 감정이 개입되기 쉬운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먹거리가 이런 특징을 잃고 단순한 ‘물건’이 되었다며 안타까워 한다. 그가 먹거리를 이렇게 정의하는 데는 이 상품으로서의 먹거리를 비판하는 지점과 연결되어 있다. 우리가 먹는 것들은 한때 자연의 생명이었다는 감각이 제거되어 단순한 상품으로 둔갑했고, 멀리 많은 사람들이 소비할 수 있도록 유통되기에 잘 썩지 않도록 가공되고, 종교나 가족 등 공동체에 의한 규제로부터 먹거리의 선택은 자유로워졌다.
비린내 나는 어시장에 가고 누린내 나는 축산시장에 가야지만 생선을 사고 고기를 살 수 있을 때가 있었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나섰던 시장엘 가면 내 눈앞에서 고등어의 머리가 두 동강이 나고 정육점에는 도살된 돼지의 몸이 쫙 벌려진 채로 걸려 있었다. 지금은 어떤가. 자반고등어는 가시까지 손질되고 심지어는 이미 초벌이 되어 전자레인지에 돌리기만 하면 먹을 수 있게 나온다. 육고기도 마찬가지다. 마트에 가면 고기는 부위별로 잘 손질이 돼 팩에 그램 수별로 담겨 있고, 아이들의 최애 메뉴 치킨은 주문만 하면 조리된 채로 바로 배달이 된다. 이처럼 내가 일상적으로 먹는 것들에는 그것이 ‘생명’이라는 감각이 거의 없다. 그것이 한때는 나처럼 자연의 한 존재로 살아 숨쉬는 것이었으며, 내 식탁 위에 놓여지기 위해 뽑히고 잡히고 죽여졌다는 것을 나의 거의 생각하지 못하고 그것들을 먹는다. 그렇기에 먹으면서 나는 배부르다, 맛있다 외에는 어떤 감정의 동요도 겪지 않는다.
처음 살아 있는 꽃게를 사서 꽃게탕을 끓였던 때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수산시장에 가서 싱싱하고 살이 꽉 찬 꽃게를 골라 와서 고무장갑을 끼고 조심조심 게를 솔로 문질러 닦고 게딱지를 뒤집고 다리를 자르면서 나는 연신 게한테 미안하다고 말했었다. 물론 그전에 꽃게탕을 먹고 게장을 먹으며, 그 게가 한때는 바닷속을 유영하던 살아 있는 생명이었음을 몰랐던 건 아니다. 하지만 시장에서 가서 살아 있는 꽃게를 직접 고르고 내 손으로 그 생을 마감시키는 경험은 내 안에 이전과는 다른 감정을 일으켰다. 내가 먹기 위해서 네가 죽어야 하는 것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에, 나는 원래도 게를 좋아하지만 그날은 특히 꽃게살과 국물을 더 열심히 맛있게, 남김없이 먹었다.
농학자 고이즈미의 산골 체험 에세이 『사냥꾼의 고기는 썩지 않는다』(고이즈미 다케오 지음, 박현석 옮김)에서 그의 친구 사냥꾼 욧상은 멧돼지를 사냥할 때마다 ‘미안하다, 용서해주게’라고 말한다. 그런 마음으로 잡은 멧돼지기에 대충 먹고 함부로 버릴 수가 없다. 그는 멧돼지의 가죽, 고기, 내장, 뼈까지 하나도 버리지 않고 이용하며, 자신이 잡은 멧돼지들에게 법명까지 지어 올린다. 자신의 손으로 직접 잡아 해체하면서도 그것이 자신과 다름없는 생명임을, 그리고 그 무게가 자신과 다르지 않기에 얼마나 귀한 것인지를 마음에 새기고 있었던 것이다.
썩지 않는 먹거리
“여보, 유산균이 다 떨어졌어. 유산균 좀 시켜줘. 비타민도 얼마 없으니까 같이 주문해줘.” “엄마, 저 근육 키우게 단백질 쉐이크 좀 사다주세요.” 우리 집 식탁 한편에는 플라스틱 통에 든 각종 식품들이 놓여져 있다. 종합비타민제, 비타민C, 유산균, 칼슘제, 단백질 쉐이크, 콜라겐, 양배추환, 홍삼 추출물 등. 음식 섭취만으로는 부족할 수 있는 영양소들을 보충하기 위한 각종 건강보조‘식품들’이다. 인류역사상 이렇게 잘 먹고 과식하는 시대에 굳이 영양제까지 먹어야 하냐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지금의 토양과 먹거리에는 과거와 달리 영양소 함량이 적어서 보충해줘야 한다는 게 건강식품회사의 논리다.
의미가 사라진 먹거리
정월대보름에 나물밥과 부럼을 먹는 의례, 동지에 팥죽을 먹고 생일에 미역국을 먹는 전통이나 의례 등을 이야기해보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