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인류학을 나눌레오] 기도하는 자로서의 예술가

작성자
조재영
작성일
2024-07-16 00:57
조회
144

기도하는 자로서의 예술가

 

 

 

기도하려는 자, 몸의 자세부터 바꾸라

두 해전쯤으로 기억한다. 현실 넘어, 다른 세상에 대한 인간의 상상력이 궁금하여 신화세미나를 신청했다. 그러다 그 신화를 짓고 말하며 기억하는 인류학에 입문, 오늘도 이곳 인문 공간 세종에서 학인들과 함께 인류학 공부에 한창이다. 인문세 인류학 공부의 묘미 중 하나는 사전 세미나, 현장 답사, 후기 3단 콤보로 구성 답사에 있다.

최근에도 우리는 어김없이 답사를 떠났다. 장소는 울산 반구대, ‘기도하는 마음이라는 화두를 가지고 신석기 선조들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출발에 앞서 기도 한지가 언제였는지 또 무엇을 기도했었는지 생각해 봤다.

나의 기도는 대부분 내가 소원하는 것이 있을 때였다. 꼭 이루고 싶은 게 있을 때, 무형이든 유형이든 가지고 싶은 것이 있을 때이다. 나뿐이랴, 인간에게 기도란 바라는 것이 있을 때 그런데 그것이 나의 의지나 노력만으로 불가능해 보일 때, 나 자신 너머 더 큰 힘을 끌어와 그 성취에 보태려는 시도이다.

소소하게는 이런 것이다. 지난 6월이 생일이었다. 마침 비슷한 날짜에 생일인 동료가 있어 가까운 지인들끼리 모여 생일 축하 자리를 가졌다. 케이크 위에 초를 켜 두고 동료들이 소원을 빌라 한다. 나는 넓은 작업실을 갖게 해달라는 요청을 포함해서 그 짧은 순간에도 서너 가지 소원을 꾸역꾸역 담아 마음속으로 빌었다. 동료 작가에게도 옆구리를 쿡쿡 찔러 무슨 소원을 빌었냐 물어보니 부모님 건강과 큰 사고 없는 무탈을 빌었단다.

그런데 신기하다. 기도의 내용이 분명 다른데도 불구하고 우리 둘에게 통일된 것이 있었으니, 바로 기도할 때가 되자 다잡는 몸의 자세였다. 생일인 동료와 나는 둘 다 마흔이 넘은 이 나이에도 사전에 약속이라도 한 듯, 양손을 모으고 두 눈을 감은 채 머리를 숙였다. 가만 보면 이 같은 기도 자세는 생일에만 하는 것이 아니다. 다른 인종, 다른 종교를 가지고 살면서도 인간이라면 기도할 때 취하게 되는 공통의 모습들이 있는 듯하다. 몇몇 차이는 있지만 눈을 감은 채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는 등 내 몸을 한없이 낮추려는 모습 말이다. 우리는 기도할 때가 되면 이 같이 평소와 다른 몸의 모양새를 만들어, 기도하는 그 일시적 시간이나마 나를 현실로부터 분리시키고 다른 시공간의 세계로 보낸다. 그 곳에서 나보다 더 큰 힘과 접속하기를, 내 소원이 그 힘에 닿기를 바라면서 말이다.

울산에 도착하여 만난 7000년 신석기 인류도 그랬다. 평소 자신에게 익숙한 몸의 모양새와 그 쓰임을 다르게 바꾸어 현실 넘어 다른 시공간 속으로 자신을 이동시킨다. 배를 타고, 노를 저으며, 작살을 잡아 고래를 사냥하던 몸은 석기를 들고, 사다리 위에 올라타 암벽에 고래를 새김으로써 이전 자신의 몸을 다르게 만든다.

현대인들이 두 손을 모으고 무릎을 꿇는 자세부터 양팔을 움직이며 특정 이미지를 암벽에 새기는 행위까지, 인류는 오랫동안 우리에게 기도를 하려면 먼저 일상에서 사용하던 네 몸의 자세부터 바꾸라고 말하고 있다. 기도하는 인간에게 평소와 다른 몸의 자세가 왜 중요한 것인지 궁금하다.

 

고래잡이 어부, 예술가가 되다

울산 반구대 대곡리 암각화는 태화강 상류의 지류 하천인 반구천의 절벽에 위치하고 있다. 너비 약 8m, 높이 약 4.5m 크기로 중심 바위 면이 있고 그 양쪽 주변 약 10여 곳에 걸쳐 여러 그림이 새겨져 있다. 고래, 거북 등과 같은 바다 동물과 사슴, 멧돼지 등의 육지 동물을 함께 볼 수 있으며, 배를 타고 작살을 이용해 고래를 잡는 모습이나 춤을 추는 샤먼 등 인간의 모습도 담고 있다.

특히 50여 가지 고래 이미지가 암벽 좌측에 촘촘히 새겨진 모습이 눈에 띈다. 귀신고래, 범고래, 흑동고래 등 그 종류도 다양할 뿐만 아니라 수면 위를 튀어 오르는 고래, 수면 밖에서 수증기를 뿜는 고래, 새끼와 함께 유영하는 고래 등 바다에 사는 고래 모습들이 당시 울산 신석기인들에 의해 다채롭게 표현되어 있다. 뾰족한 석기를 대고 돌망치를 두들겨 가며 한 땀 한 땀 작은 점을 새기고 그 점들에 연속성을 부여하며 선을 만들거나 면을 만드는 방식이다. 암벽 앞에 서서 고래를 조각하는 울산 신석기인 들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내 두 손으로 질료를 대면하며 별다른 비약 없이 온몸으로 작업 과정을 관통해 내야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조각가의 모습이다. 그렇게 7천 년 전 인류가 조각을 전공하고 예술가로 살아가고 있는 현재 나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 없이 느껴졌다.

울산 반구대 어부들 아니, 암벽 조각가들의 작품을 조금 더 감상해 보자. 돌 표면을 깎아 이미지를 새기는 방식은 한 면에서 작품을 감상하는 부조 조각 같기도 하고, 또 판화를 찍기 위한 원형 석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이 무엇이건 이 어부들의 예술 작품은 엄청난 양의 육체적 노동과 긴 인고의 시간을 전제한다. 드로잉과 회화 작업은 종이나 천위에 펜이나 붓으로 선을 가볍게 긋거나 빠르게 면을 채우는 것이 가능하다. 앞서 보았듯 암벽화의 경우 수일 아니 수개월, 좁쌀보다 작은 한 점을 암벽 위에 반복적으로 새겨 겨우 하나의 선과 면을 얻는다. 한 덩어리의 돌에서 일부를, 그것도 셀 수 없는 무수한 점들을 돌 표면에서 덜어내며 형상을 새기는 동안 팔, 다리, 손 어깨, 신체 어느 부분 힘이 들어가지 않는 곳이 없다.

그뿐이랴, 종이 위 연필이야 실수하면 지우개로 지워도 되고, 검정 위 물감이 다 건조되면 그 위에 흰색 물감을 얹어 다시 칠할 수 있지만 돌에는 조각의 흔적이 한 번 새겨지면 전단계로 다시 돌이킬 수도, 다른 것으로 덮어 감출 수도 없다. 해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조각가들은 돌 조각을 할 때에 실수를 최소화하는 꼼꼼한 계획을 중요시한다. 그리고 이 계획 과정에 필수로 거쳐야 하는 것이 본 작업 크기를 축소하여 사전에 만드는 모형작업이다. 물론 모형을 만든다고 실수가 생기지 않는 것은 아니다. 대학 3학년 때로 기억한다. ‘석조수업 시간에 사람 두상을 조각했다. 실수를 없애기 위해 본 작업에 들어가기 전 작은 모형을 제작하고, 표준 단위를 만들어 실제 돌의 크기에 비율에 맞춰 확장하듯 조각을 한다. 사람의 코는 눈, 입 등에 얼굴의 바른 부분에 비해 돌출되어 있으나 나의 실수로 가장 높이 위치해야 하는 코끝에 약 2cm가량의 세로 선이 생겨버렸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지울 수 없는 흉터가 생긴 셈이다. 그러나 돌조각은 지우거나 다시 채우는 등, 작업과정에서 실수했다 하더라도 수정 및 보완이 가능한 작업이 아니다. 결국 크고 높은 코를 가진 서양인의 두상을 제작하려던 원래의 계획은 무산되었고, 상대적으로 코가 낮고 그 끝이 둥근, 동양인의 얼굴로 작품이 마무리되고 말았다. 그러나 7천 년 전 울산 신석기인들이 나와 같이 모형을 만들었을 리는 만무하다. 또 고래를 조각하다 실수로 고등어로 작품을 마무리 지었을 리도 없다. 해서 형상을 새기는 동안 실수가 생기지 않도록 자신들의 온 정신과 에너지를 모아 한 점 한 점을 새겼을 것이다. 고도의 집중력이 발휘하였을 것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또한 암벽 표면에 고래 이미지가 지면에서 어림잡아 3~4m 이상 되는 높은 곳에 위치하는 경우도 있었다. 현대를 살고 있는 인류보다 체구와 키가 작았던 것까지 감안한다면 사다리 등 높은 곳에 팔이 닿을 수 있는 보조 도구가 있었을 것이고, 알다시피 안전한 지면 위에 두 발이 닿는 것과 아슬아슬한 나무 사다리 위에 서 있을 때의 신체가 감수해야 할 위험은 크다. 떨어질까 불안하기도 하고, 서 있는 동안 다리에 힘이 더 들어가면서 장시간 그곳에 있다 보면 몸을 지탱하는 두 다리의 힘도 점점 약해진다. 돌 표면을 조각하기 위해 한 손에는 새기개 또 다른 한 손에 망치를 들고 있을 것이므로 예측할 수 없는 위험에 양손을 사용하는 것이 쉽지 않다. 만약 사다리가 흔들리기라도 한다면 매끈한 암벽조차 잡아볼 새도 없이 곧바로 추락하고 말 것이다. 나는 이 추락의 공포를 경험한 바 있다. 수상실적을 쌓기 위해 태백산 눈 조각대회를 갔을 때이다. 높이 5m의 대형 눈덩이를 낫, , 망치 등을 이용해 조각하는, 공동 작업이었다. 어릴 때부터 고소공포증이 있는 나인지라, 시작부터가 불안했다. 의욕이 앞서 맨 꼭대기까지는 올라갔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 공포심을 이기지 못한 탓인지 신발에 등산용 아이젠을 착용했음에도 눈에 미끄러지면서 5m 아래로 추락했다.

내가 조각 작업을 하며 직접 겪었기에 이 같은 척박한 조건이 주는 어려움이 쉽게 전달되는 듯했다. 그러다 정말 그런가 싶었다. 나야 작업실에서 더우면 에어컨을 틀고, 추우면 난방기를 틀기라도 하지, 최소한의 방어막도 없는 야외에서 바람, , 더위와 추위까지 더한다면그 고난을 상상하기 어렵다. 해서 궁금증이 인다. 도대체 이토록 힘든 조건들을 감내하며, 신체적으로 고된 조각 작업을 하게 한 동력이 무엇이었을까? 무엇이 이들은 단지 어부에 머물지 않고 고래 이미지를 돌에 새기는 예술가로 만든 것일까?

 

기도로서의 암각(巖刻)’ 행위

다시 울산 반구대 암각화로 돌아가 보자. 암벽에는 50여 점의 고래 이미지 외에도 고래를 사냥하는 모습들이 함께 그려져 있다. 20명 정도의 어부가 탈 수 있는 어선이 두 개 새겨져 있고 그 옆에는 부구도 있다. 또 뱃머리에는 작살을 들고 있는 어부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커다란 작살이 고래 몸을 관통한 이미지도 보인다. 40명의 인원이 두 대의 어선에 나누어 타고, 양쪽에서 고래를 몰아오면 작살잡이 어부가 작살을 던져 고래를 사냥한 것이 아닐까. 그리고 작살에 묶여져있던 부구를 따라 고래의 시체가 수면 위로 떠오르면 이를 싣거나 끌어 거주지로 돌아갔을 것이다.

이 포경 과정은 한두 명의 어부로 가능한 것이 아니고 두 대의 어선, 40명 어부 전체의 몸과 마음이 마치 한 사람의 그것처럼 합심하여 정교하게 움직여야 한다. 배의 노는 어떤 방향으로 돌리고, 또 어떤 강도로 저여야 하는지 등 각자는 배 위에서의 순간순간 자신의 몸을 전체 움직임에 맞춰 어떻게 사용해야 할지를 알고 있어야만 한다. 뱃머리의 작살 잡이는 더욱더 긴장해야 한다. 배 위에서 고래를 조감하면서 작살이 머리를 조준해야 하는지, 배를 관통시켜야 하는지 또 이때 바다 물살의 세기는 얼마 만 큼이며, 그에 따라 배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온 신체 감각을 총동원시켜 오직 한순간, 단 한 번에 정확하게 작살을 던져야 한다. 전체 40명 중 한 명이라도 거대한 한 몸에서 이탈한다면 예컨대, 혼자서 노를 젓는 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다거나, 반대 방향으로 노를 젓고 있다면 이날 어부들의 양손에, 부족 전체의 입속에 고래는 없다. 바다 위, 태양 아래에서 고래잡이 어부들의 몸은 그렇게 정교하고 철저하게 고래 사냥꾼이라는 자신의 정체성과 목적에 따라 몸의 자세를 잡고 움직인다.

이제 해가 저물었다. 밤이 되면 어부들은 힘 있고 빠르게 물 위를 가로지르던 배의 기동성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제 계곡 깊은 곳까지 두 다리로 걸어와 이 넓고 평평한 암벽 앞에 선다. 이들의 양손에는 낮에 사용하던 작살 대신 석기, 돌망치, 뿔망치가 들려져 있다. 배 위에 서 있던 두 다리는 나무로 만든 사다리 위에 아슬아슬하게 서 있다. 배 위에서 합심하여 노를 잡았던 손들은 어두운 밤을 밝히기 위해 횃불을 들고 있는가 하면, 흔들리는 사다리를 잡고 있거나, 사다리 아래에서 석기와 돌망치를 든 채 머리를 들어 암벽을 올려다본다.

낮에 노를 젓고 작살을 던지던 몸의 자세나 움직임들은 이 암벽 앞에서 소용이 없어 보인다. 이 암벽 앞에서는 바다 위, 배도 작살도 어망도 필요하지 않다.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능수능란하게 다루던 몸의 자세와 그 작동법, 어떤 움직임도 무용한 것이 된다. 고래 사냥꾼으로서 자신에게 가장 익숙하고, 자신이 가장 잘하는, 그래서 가장 자신다울 수 있는 그 일련의 신체 자세, 움직임, 활동을 중단한다. 고래를 잡는 몸으로서의 자신을 고래를 조각하는 몸으로 변형시킴으로써 그 몸으로 말미암아 일어나는 모든 행위들과 생각들을 멈추게 한다. 낮에 어부로서 활동하던 울산 신석기인들의 신체는 밤이 되어 암벽 앞에 서자, 그렇게 한없이 낮춰지고 작아진다. 어부는 바다에서 고래를 사냥하겠다는 포부로 채웠던 자신의 몸을 이곳에서 투명하게 비워내며 겸손히 몸을 낮춘다. 그렇게 기도가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질문이 생긴다. 왜 마음 혹은 의지만으로는 기도가 될 수 없는 것일까?

예술하는 인간, 기도하는 인간

마르셀 모스는 그의 저서 몸 테크닉에서 몸이야말로 인간 최초의 가장 자연스러운 도구이자 인간 최초의 가장 자연스러운 테크닉 대상이자 수단’(87)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인간이 자신의 몸을 사용하는 방법, 몸의 테크닉에 자연스러운 방식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덧붙여 인간이 취하는 몸의 자세, 또 몸을 사용하는 방법에는 단지 물질적인 신체 그 자체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며 인간의 신체는 그것과 연결된 심리적, 사회적 차원 요구와 가치를 맞물려 있다고 강조한다.

특정한 방식으로만 몸의 자세를 유지하고, 몸을 사용해온 사람은 그와 함께 맞물린 물린 생리학적, 심리학적, 사회학적 차원에서 고정된 사유를 한다. 한 방향으로 편향된 몸의 자세와 사용법은 역시 한 방향으로 편향된 관점을 만드는 것이다. 동시에 낯설거나 새로운 방식을 통해 자신의 신체를 변형할 수 있는 인간은 생리학, 심리학, 사회학적으로 즉 총체적으로자신을 변형시킬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울산 신석기 인류에게 암벽에 고래를 새기는 기도도 이와 같은 것이 아닐까? 암벽 앞에서 몸을 전혀 다르게 사용하여 낮 동안 고래 사냥꾼으로서 몸의 자세와 사용법을 무용한 것으로 만들어, 그 몸과 총체적으로 관계 맺고 있던 자신들의 편향된 관점 역시 내려놓으려는 시도. 이들에게 기도는 고래 사냥꾼, 그 한쪽으로 치우친 몸의 자세를 교정하고 편협한 육체의 방향성을 거둬들이는 것을 의미했다. 기도는 그렇게 익숙하고 당연하게 여긴 자기 몸을 비워내고 몸에 대해 전혀 다른 태도를 갖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고래 사냥꾼으로서 편향된 자세, 즉 편향된 관점을 덜고 그것을 내려놓는데 왜 고래를 돌에 새기는 예술 행위가 필요했을까?

조르쥬 바타유는 라스코 혹은 예술의 탄생에서 목적에 따라 움직이는 인간의 행위를 노동으로 규정하며 놀이, 예술, 종교만이 어떤 목적도 갖지 않는,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인간의 주권적 행위로 정의한 바 있다. 이때 바타유가 말하는 주권성이란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종속되지 않은 상태를 말한다. 그리고 이 주권성을 가진 인간으로서의 예술가 스스로를 희생제의에 내맡기는, 스스로를 불에 태우듯 소진시키는 사람이라고 한다. 고래를 돌에 새기는 반복된 예술 행위는 고래를 잡으려는 목적, 고래가 되려는 의지, 심지어 이 모든 것을 발현시키는 자아, 자의식조차도 불에 태워 비워내는 사람이다. 고래를 돌에 새기는 과정은 역설적이게도 그 모든 고래로부터,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자유로운, 텅 빈 상태로 이들을 이끈다. 그리고 이때 비로소 자신을 넘어, 인간을 넘어 우주, , 세계의 모든 힘과 합일을 이룬다. 우주, 신은 편향된 신체에 묶이지 않아, 모든 관점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동시에 모든 관점을 가진다.

다음 날, 다시 해가 뜨고 낮이 되면 어김없이 어젯밤 이 예술가들은 고래를 사냥하기 위해 바다 위로 몸을 던질 것이다. 어젯밤 자신을 온전히 비워내고 세계의 힘들과 합일을 이룬 이들에게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이제 바다 위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은 우주 전체의 뜻이다. 큰 비와 파도도 신의 뜻, 한 마리의 고래도 신의 뜻이다. 우주는 그 자체로 온전함으로 그 어떤 것이라도 기꺼이 받지 않을 이유가 없다.

울산 신석기인들은 그렇게 자기 스스로를 목적에 따라 노동하는 고래 사냥꾼으로만 살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부족의 생존에 이 고래가 필연적임을 알기에 고래 사냥을 하면서도 그것에 자신을 완전히 매몰시키지는 않았던 것이다. 오히려 고래를 새기는 예술행위를 통해 자신을 계속해서 비워내고 우주의 힘에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는 자들이었다.

나는 예술가는 세상에서 유일하고 독창적인, 또 그 창조성으로 영원히 기억되는 작품을 창작하고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자인 줄 알았다. 그러나 울산 신석기 어부 예술가들은 말한다. 예술가는 기본적으로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기도하는 자로서 예술가에게 중요한 것은 자기 육체의 편협함을 거둬들이고, 어디에도 치우침 없이 자신을 확장시키는 것에 있다고. 해서 예술가가 조각해야 하는 것은 내 신체 밖 예술 작품 이전에, 어디에도 편향되지 않는 자신의 신체, 그 자체이다. 기도하는 자로서 예술가의 능력은 독특하고 고유한 하나의 작품으로서의 신체가 아니라 특정한 목적과 함께 특정한 방식으로 깎인 자신의 몸을 거둬들이고 어느 목적으로 부터도 자유로운 본래의 상태로 돌리는 것에 있다

전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