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의 인류학
야생의 엔키두 길들이기
빙하 이후 / 길가메시 서사시 / 2024.07.08. / 진진
야생의 엔키두 길들이기
양우리-우르크(Uruk-the-Sheepfold)의 왕 길가메시의 폭정은 날로 심해져갔다. 참다못한 백성들은 신들에게 자신들의 고충을 노래했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은 아누 신과 아루루 여신은 길가메시에 대적할 야생의 영웅, 엔키두를 빚어냈다. 하지만 길가메시는 현명한 어머니의 조언과 사냥꾼의 도움, 매춘부 샴하트를 이용하여 엔키두를 야생으로부터 양우리-우르크로 데려오고, 그를 인간으로 길들여 친구이자 형제로 삼는다. 온몸이 털투성이에다, 부모 형제라는 개념도 없이, 야생의 동물들과 어울리고 즐겁게 지내는 엔키두를 인간의 삶으로 길들이는 모습은 인상 깊었다.
가장 먼저 엔키두가 만나게 되는 길들이기는 ‘쾌락’이다. 사냥꾼의 부친은 매춘부 샴하트를 이용해 엔키두를 성적 쾌락에 빠져들게 한다. 샴하트의 매력에 빠져 그녀와 몇 날 며칠을 질펀하게 보낸 그는 덫과 사냥꾼으로부터 야생동물들을 구해주던 힘을 다 써버리게 된다. 그녀는 엔키두에게 신과 같은 외모와 강한 힘을 가졌다고 추켜세우며, 신들의 지혜가 넘치고 풍요롭고 쾌락을 누릴 수 있는 곳, 길가메시가 다스리는 낙원으로 함께 가자고 그를 설득한다. 이미 쾌락의 맛을 본 엔키두는 그곳에 가면 자신도 길가메시처럼 될 수 있으리라 기대를 갖고 우르크로 향한다. 여기에서 샴하트와 쾌락을 나눈 엔키두가 야생의 역동적인 힘과 야수성을 잃어버리고 인간의 ‘이성과 넓은 이해력’을 갖게 됐다고 언급되는 부분이 재밌었다. 이성과 넓은 이해가 생긴 그는 샴하트의 설득에 공감하고 그녀와 함께 친구가 있는 지상낙원, 우르크로 떠나게 된다.
목동들의 야영지, 양 우리에 도달한 엔키두는 그곳에서 빵과 맥주를 먹는 법을 배운다. 인간들이 양을 가두고 길들이는 곳에서, 인간이 재배한 곡물로 만든 빵과 맥주를 배부르게 먹고 엔키두는 노래를 부른다. 먹고 마시고 즐기는 인간의 문화를 경험하며 그는 인간으로 길들여진다. 인간의 삶을 몸으로 체득한 그를 더욱 인간답게 보이게 하기 위해 사람들은 그의 털을 다듬고, 몸에 기름을 바르고, 옷을 입히고, 그의 손에 무기를 쥐어준다. 그는 또 그곳에서 결혼이라는 인간의 의례를 듣는다.
우르크 시로 들어온 그는 초야권을 행사하는 길가메시의 앞을 가로막고 그와 대결을 벌인다. 대지와 도시를 뒤흔들며 싸움을 벌인 그들은 서로를 인정하며, 엔키두는 길가메시를 왕으로 인정하고 길가메시는 엔키두를 친구로 삼는다. 야생에서 태어나 가족이 없는 그에게 서로 마음을 나누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가 생긴다는 것 또한 인간다운 삶이라는 것을 어떻게 보는지가 엿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