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세계끝의 버섯] 2부 발제
『세계 끝의 버섯』 2부
2024.12.2. 최수정
2부 진보 이후에: 구제 축적
4. 가장자리를 작업하기
오리건주의 숲에서 일하는 송이버섯 채집인과 일본에서 그 버섯을 먹는 사람을 연결하는 공급사슬을 살펴본다. 그 사슬은 놀라운 일과 문화적 다양성으로 가득 차 있다. 거기에는 우리가 공장 노동을 통해 알고 있는 자본주의가 거의 없다. 그것은 노동이나 원료를 합리화하지 않고도 부의 축적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합리화하는 대신에 다양한 사회적, 정치적 공간을 가로질러서 번역하는 작업이 필수적이다. 그러한 공간을 ‘패치’(배치를 통해 형성되는 다종의 생물들의 특정한 집합) 라고 부른다.
이 패치들은 다운율의 리듬이 여전히 존재하고 다종의 얽힘이 이루어지는 비자본주의적 성격을 띠면서도 이것들을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의 창출과 축적으로 끌어들이는 번역이 작동할 수 있는 주변자본주의적 공간에 형성된 집합들이다.
우리에게는 축적이 가능한 경제적 다양성을 보는 민족지적 눈이 필요하다. 버섯 채집이야말로 진보 이후에 탐색해볼 만한 장소다. 송이버섯이 거쳐 가는 오리건주에서 일본까지의 상품사슬에 존재하는 균열과 가교를 살펴보면 경제적 다양성을 통해 성취된 자본주의가 드러난다. ‘주변자본주의적’ 행위를 통해 채집되고 팔리는 송이버섯은 채집된 다음날 일본으로 보내지면서 자본주의의 재고품이 된다.
구제salvage : 자본주의적 통제를 받지 않고 생산된 가치(예–석탄과 석유)를 써먹는 것을 의미한다. 이 용어는 마르크스의 용어 ‘본원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그러나 본원적 축적과 달리 구제는 결코 완결되지 않는다. 축적은 항상 구제에 의존한다. 구제 축적은 또한 ‘노동력’ 생산을 필요로 한다. 공장 노동자는 자본가가 결코 완벽하게 통제하지 않는 삶의 과정을 거치면서 생산되고 재생산된다. 노동자의 능력을 자본주의적 가치로 변형하는 것이 구제 축적이다. 예를 들면 여성은 성장하면서 집에서 바느질을 배운다. 구제 축적은 그러한 기술을 공장주가 이윤을 낼 목적으로 공장에 끌어오는 과정이다.
구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는 자본주의의 내부인 동시에 외부다. 저자는 그 장소들을 ‘주변자본주의적pericapitalist’이라고 부른다. 주변자본주의적 활동에 의해 생산되는 인간과 비인간을 포함한 모든 종류의 상품과 서비스는 자본주의적 축적을 위해 구제된다. 주변자본주의적 장소에서 토착 지식과 기술로 모은 가치가 자본주의적 이윤으로 전환되는 양상을 구제와 번역이라고 부른다.
재고품 관리 기술 : 상품에 붙은 범용상품코드는 상품을 상세하게 추적하고 접근할 수 있도록 하지만, 그 상품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에 대해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렇게 함으로써 야만적인 노동 착취와 환경 파괴를 장려할 수 있게 된다. 월마트는 재고품의 식별이 쉽기 때문에 생산 자체에서 확장성을 갖추지 않고도 확장성(하나의 기본적인 구조와 틀을 변형시키지 않고 규모만 확장시키는 것) 있는 소매를 확대할 수 있다. 생산은 관계에 따라 특정한 꿈과 계획을 추구하는, 비확정성 영역에 속하는 떠들썩하고 다양한 것들이 수행하도록 떠넘겨진다. 규제받지 않은 생산은 상품 사슬로 번역되고 다시 진보의 이미지로 상상되기도 한다.
첫 번째 사슬
중간상인은 능숙한 번역가다. 1980년대 일본은 투자 자본이 넘쳐나는 상황이었고, 송이버섯은 최상의 사치품이자, 동시에 특전(상), 선물, 또는 뇌물이 되기에 딱 알맞았다. 일본의 송이버섯 무역상은 공습사슬을 조직하기 위해 자신의 자본을 사용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일본 수입업자들은 현지의 노하우가 필요했고 수출업자들과 동맹을 맺기 시작했다. 첫 번째 수출업자는 벤쿠버의 아시아계 캐나다인이었다. 수출업자와 수입업자가 맺은 동맹은 태평양을 횡단하는 무역의 기반이 되었다. 무역업자는 번역가로서 구제 축적의 명수가 된다.
5. 자유의 배치–오리건주의 오프티켓
‘오픈티켓’은 버섯 구매 행위 중 하나인 명칭으로 채집인이 원래 지불받는 가격보다 같은 날 밤에 거래된 최고 가격이 더 높을 경우, 그 차액을 나중에 구매인에게서 보상받을 수 있다는 뜻이다. 저자가 보기에 오픈티켓은 채집인과 구매인 모두의 자유 만들기와 자유 확인하기의 ‘실천’이다. 따라서 그는 오픈티켓을 ‘자유를 수행하는 장소’의 이름으로 쓰려고 한다.
버섯 관계자들의 자유는 불규칙적이며, 합리화의 외부에 존재한다. 공연 성격을 띠고, 공동체에 따라 다양하며, 기운이 넘친다. 이것은 그 장소의 소란스러운 코즈모폴리티니즘(cosmopolianism)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그 자유가 잠재적인 분쟁과 오해로 가득한 열린 문화적 상호작용으로부터 등장하기 때문이다.
오픈티켓은 권력의 집결과는 거리가 멀다. 그렇기에 이 공간은 도시와는 정반대다. 사회질서는 보이지 않는다. 오픈티켓은 도시에서 도망쳐 온 사람들이 뒤죽박죽 섞인 곳이다. 송이버섯 채집은 ‘일’이 아니다. ‘찾는 행위’다. 채집인 중 어느 누구도 송이버섯으로 얻는 돈을 자신의 노동에 대한 대가로 생각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유를 위해 ‘표준 고용’이라는 것을 거부한다. 채집인은 자신들이 노동을 거부하는 것에 많은 종류의 문화유산을 접목시킨다. 송이버섯 채집인은 마치 숲이 대규모 ‘공유지’인 것처럼 행동한다.
유령이 깃든 자유는 미래를 과거로 가득 채우는 마법을 부리기에, 그것은 다음 일로 넘어가는 방법인 동시에 이전 일을 기억하는 방법이다. 채집은 자유를 향한 열병을 앓으며 행해지기에 사람과 사물이 분리되는 일에서 벗어나게 된다. 버섯은 아직 소외된 상품이 아니다. 버섯은 채집인이 실천하는 자유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구매인이 가격을 정할 때 모든 것은 경쟁이라는 공연에서 행해지는 연기이고, 비즈니스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드라마다. 경쟁과 독립은 모두에게 자유를 의미한다. 기다림 또한 자유를 수행하는 것의 일부다. 어디든지 찾아갈 수 있는 자유, 갑자기 떼돈을 벌거나 모든 것을 잃을 자유다. 이것이야말로 강력한 이해관계와 불평등에 오염되지 않고 이루어지는 진정하고도 기본적인 자본주의 형식이다.
오픈티켓의 버섯은 자본의 흐름에는 동참하지만, 자본주의적 형성물로 보이는 것에 조달되지는 않는다. 경쟁이 벌어지는 이 극장의 목적은 일본의 돈의 물줄기를 강제로 열어서 돈이 오픈티켓으로 흘러들게 하는 것이다. 오픈티켓의 구매인과 대규모 구매업자는 가격을 올리고자 경쟁이라는 도박을 한다.
6. 전쟁 이야기
많은 채집인과 구매인이 말하는 자유는 현지의 지시 대상뿐 아니라 멀리 떨어진 곳의 지시 대상과도 연결된다. 대부분의 채집인은 자신들이 살아남은 전쟁에 대해 이야기 한다. 그들은 송이버섯 숲에 존재하는 상당한 위험에 용감하게 맞설 의향이 있는데, 그렇게 함으로써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신들의 삶을 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전쟁은 유령에 사로잡힌 자유의 한 가지 형태다. 그러나 전쟁에 참여하는 일에는 문화적, 민족적, 인종적인 특수성이 존재한다. 채집인은 차이의 미로를 통과하면서 숲에 난 자유의 길을 찾아다닌다. 자유는 공통성의 축이면서도 동시에 공동체 내에 존재하는 각 집단의 특수한 의제가 분리되는 지점이기도 하다.
7. 국가에 무슨 일이 일어났나? 두 종류의 아시아계 미국인
일본계 미국인 이민자들은 미국 복지 제도 중 문화 정책에 따라 형성되었다. 이에 따라 일본계 미국인은 미국인으로 분류되도록 유혹받고 재촉받았다. 이들은 미국에 도착한 직후부터 시민권과 토지 소유권에서 배제되었기 때문에 어려운 삶을 살았다. 그리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격리 수용되기도 했다. 일본식 같은 것들은 모두 멀리했다. ‘200퍼센트 미국인’이 되기 위해 일본식 습관이 공공장소에서 드러나기 않도록 하고 일본어를 쓰지 않았다. 이들이 공동체를 유지하는 데 송이버섯이 큰 역할을 했다. 일본계 미국인에게 송이버섯 채집은 문화적 유산이자 세대를 아우르며 공동체적 유대를 건설하는 도구였다.
동남아시아 난민 이민자는 신자유주의적 다문화주의 시대에 미국 시민이 되었다. 자유를 향한 사랑만으로도 미국인이라는 집단에 합류할 자격이 충분했다. 그러나 이들 난민이 미국에 입국한 시기는 온갖 종류의 정부 프로그램이 취소되던 때였다. 공적 지원이 사라지고 복지가 축소되었다. 그들은 스스로 살아갈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들이 미국에 입국하기 위해 지지해왔던 자유의 개념은 생계 전략으로 번역되어야 했다.
일부 백인 채집인과 구매인은 자신들의 입장을 ‘전통주의’라고 부른다. 그들은 인종 통합에 반대하고, 다른 집단에 의해 오염되지 않은 자신들만의 가치를 즐기고 싶어한다. 그들은 그렇게 하는 것을 ‘자유’라고 부른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인종 통합에 반대하는 정서가 미국 역사상 가장 코즈모폴리턴적인 문화 형성에 일조했다. 새로운 전통주의자들은 인종적 융합과 강압적인 동화 정책을 통해 인종 융합을 가능하게 했던 복지국가의 강력한 유산을 거부한다. 그들이 동화를 해체하자 새로운 형성체가 창발한다. 중앙에서 세운 방침이 없기 때문에 이민자와 난민은 자신들이 가진 것 중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데 가장 도움이 되는 가능성을 움켜쥔다. 그들의 전쟁 경험, 언어, 문화가 그러한 가능성이다. 그들은 ‘자유’라는 단어 하나로 미국식 민주주의게 합류한다. 그들에게는 초국적 정치와 무역의 자유가 있다.
이보다 더 글로벌 공급사슬에 적합한 참여자가 있을까! 자본이 있든 없든 간에 자발적이고 준비된 기업가들, 거의 모든 종류의 경제적 기회를 잡기 위해 자신들의 종족적이고 종교적인 동료를 동원할 수 있는 기업가들과의 접점이 바로 여기다. 임금과 혜택이 필요하지 않다. 공동체 전체가 동원될 수 있고, 그것은 공동체 구성원이 공유하는 공동의 이유 때문이다.
8. 번역 중–달러화와 엔화 사이에서
어떤 경제 모델이 글로벌 하청의 조직적 형태들이 창발하게끔 했는가?
시장 경제에서 송이버섯에 대한 수요가 없었다면 송이버섯은 채집되지도 않았을 것이다. 글로벌 자본주의에 완벽하게 포섭되지 않은 공간에서 생태적 과정을 통해 형성된 자연은 일본이 발명해 미국과 소위 선진국에 전파한 ‘글로벌 공급사슬’에 의해 자본주의 시장으로 흘러들어오게 된다. 저자는 이 과정을 구제 축적이라고 부른다. 확장성을 지닌 플렌테이션 농장이 아니지만 그 숲에서 자란 송이버섯은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을 위해 ‘구제’될 수 있다. 구제 축적은 기업이 이 숲을 플랜테이션 농장으로 만들지 않고도 이윤을 내고 부를 축적하는 방식이다. 저자는 이렇게 구제가 이루어지는 장소를 주변자본주의적 장소라고 부르고, 구제가 이루어지는 과정을 번역이라고 부른다.
미국의 대규모 비즈니스가 개입하기에는 너무 규모가 작고 너무 특성화되어 있는 송이버섯 공급사슬에서 일본의 유산이 드러난다. 어떻게 미국인에게 이런 하찮은 역할을 담당하라고 설득할 수 있었을까? 미국의 오리건주 어느 누구도 자신을 일본의 비즈니스에 고용된 직원으로 여기지 않는다. 채집인, 구매인, 현장 중개인은 자유를 위해 그곳에 있다.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고용에 대한 기대 없이 미국식 생계 방식을 꾸리게 되었을 때만 자유라는 단어에 동원되었으며, 그것은 미국 자본과 일본 자본 사이에 이루어진 태평양을 횡단하는 대화의 결과다.
9. 선물에서 상품으로, 그리고 그 반대로
소외된 노동을 거부하고 다양한 의미의 자유를 원하며 그 자유를 송이버섯 채집과 거래의 행위로서 연기하고 수행하는 프리랜서 체집인, 구매인, 현장 중개인에 의해 모아지고 분류된다다. 이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쿨라 선물 교환 경제 체계에서처럼 버섯은 경제적 가치뿐만 아니라 심미적, 생태적, 문화적 가치도 가지며, 이 버섯과 관련된 인간들이 추구하는 자유의 상징이자 트로피가 된다. 이 버섯에 관련된 인간들 또한 버섯의 문화적 가치와 연결된 정체성을 얻는다.
브로니슬라브 말리토프스키는 쿨라환 즉 뉴기니의 멜라네시아 동부 지역에서 만들어진 목걸이와 조개 팔찌의 교환을 연구하면서 선물의 특별한 속성에 주목했다. 쿨라에 이용되는 장신구들은 오로지 쿨라에서 가지는 역할 때문에 가치가 있다. 그것들은 선물로서 관계와 명성을 만든다. 이것이 그것들의 가치다. 쿨라와 함께 자본주의의 미스터리하고 기이한 특징인 소외를 말할 수 있다. 쿨라는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사람뿐 아니라 사물도 소외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사물은 홀로 존재하는 물건이 되어 이용되고 교환된다. 그 사물은 그것을 생산하고 배치한 사람들의 관계망과 어떤 관련도 맺지 못한다.
쿨라에서 사물과 사람은 함께 형성되는데, 선물을 통해 사물은 사람의 연장extension이 되고 사람은 사물의 연장이 되기 때문이다. 쿨라환의 귀중품들은 그것들이 형성하는 개인 간의 관계를 통해 알려진다. 유명인들 또한 자신들이 주고받은 쿨라 선물을 통해 알려진다. 사물은 그것들이 일부를 담당하는 사회관계와 명성을 통해 가치를 지닐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송이버섯은 거의 항상 선물용으로 쓰인다. 송이버섯은 관계를 형성하며, 이 버섯은 선물로서 그러한 관계와 분리될 수 없다. 송이버섯은 선물 경제에서 가치를 정의 내리는 특성, 즉 사람이 연장된 것이다.
그러나 대규모 무역회사를 통해 송이버섯에 대해 전혀 모르는 일용직 노동자들에게 버섯을 분류하도록 하면서 채집인이나 구매인이 송이버섯과 맺은 관계가 철저히 배제된다. 송이버섯과 숲과 채집인을 함께 묶었던 ‘자유’라는 단어 속의 다양한 의미, 경험과 지식이 농축된 역사에서 탄생한 명성, 다종의 생명과 삶의 세계 만들기의 가치는 지워지고 버섯은 자본주의 상품으로 번역된다. 하지만 또 하나의 반전은 송이버섯이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상품에서 선물로 변형되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번역의 마법이고, 송이버섯 상품사슬의 종착지인 일본에 존재하는 모든 중개인은 이러한 번역의 전문가라는 것을 의미한다. 도매업자는 먼저 자신이 취급하는 상품에 담긴 관계의 속성을 찾고 나서 특정 구매인과 상품의 자연스러운 중매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버섯은 관계의 속성을 떠맡고, 이때 송이버섯의 가치는 주는 행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다. 개인적 가치와 물건의 가치는 자유를 교환하면서 함께 생겨난다.
10. 구제 리듬: 교란되고 있는 비즈니스
우리 대부분은 인간이 훼손한 환경에서 생존을 위해 협상하면서 혼란스럽고 괴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저자가 ‘리듬rhythms’이라고 부르는 것은 시간적 조율 형식을 의미한다. 앞으로 전진하고 오직 한 가지 종류로만 존재하는 진보의 맥박이 부재한 상태에서 우리가 가진 것이란 규칙 없이 조율된 구제다. 구제 리듬을 통해 생각하면 우리의 시야가 바뀐다. 산업은 더는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우지 않는다. 생계 방식은 다양하며, 대충 꿰맞춰져 있고, 종종 일시적이다.
전쟁 트라우마에서 벗어나 살아남은 사람들, 미국 시민권과 계속해서 협상하는 사람들이 상업적인 채집을 가동하고 있다. 채집의 창발하는 속성들을 통해 다각적인 역사가 가능해진다. 상의하달식 규율이나 동기화 없이, 그리고 진보에 대한 기대 없이, 생계 방식의 패치들은 글로벌 정치경제를 구성하는 데 기여한다.
‘소외’는 자본주의적 자신이 형성될 수 있는, 얽힘의 풀린 형태다. 소외는 축적, 즉 투자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한다. 축적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이 소유를 권력으로 바꾸기 때문이다.
자본주의는 인간 및 비인간의 방식을 모두 포함하는, 모든 종류의 생계 방식으로부터 자본을 생산하기 위해 작동하는 번역 기계다.
저자는 자본주의의 내부인 동시에 외부이기도 한 생계 방식에 주의를 기울인다. 자본주의적 통치를 이용하기도 하고 거부하기도 하는 현장에서 불안정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주며 이와 같은 배치는 자본주의가 초래한 훼손에도 불구하고 남아 있는 것이 무언인지 말해준다.
각각의 생계 패치는 그 자체의 역사와 역동성을 가진다.
‘배치’는 ‘잠재해 있는 공유지latent commons’, 즉 공동의 목적에 동원될 수 있는 얽힘을 다양한 모습으로 보여준다.
인터루트–추적하기
버섯을 추적하는 것은 모든 경계를 침입하는 거친 여정이다. 얽힘은 범주를 부수고 정체성을 뒤집는다. 버섯은 곰팡이의 자실체다. 곰팡이는 바위와 나무를 소화하며 흙을 만든다. 버섯 중 많은 종은 이종 간 관계를 통해서만 생성된다. 곰팡이가 수행하는 세계–건설하기 작업이 거의 인정받지 못했던 이유는 많은 사람들이 상리 공생 관계는 이례적인 현상으로 삶을 이해하는 데 진정으로 필요하지는 않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삶은 단독으로 경험하는 진화적이고 환경적인 도전에 맞서는 행위, 즉 개별적인 생물종의 자기 증식을 통해 발생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근에 연구한 DNA 연구는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우리를 이끌었다. 많은 유기체가 다른 생물종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만 발달하는다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공생은 예외가 아니라 ‘규칙’이었다. 자연은 개체나 게놈보다는 ‘관계’를 선택하는 것 같다.
이종 간의 관계는 진화를 다시 역사로 끌어들이는데 그 이유는 이 관계가 마주침의 우연성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이종 간 만남은 항상 역사의 단위이고, ‘생겨난 일들’인 사건이다. 개미와 공존하는 큰점작이푸른저나비 개체군은 이종 간 마주침이 일어나는 확정성 없는 장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