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여행하다
길들여지지 않기 위해 길을 떠나다
동사 ‘여행하다’
‘목적’ 없이 길을 떠난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 목적으로부터 자유로운 여행에 ‘단선적’ 지름길은 필요하지 않다. 길을 잃고 길을 헤매다 길을 찾고 다시 길 놓치기를 반복하는 과정 자체가 곧 목적이 된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쿨라 원정대의 여행의 목적은 우리에게 익숙한 어떤 ‘이윤’ 추구에 있지 않다. 이윤하고 거리가 한참 먼, 조개목걸이를 선물하는 것에 있다. 굳이 말하자면 선물을 교환하고 싶은 ‘욕망’, 이것이 이 여행의 전부이다. 선물 교환을 하는 그 사이에 주술을 걸고, 가치를 증식하고, 그 경험을 통해 스토리를 계속 만들어 간다는 것. 받은 선물을 일시적으로 소유함으로써 또 다시 그것을 길 위로 돌려보내며 또 다시 길을 나선다.
성스러움과 주술성
오직 전체, 집단, 우주, 사회가 있을 뿐이다. 고대 인류 사회에서 ‘나’라는 독립 개체는 없다. 개인의 사고, 심리, 정서, 신체 모든 것이, 철저히 집단적이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집단으로서만 사고한다. 다만 그 집단의 사고의 체계가 응고된 것이 있고, 길들여진 것이 있고, 견고한 것이 있고 유연한 것이 있을 뿐이다.
어떤 사고를 쓰고 있는가? 사고를 쓰는 방식을 그 사고를 쓰는 사람을 바꾼다. 또 그 사람이 자신이 살아가는 우주에 어떤 영향을, 어떤 힘을 미친다. 견고한 힘이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방향과 유연한 힘이 우주에 영향을 미치는 힘의 방향, 그 모든 것이 우주에 개입해서 조응하고 영향을 끼친다. 해서 어떤 존재도, 가치도 선행적으로 ‘있다’가 아니라 매번 ‘생성’되는 것이다.
‘나’가 아니라 집단 내 ‘관계’와 ‘배치’로 사회, 우주를 이해한다. 지금 여기 에서 나의 사소한 행위 하나가 곧 집단적 행위이며 동시에 우주에 영항을 미치는, 우주에 개입해 들어가는 행위가 된다. 여기서 인간의‘주술성’이 들어간다. 주술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바다에,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또 인간이 그것을 막아보겠다는, 인간의 힘과 의지가 그 운행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인간중심주의라고 할 수 있다. 해서 인간을 중심에 놓고 사고하는 지금과 다를 바 없어 보이기도 한다. 현대의 인간 중심주의와 무엇이 다를까? 이들 항해자들은 우주 운행에 있어 인간을 중심에 두기도 하지만 이 중심을 회항하고 열려 잇는 중심이다. 우주로부터 기운과 영향을 인간이 받아 그 기운과 영향을 다시 자연과 우주에게로 돌려보내는, 일종의 통로이자 매개자로서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현대와 다르다.
이 같은 인간중심주의에서 주술은 그 주술성으로 인간을 관통한 우주의 ’욕망’ 실현시키려 한다. 이때의 욕망은 ‘가치’를 증식하는 것에 있다. 그렇다면 어떤 가치인가? 성스러움이란 무엇인가? 또 길들여지지 않음이란 무엇인가?
주술의 핵심은 ‘말과 소리’
어떤 주술의 핵심은 ‘소리’, ‘숨, ‘말’이다. 주술의 복잡한 세계를 들어갈 때, ‘숨’을 용기 안에 넣는다. 주술화 된 소리로 공간을 채운다. 공간 전체가 소리화되어 있다. 호흡은 활동을 강조하는 것인데, 우리의 ‘숨’ 안에 ‘무엇’인가 들어 있다는 전제가 있다. 말, 목소리를 내는 것에 있어 핵심은 말의 내용이 아니고 소리를 통한 자연, 우주와의 교감이다.
반면, 문명화된 문자가 소리를 억압한다.
우주신체대응론, 형태, 위치, 공간
인간 창조가 없는 가운데, 신호와 전통을 통해 현실화, 구현해야하는 과제가 인간에게 주어진다. 이때 표현해 내야하는 것은 ‘나’다. 우리가 개입해서 감응하고 영향을 주고 또 영향을 받는 시공간을 신체화하는 것이다. 밖과 안을 주술적으로 공명하게 한다. 이때 인간의 몸, 해부학적 위치 등을 도구, 잣대로 쓰는 것이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 모두가 다 다른 방식으로 겪는다. 같은 건 없다. 심리도 ‘배치’의 문제일 뿐이지. 주체, 실질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