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해양생물 글쓰기_플랑크톤의 측정 불가한 크기
<해양생물>
플랑크톤의 측정 불가한 크기
2025.3.10. 최수정
바다는 인간에게 ‘심연’이라 느껴질 만큼 깊고 광대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막막함 때문에 인간은 바다를 비어 있다고 생각하게 됐는지도 모른다. 헬렌 체르스키는『블루 머신』에서 바다는 인간이 바다를 ‘존재하는 장소가 아닌 부재하는 장소’로 여긴다고 말한다. 인간이 바다를 자신의 거주지와 상관없는 머나먼 장소로 여기거나 비어 있어 별 쓸모없는 장소로 생각한다는 뜻이다. 바다를 무한히 넓은 빈 공간으로 생각할 때 인간은 무엇을 하게 될까? 인간은 바다를 광대하지만 무용한 장소로 생각하게 되어 바다를 육지로 바꾼다. 바다를 흙으로 메우고, 오염물질을 버리고 오염수를 흘려보내는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인간에게 바다는 너무도 거대해서 오히려 역설적으로 비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인간에게 ‘현미경’의 발명은 커다란 전환점이었다. 바다를 텅 빈 ‘공허’로 보고 오염수를 ‘희석’하는 공간으로 생각했던 사람들에게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게 해준 현미경은 바다에 대한 인간의 관점을 바꾸어 놓았다. 현미경과 함께 인간은 바다는 비어 있는 장소도 아니고, 인류의 영향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크지 않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단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잊고 있거나 없다고 생각하는 것일 뿐이었다는 깨달음도 얻었다. 현미경을 통해 보이지 않는 세상을 보게 되면서 인류는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이,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현미경으로 바닷속에 풍부히 존재하는 동물을 가장 극적으로 관찰할 수 있고 이를 통해 단순한 놀라움을 넘어 생명의 보편성에 경외심을 품게 된다. 이처럼 풍요롭고 활기찬 생물과 다양하고 고도로 발달한 미생물은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하지만, 나는 항해할 때마다 바다의 무한함과 측정 불가함을 느끼며 마음 깊이 감동한다.”(헬렌 체르스키,『블루 머신』, 김주희 옮김, 남성현 감수, 쌤앤파커스, 305쪽)
눈에 보이지 않았던 플랑크톤
나는 얼마 전 들른 일본 우에노 과학박물관에서 플랑크톤을 현미경으로 볼 수 있었다. 어떤 기대감도 없이 눈을 갖다 댄 현미경에서 나는 너무나 뜻밖의 생명을 만났다. 내가 플랑크톤이라 는 이름으로 알고 있던 미생물이 지금 내가 보고 있는 이 생명이 맞는지 혼란스러웠다. 내 눈이 현미경의 초점을 벗어나 다른 부분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며 여러 번 눈을 떼고 다시 들여다보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때마다 내가 처음 보고 놀란 모습은 그대로였고, 각양각색의 모양과 색깔로 빛을 내고 있었다.
헬렌 체르스키는 현미경은 바다가 운송하는 살아 있는 승객인 플랑크톤의 세계로 향하는 문을 열었다고 말했다. 현미경의 최초 발명은 얀센(Zaccharias Janssen, 1580~1638), 갈리레이(Gallileo Gallilei, 1564~1642), 레벤후크(Antony van Leeuwenhoek, 1631~1723)등을 거론한다. 그 이전에는 내가 현미경을 통해 플랑크톤을 들여다보기 전까지 플랑크톤의 존재를 알 수 없었듯이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의 존재를 알 수 없었다.
지금도 플랑크톤은 크기가 작아 하찮은 구경꾼 취급을 당하기 일쑤다. 하지만 헬렌 체르스키에 의하면 플랑크톤은 바다를 구성하는 생명의 그물망에서 대부분을 차지하는 필수 요소다. 플랑크톤 생태계는 비교적 좁은 규모에서 계절과 수심, 심지어 시간대에 따라서 변화할 수 있다. 그런 작고 섬세한 생물로 이루어진 모자이크가 전 세계 바다에 퍼져 있는 것이다.
위에서 훔볼트가 언급함 ‘측정 불가함’은 그래서 더욱 위협적으로 느껴진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측정 불가능할만큼 많다는 것을 알았을 때 인류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텅 비어 있는 것 같던 바닷물이 측정 불가능한 양으로 꽉 찬 생명의 거주지였음을 알게 된 인류는 광활한 바다의 생명력에 압도당했을까? 자신들의 무지가 두려워졌을까?
눈에 보이지 않는 생물에서 다수를 차지하는 플랑크톤은 바닷물을 타고 표류한다. 이들 없이는 다른 어떤 생물도 살 수 없다. 바다 생태계뿐만 아니라 지구 전체 생태계가 유지될 수 없다.
플랑크톤의 역할
플랑크톤(plakton)은 ‘부유생물(浮游生物)’이다. 플랑크톤 연구자들은 우리가 바다를 떠올리면 그 안에서 살아가는 해양 동물들이 전부인 것 같지만 눈에 잘 보이지 않는 초록색 방패가 있다고 말한다. 플랑크톤은 태양 에너지와 해양의 영양염류를 이용하여 생성되고 바다를 떠다니며 바닷물의 흐름에 따라 이동한다. 플랑크톤은 육지의 식물과 마찬가지로 스스로 광합성을 통해 영양염과 탄소를 흡수하고 에너지(유기탄소)와 산소를 합성한다. 뿐만 아니라 해양 생태계를 먹여 살리는 자가 영양생물로 먹이사슬의 탄탄한 기반을 이룬다. 이 때문에 바다에서 가장 중요한 유기체로 꼽힌다.
플랑크톤은 식물성과 동물성으로 나뉘는데, 내가 현미경으로 본 플랑크톤은 식물플랑크톤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사로잡혔던 식물플랑크톤을 중심으로 이야기해 보고 싶다. 식물플랑크톤(phytoplankton)이라는 단어는 ‘식물’을 뜻하는 그리스어 ‘파이튼’과 부유물질을 뜻하는 ‘플랑크토스’에서 유래해 바다에 떠 있는 식물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플랑크톤은 햇빛이 들어오는 바다와 호수의 표층에서 살아간다. 육상 식물과 비교해 훨씬 더 넓은 면적에 분포하며 계절적인 변화도 적은 편이다. 따라서 지구의 탄소 순환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식물플랑크톤은 그 이름에 걸맞게 육지의 식물처럼 태양 에너지를 이용하여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생성하며, 이는 해양 생물들의 주요 에너지원이 된다. 동물플랑크톤(zooplankton)은 식물플랑크톤을 먹이로 삼아 성장하며, 이를 통해 많은 해양 생물들에게 중요한 먹이가 되는 순환을 만든다.
바다가 운송하는 승객
물리적 조건과 에너지 및 원료의 가용성이 유리한 지역에서는 무생물 승객이 생물 승객, 즉 식물성 플랑크톤으로 전환되면서 바닷물의 화학 특성이 변한다. 식물성 플랑크톤은 해류를 타고 표류하는 동안 바다의 화학적 요소와 해양 엔진의 물리적 요소가 변화함에 따라 증식하거나 사라진다. 이 작은 생물로 이루어진 거대한 연결망이 없다면, 펭귄도 돌고래도 상어도 없을 것이다.(헬렌 체르스키, 『블루 머신』, 김주의 옮김, 남성현 감수, 쌤앤파커스, 313쪽)
식물플랑크톤은 다른 생물들이 똥을 통해 물속에 방출한 철을 흡수해 필요한 분자를 합성한다. 수중에서 배설물이나 분해산물도 물속에서 떠도는 데트리투스(Detritus)같은 형태로 분해 과정을 거치게 해서 분해자의 역할도 하는 것이 플랑크톤이다. 바다는 일방통행이 아닌 무한한 순환이 일어나는 장소다. 한 생물이 버린 물질은 주위 다른 생물이 재구성하고 재조립하고 재활용한다. 바다는 무한히 그리고 필수적으로 물질을 재순환한다. ‘사라지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들은 대부분 언젠가 시스템에 다시 등장한다.(같은 책, 333쪽) 식물성 플랑크톤은 죽으면 탄산칼슘의 무게 때문에 해저로 가라앉을 가능성이 높다. 이후 조건이 맞으면 식물플랑크톤 사체는 해저에 쌓여 석회암 등 칼슘이 풍부한 암석을 형성한다.
물속의 빛나는 보석, 플랑크톤
내가 현미경으로 본 사진은 바로 아래와 같은 모습이었다. 플랑크톤은 살기 위해서 빛이 필요하다. 빛을 이용해서 몸을 만드는 생물로 물속에서도 빛이 전해지는 위쪽에 주로 서식한다. 독특한 투명 껍질은 태양 에너지를 수집하여 빛을 낸다.
이 아름다운 생물들은 크게 식물로 분류된다. 약 1만 6천 종이나 되는 규조식물문 가운데 물 위에 떠서 사는 조류(藻類)로 규조류(珪藻類, diatom)라고 한다. 한때는 ‘돌말’이라도 불렸다. 규조류는 껍질의 무늬가 복잡하고 정교해서 현미경의 해상력의 시험재료로 흔히 사용된다. 생물은 대칭적일 때 특히 아름답다. 그래서 규조류를 바다의 보석이라고 부른다. [사진_Jose Almodovar]
다양한 규조류를 조화롭게 배열하여 만든 작품이다. 이 아름다운 규조류가 퇴적되면 규조토가 된다. 규조토(diatomite)와 다이너마이트(dynamite)의 영문철자에서 알 수 있듯이, 규조토는 1860년대 이래로 다이너마이트 제조에 필수적인 재료다. 규조토는 2000년 전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가벼운 건축자재였으며, 현재는 여과재, 충진재, 흡착재 등으로 다양하게 응용되고 있다. [사진_Matthias Burba]
마치 어둠 속에서 빛을 좇는 인간의 눈동자처럼 보이는 이 사진은 규조류강의 한 속인 악티노시클루스(Actinocyclus)를 찍은 것이다. actino는 ‘광선’이란 뜻이며 cyclus는 ‘방사선 형태의 둥근’이란 뜻이다. 이 식물성 플랑크톤은 조개류 치패(稚貝, 어린조개)의 먹이 생물 역할을 한다. 악티노시클루스의 실제 모습은, 가시가 떨어진 성게 껍질과 비슷하게 생겼다. [사진_Arlene Wechezak]
현미경으로 바라본 플랑크톤에서 나는 가장 먼저 태양의 빛을 떠올렸다. 그들의 기하학적 모양은 지구를 다녀간 듯한 흔적처럼 친숙했다. 완벽한 대칭으로 세모, 네모, 동그라미, 타원 형태를 만들고 있는 플랑크톤은 당당히 생명의 존재감을 드러냈다. 눈에 보이지도 않던 바닷속 작은 플랑크톤에 육지의 모든 형태가 재현된 것처럼 보였다.
바다와 육지와 하늘을 연결
나는 플랑크톤을 조사하면서 우리는 오늘도 이 작고 아름다운 존재 덕분에 살아 있다는 것을 실감한다. 우리가 먹는 모든 수생동물의 영양분은 결국 플랑크톤에서 출발한 것이다. 단세포 생물인 식물플랑크톤은 물에 녹아 있는 이산화탄소를 이용하여 포도당을 합성하는 1차 생산자다. 식물처럼 엽록소가 있어서 광합성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광합성 산물은 물속 생태계 에너지 순환의 기본물질이다. 식물플랑크톤은 동물플랑크톤을 비롯한 많은 수생생물의 기본적인 먹이로서 작용하고 심지어 고래에게는 가장 중요한 식량이기도 하다.
우리가 숨 쉬는 산소 역시 식물플랑크톤에서 나온다. 대기 중에 포함되어 있는 산소 가운데 육상의 숲과 해조류가 생산하는 산소는 30퍼센트에 불과하고, 나머지 70퍼센트는 식물플랑크톤이 생산한다. 식물플랑크톤이야말로 바다의 숲이다. 식물플랑크톤이 나무보다 더 많은 산소를 만들어내는 것을 누가 상상할 수 있었을까? 식물플랑크톤 하나하나가 태양 빛을 흡수하는 식물 잎처럼 광합성을 한다는 사실을 나는 여태 몰랐다.
해류는 플랑크톤의 이동 경로를 결정하고, 영양분 및 산소를 공급하며, 더 좋은 생장 환경을 제공할 수 있다. 플랑크톤은 바다의 생태계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며, 어류와 같은 다른 동물들의 생존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또한, 대기 중 이산화탄소의 흡수와 산소 생산에도 기여한다. 작고 보잘것없어 보이는 플랑크톤이 연결하고 교환하는 메커니즘은 바다를 넘어 육지로 확대된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파도가 칠 때 바다 표면에서 작은 물방울들이 흩어지면서 에어로졸(aerosol)을 만든다. 이때 식물플랑크톤과 박테리아가 분비하는 화학물질은 물방울 속에 녹아들어 가며, 공기 중으로 섞여든다. 이러한 화학물질이 많이 녹아 있는 물방울은 상대적으로 적은 물을 포함하고 있으므로 습도에 영향을 주게 된다. 결과적으로 에어로졸은 구름이 만들어지는데 관여하게 된다. 바닷물 스프레이 에어로졸이 기후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인은 에어로졸의 크기와 거기에 포함된 화학물질 종류이다. 에어로졸에 든 유기물질로는 지방산, 단당류, 다당류 등이 있다. 이런 화학물질의 차이가 기후에 다른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에어로졸의 화학성분 변화가 바닷물에 있는 식물플랑크톤과 박테리아 군집의 증감과 일치한다. 식물플랑크톤이 기후를 바꿀 수도 있다.
처음 현미경으로 식물플랑크톤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보이지 않던 존재가 눈앞에 보이는 것 자체가 신기했다. 그 작은 존재에 의존해 생명이 순환하고 거대한 동물이 생존한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아주 작은 생물이 어마어마한 규모로 지구 환경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나는 인간으로서의 내 모습을 돌아본다. 거기에는 형태와 모양, 크기에 따라 존재의 중요성을 나누는 편협한 내가 있었다. 생명의 순환은 눈에 보이지 않는 작은 움직임에서부터 시작되어 점점 더 큰 운동으로 연결된다. 식물플랑크톤이 빛을 합성해 광합성을 하고, 광합성을 할 수 없는 동물에게 먹히는 사이 태양 빛은 끝없이 다른 방식으로 에너지가 전환(轉換)되고 교환(交換)된다.
현미경이 발명되고 오랜 시간이 지났고, 인류는 현미경으로만 볼 수 있는 존재가 있다는 것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인류는 아직도 나처럼 보이지 않는 존재의 실재를 믿는 것이 어렵다. 너무나 익숙한 것만 보고 사는 우리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생각을 일으키기 쉽지 않다. 그래서 헬렌 체르스키가 말하듯이 우리는 자신이 무엇과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지 끊임없이 스스로 물으며 관계의 범위를 넓혀 가야 한다.
바다라는 거대한 블루 머신을 움직이게 하는 힘은 하나의 공식과 사진으로 정의할 수 없다. 지구 생태계는 수많은 보이지 않는 존재들의 상호작용으로 움직인다. 생명의 크기는 한 개의 자로 측정할 수 없다. 작고 보잘것없는 플랑크톤의 생명 크기는 개체 수가 많아서이기도 하지만 플랑크톤이 맺는 관계의 크기가 너무나 거대해서 측정 불가하다.
참고자료
헬렌 체르스키, 『블루 머신』, 김주의 옮김, 남성현 감수, 쌤앤파커스
https://naver.me/G1sKOMp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