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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양 인류학


[물과 인류 에세이] 바다 인류, 배와 살다

작성자
기헌
작성일
2025-05-12 22:59
조회
60

   인류는 오랫동안 바다의 영향 아래 살아왔다. 풍부한 해양 생태 자원을 통해 필수적인 영양가를 공급받았다. 사람들은 사는 곳에서 삶을 이어가기 어렵다는 판단이 서면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다른 거주지를 향해 이동했다. 바다 사람들은 정착한 곳에서도 그냥 머무르는 법은 없었다. 연안을 따라 항해하며 이웃과 교류했고 시간이 지나 먼 타국의 사람들과도 물건을 주고받았다. 바다로 나아갈 일이 많아진 만큼, 배는 상황에 맞게 끊임없이 변신해 왔다. 나는 《해양 인류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배들이 물에 뜨고, 파도를 타고, 바람을 이용하는 항해의 기본 조건을 충족하면서도, 사람들이 사는 환경과 필요에 따라 조금씩 다른 형태로 진화해 왔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배의 모습을 살펴보다 보면, 그 배를 몰았던 항해자들, 돌아올 배를 기다리던 사람들, 그리고 배가 드나들던 바다와 연안의 풍경까지도 자연스레 떠오른다. 인류의 다양한 삶을 반영한 가지각색의 배는 그야말로 최고의 발명품이 아닐까 생각했다.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은 사람들에게 항해는 생존을 위한 기술이었고, 배는 인생의 동반자였다. 생존을 위한 여정은 배와 함께 계속되었다. 

  그렇다면 인류가 배를 타고 항해했던 구체적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어째서 이런 다양한 모습의 배들이 탄생하게 되었을까. 나는 『바다 인류』(주경철, 휴머니스트), 『인류의 대항해』(브라이언 페이건, 미지북스)를 읽으면서 인류가 바다로 나아간 것이 모험심이 넘치는 열정으로 미지를 향해 떠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거듭된 항해를 통해 축적된 경험은 지식으로 쌓였고, 그 지식은 더 안정적이고 멀리 나아갈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예를 들어, 폴리네시아에서는 훌륭한 항해자가 되기 위해 어린 시절부터 별자리를 읽는 법을 배우며 자랐다. 바다를 이해하고 준비된 이들이 항해자가 되었고, 그들은 자신이 만든 배를 타고 목적지를 향해 나아갔다.

인류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는 바다에서의 삶을 통해 ‘운송’, ‘상업’, ‘교역’, ‘전쟁’, ‘정복’과 같은 다양한 형태로 구체화되었고, 그 모든 여정은 배와 함께였다.

  나는 변화를 거듭한 배의 역사에서 가장 의미 있는 지점을 바람을 이용한 돛의 출현이라고 생각한다. 누군가는 정확하고 신뢰도 높은 증기선의 발명(1760년대)이라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보기에, 이집트 나일강에서 처음 돛을 사용한 배를 기원전 약 3000년으로 추정하고 있고, 1890년대 클리퍼를 범선의 쇠퇴로 본다면, 인류 항해의 역사에서 약 5000년 가까이 명맥을 유지하며 저마다의 삶의 방식으로 다양한 모습을 만든 범선이야말로 인류에게 가지는 의미는 크다고 생각한다. 배는 어느날 갑자기 모습을 단번에 바꾸지 않았다. 노를 저으며 나아가던 갤리선이 바로 노를 버리고 돛을 단 것이 아니고, 바람을 이용하는 범선에서 바로 증기선으로 갈아탄 것도 아니다. 인류는 마주한 환경과 조건에 따라 점진적으로 변화를 시도하며 배의 형태를 바꾸어 왔다.

  최초의 배가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물 위로 떠다니는 통나무를 붙잡고 이동했다. 나는 수영 실력이 없기에 바다에 그냥 들어가면 거의 죽음이다. 아마도 처음 바다에 들어간 인류도 여러 번의 위기를 겪으며 떠다니는 것에 의지해야 살아남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래서 떠다니는 통나무라도 잡아야 목숨을 건질 수 있다는 것을 터득했을 것이다. 오늘날 바다에서 구명조끼를 입고 튜브에 의지하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실제로 튜브처럼 동물 가죽을 이용한 사례도 있다. 이라크에서는 염소를 키우던 목동들이 염소 가죽주머니를 풍선처럼 만들어 끌어안고 강을 건넜다고 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람들은 물에 뜨는 것 말고도, 몸이 물에 젖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뗏목을 만들게 되었다. 뗏목은 기존에 사용하던 도구와 달리 여러 사람이 탈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다.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 상류지역은 바위투성이에 유속이 빨라 뗏목이 부서지는 일이 자주 발생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곧 조건에 맞춤한 배를 만들었다. 그들은 배가 부서지는 것을 고려해 동물의 가죽 주머니를 뗏목에 아래에 붙여 배를 수면 위로 뜨게 고안했다. 배는 환경에 맞춰 적응해 왔으며, 어쩌면 기록되지 않은 더 많은 형태의 배들이 존재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하게 된다.




항해자들이 바람을 타기까지

  지구상에서 가장 이른 시기에 해양 사회를 발전시킨 사람들은 누구였을까? 『인류의 대항해』에서 브라이언 페이건은 약 9000년 전 알류산 열도를 따라 항해한 이들을 첫 주자로 꼽는다. 알래스카 남부에서 캄차카반도 방향으로 뻗은 이 열도는 북극에 가까운 험준한 지형으로, 얼핏 보기에 생존이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해류 덕분에 이곳은 상대적으로 온화한 기후를 유지하며, 바다사자, 고래, 대구, 넙치 등 풍부한 해양 생물 자원을 품고 있다. 이러한 환경 덕분에 인류는 이곳에서 세대를 이어가며 살아왔다. 섬 사람들은 배를 만들고 바다를 오가며 삶을 꾸려나갔다.

알류산에는 나무가 자라지 않아, 이들은 바다사자 가죽과 해안에 떠밀려온 유목으로 바이다르카(Baidaarka)라는 가죽배를 만들었다. 유목을 모아 뼈대를 만들고, 그 위에 바다사자 가죽을 느슨하게 덮어씌웠다. 이처럼 유연성을 갖춘 배는 부빙 충격에도 견딜 수 있었다. 바다사자는 이들에게 식량이자 배의 재료였고, 방수 의복과 도구의 재료가 되어주는 존재였다.

가죽배는 북극권의 또 다른 해양민족에게도 중요한 이동 수단이었다. 에스키모들이 사용한 우미악(umiak)은 바이다르카가 사냥용이라면, 평평한 바닥을 가진 우미악은 사람과 물자를 실어나르기 위한 운송용 배였다.




  그렇다면 신석기시대 나무가 많이 자라는 지역에서는 어떤 배를 사용했을까?

  북아메리카 서쪽 해안으로 가보자. 선형적인 해양 세계를 이룬 이곳은 해안가에 바위가 많고, 큰 너울이 일어난다. 이곳은 기원전 6000년 삼나무, 미송, 미국솔송나무, 가문비나무가 띠를 이루며 수 킬로미터 이어져 울창한 숲을 이루었다. 통나무 카누를 만들기에 적합한 결이 곧은 목재들이 풍부했다. 기원전 5000년 후 해안을 따라 형성된 크고 작은 공동체는 시장을 형성했고, 연안은 점점 마을과 마을이 연결되어 세상의 이야기를 주고받는 거리가 되었고, 친구를 만나고 원수들은 싸우고 결혼과 같은 사회적 교류가 이루어지는 공공장소로 변모했다. 

  삶의 일부가 된 교역에서 배는 꼭 필요한 수단이었다. 그들이 사용했던 통나무배는 불에 달군 돌덩어리로 통나무 속을 깎고, 수분을 공급하여 부드럽게 만들고, 돔발상어 기름으로 마무리한 후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했다. 장식은 곧 물과 관련된 전설적 인물이나 정령을 의미했다. 늘 보이지 않는 영(靈)들과 함께 이루어지는 항해에서 끊임없이 신과 자연의 언어를 읽고 해독하는 일은 항해자들의 일상이었다. 

  이러한 항해의 흔적은 한반도에서도 발견된다. 지난해 인문세 답사로 다녀온 《국립김해박물관》에서 우리는 신석기 통나무배를 보았다. 이 배는 동아시아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통나무배로 창녕 비봉리에서 발견되었다. 기원전 600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배는 길이는 5.82m이로 참나무를 재료로하여 여느 통나무배와 같이 배 안쪽을 파내어 만들었다고 했다. 조금 더 복잡한 방식으로 만들어진 꿰멘 보트는 참나무 몸통을 쪼개어 널을 만들고 널들을 주목 줄기로 천에 바느질하듯 꿰어 붙였다. 나무판을 나무줄기로 잇는다니 왠지 어느 틈새로 물이 들어올 것만 같았는데 사진을 보고 있으니 기술력이 상당해보였다. 이 배를 만든 사람들은 밀랍과 동물 지방, 이끼 등으로 틈새를 메웠다고 한다. 배는 많은 물건을 적재하고 좀더 빠른 속도로 항해를 나갈 수 있었다. 『바다 인류』의 저자 주경철은 이렇게 복잡한 구조의 배가 단순한 실용을 넘어 의식적이거나 과시적인 목적을 띠었을 가능성도 제시한다.

       


  고대 근동에서는 나무 대신 갈대가 주로 사용되었다. 나일강, 유프라테스강, 티그리스강 유역은 갈대와 파피루스가 풍부해 쉽게 가공할 수 있었다. 특히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은 바람과 물결이 모두 한쪽 방향으로 흘러, 배를 타고 하류로는 쉽게 이동할 수 있었지만, 상류로 올라가는 데는 어려움이 많았다.

  초기에는 갈대를 엮어 만든 가볍고 작은 배나 뗏목이 사용되었고, 쿠파(quffa)라 불리는 둥근 바구니 모양의 배도 등장했다. 이 배는 갈대를 둥글게 엮고 나무로 늑골재를 댄 다음 역청(bitumen, 천연 아스팔트) 같은 물질로 방수 처리를 했다. 배를 타고 강을 내려가, 하류에 도착하면 배를 해체한 후 그곳에서 재료를 팔았다. 하류에서 할 일을 마치면 배를 타고 함께 내려갔던 나귀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놀랍게도 이 배는 기원전 3000년부터 20세기까지도 사용되었다고 한다.


바람과 함께 나아가다

  아직 돛은 출현하기 전이었지만, 바람을 이용해 강 상류로 오르던 배가 있었다. 나일강은 메소포타미아처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기는 하지만 물의 흐름과 반대 방향이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강을 내려갈 때는 물의 흐름에, 강을 오를 때는 바람의 흐름에 배를 맡겼다. 이집트 뗏목은 주변을 연결하는 편리한 나일강 덕분에 크고 작은 다양한 형태의 모습으로 변신해갔다. 곧 사람들은 배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기 위해 노를 만들고 배 끝에 키 구실을 하는 노들을 장착했다. 그리고 이곳에서 역사상 처음으로 가장 중요한 항해 장치인 ‘돛’이 탄생했다. 


  항해자들에게 바람을 타는 일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아마도 힘을 덜 들이면서 평소와 다른 속도감에 느끼거나 어떤 경우는 힘을 전혀 들이지 않고도 바람이 목적지까지 데려다주기도 했을 것이다. 최초 이집트 돛의 형태는 종려나무 이파리를 세운 것으로 시작되었고 기원전 3500년에는 갈대나 아마포를 엮은 네모난 가로돛이 만들어졌다. 


  기원전 1500년경, 하트셉수트의 사원이 있는 데이르 엘바흐리의 부조 ‘펀트로 가는 항해’에서는 이집트 선박의 항해 기술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확인할 수 있다. 두 개의 돛대와 넓게 펼쳐진 돛을 단 배에 사람들이 노를 젓고 순풍을 타며 나무, 향료, 동물, 금속 등 귀중한 물건을 싣고 푼트로 항해하는 장면은, 단순한 교역을 넘어 왕권의 상징성을 보여준다.

이집트에서 발전한 항해 기술은 지중해로 퍼져나가며 페니키아인의 해상 무역 제국 형성에 기여했고, 이후 그리스 문명을 거쳐 기원전 700년경 이집트식 갤리선의 출현으로 이어졌다.

  지중해에서의 무역로나 해상 패권 경쟁에서, 돛과 노를 동시에 사용할 수 있는 갤리선은 매우 유용한 선박이었다. 이 선박의 특징은 적의 측면을 들이받아 침몰시키는 충각(衝角)이었으며, 충각에는 날카로운 두 눈이 그려져 있어 적에게는 위협을, 아군에게는 승리를 기원하는 상징이었다.

  기원전 480년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는 삼단 갤리선 ‘트리에레스’를 이용해 페르시아 함대를 좁은 해협으로 유인한 뒤 대승을 거두었다. 또, 기원전 31년 액티움 해전에서는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이집트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를 물리치며 로마 제국이 수립되는 계기를 마련했다. 이때 사용된 갤리선은 10명이 동시에 긴 노를 저어 나아가는 전투용 선박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갤리선은 점점 대형화되어, 16세기 신성 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이 맞붙은 레판토 해전에서는 수백 명의 병력과 수백 명의 노꾼이 탑승한 거대한 전함으로 발전했다. 이때는 다수의 마스트와 삼각돛까지 갖추고 있었다.



  『바다 인류』에 따르면 조선 디자인은 지역마다 대표하는 선박이 있고, 지극히 보수적이고 매우 느리게 진화하는 특징을 가졌다고 한다. 앞서 말한 갤리선이 지중해의 대표 선박이라면 인도양에서는 다우선이다. 다우선은 높은 마스트와 거대한 삼각돛(엄밀히 말하면 사각형 범포)을 사용하고, 못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선체를 섬유, 밧줄, 가죽 끈 등으로 묶는 방식을 사용한다.    1998년 인도네시아 앞바다에서 발견된 ‘벨리퉁 호’는 바로 이런 다우선의 구조를 보여준다. 이 배는 9세기 무렵 중국과 자바를 잇는 항로에서 침몰한 것으로, 이슬람권과 중국 사이의 교역을 증명하는 귀중한 유물이다. 당시 중국은 유교적 문화의 영향으로 적극적으로 해외로 나가기보다는, 외국 상인들이 중국을 찾아와 무역하는 방식을 선호했다.


삶을 투영하는 배


  8세기 북해와 발트해에는 바다를 삶의 터전으로 삼는 사람들, 바이킹이 있었다. 침략, 폭력만 떠오르는 바이킹에 대해 나는 조금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았다. 초기 바이킹의 모습은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 11세기 중반까지 약 300년에 이르는 바이킹 시대에 그들의 모습은 타국과 교류하고 힘을 키워나갔다. 비잔틴 제국에게 모피와 노예를 주고 대가로 비단, 포도주, 향신료, 보석 등을 받았다. 일부는 이웃 지역으로 재수출했다. 바다 민족이지만 육상 실크로드를 따라 카라반 상인과 거래하여 중국 비단을 비롯한 동양 상품도 수입했다. 그들은 기독교를 빠르게 수용하여 기독교 왕국의 기초를 놓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떤 배를 타고 항해를 나섰을까?

  노르웨이의 곡스타드에서 건져 올린 배가 대표적이다. 길이 23.80미터, 폭 5.1미터 크기에 110제곱미터의 돛을 달고 32명이 노를 젓는 이 배는 전투, 교역, 사람과 상품 이송에 두루 사용했다. 배의 구조상 폭이 넓고, 바닥이 평평하고, 선체가 안정적이어서 북대서양을 횡단할 수 있을 만큼 원거리 탐험과 교역이 가능했음을 유추할 수 있다. 곡스타드에서 발견된 배는 왕족의 것으로 추정되는 무덤에서 유골과 함께 발견되었다. 그들에게 배가 단순히 운송용 수단이라고만 생각할 수 없는 지점이다. 평생 배 위에서 살던 사람들에게 함께 묻히는 배는 현실과 저승을 연결하는 매개체이자 저승 항해를 위한 함선이 아니었을까. 

  바이킹의 폭풍이 가라앉은 후 북유럽 지역은 어업과 해상 교역이 순조롭게 발달했다. 12세기 이전부터 북부 독일 도시 상인들이 북해의 오래된 해상 교역로들을 활성화시키며 한자 동맹(Hansa, Hanseatic League)이라는 상호 협력 상인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한자 동맹은 동유럽과 서유럽 간 교역을 중개하며 러시아의 모피, 발트 지역의 호박, 스웨덴의 구리 같은 고가품에다가 밀과 호밀 등의 곡물, 맥주 임산물 등이 서쪽으로 이동하고 대신 작물과 소금 등이 동쪽으로 옮겨갔다. 특기할 상품은 청어로 늦여름에 알을 낳으러 북해와 발트해로 몰려오는 청어는 수가 엄청나고 크기도 컸다. 청어잡이는 가을 한 철에 이루어지므로 이 시기에 모자라는 인력을 보충하기 위해 많은 노동자를 고용했다. 14세기에는 한 철에 약 4만 명이 몰려와서 청어 시즌에는 도시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바다 인류』에서는 한자 도시들의 성공 요인 중 하나를 우수한 선박으로 꼽는다. 발트해에서 사용된 코그선은 그 지역의 얕은 바다에 최적화한 선박으로, 바닥이 평평하고 적재량이 큰 우수한 선박이다. 물고기의 꼬리지느러미와 같은 중앙타가 발명되어 선박 조종에 혁신적인 개선을 했다. 또 다른 성공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에 따르면 한자 동맹에서 스칸디나비아어부가 잡은 청어는 독일 상인이 판매했는데 만약 속임수를 쓰면 파산을 당할 정도로 양질의 관리가 철저했다는 점을 생각해 볼 수 있을 것 같다. 동맹의 규약과 이익을 공유하되 신뢰를 깨뜨리지 않는 방식으로 상거래를 주도했다. 계량이나 통화 등을 표준화해서 거래 비용을 절감시키고 분쟁 발생을 최소화하였다. 이 믿음직한 네트워크가 쇠퇴한 것은 청어떼가 다른 바다로 이동하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이 식민지 교역을 열어 유럽 교역의 큰 흐름이 바뀌었기 때문이다. 

  1492년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서인도 제도 첫 항해는 대항해시대의 상징적인 사건 중 하나다. 그는 종교적 신념과 유사 과학에 근거한 낙관적 견해 그리고 신분 상승의 꿈을 안고 아시아 항해를 제일 먼저 완수하려는 원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 계획을 도와줄 스폰서는 국가 수준이 아니면 불가능하다. 가까스로 에스파냐의 지원으로 인도로 통하는 지름길을 찾겠다며 항해를 시작했다. 그의 항해가 유럽인에게 알려지지 않은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함을 보여주었지만, 원하는 자원을 얻기 위해 과도한 폭력과 원주민을 대량 학살, 노예 무역의 기틀을 만들기도 했다. 그의 항해는 4차까지 진행되었지만 사업적으로는 실패하고 목숨도 겨우 구할 수 있었다. 



  콜럼버스 함대는 2척의 카락선과 3척의 캐러벨로 이루어진 5척의 함대로 출발했으나 나중에 1척은 배신을 하고 이후 1척은 이를 막다가 침몰하여 최종적으로는 3척(니냐, 핀타, 산타 마리아호)이 남았다. 그중에서도 산타 마리아호는 콜럼버스가 직접 탑승한 기함으로서 18~21미터 였으며, 승무원은 약 40명이었다고 한다. 마스트의 수는 총 3개였으며, 1492년 12월 24일에 히스파니올라 섬에서 좌초하여 해체된 후, 남은 목재는 요새의 건설에 쓰였다. 이 배의 선원들은 긴 항해로 인한 피로와 식량 부족에 시달리며 절박한 생존 문제와 지휘권 갈등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신대륙을 찾아 가열차게 나섰지만 지연되는 항해와 불신이 내부의 분위기를 어둡게 만들었을지도 모른다. 


  조금 다르게 위엄을 제대로 보여주는 중국 선박이 있다. 『바다 인류』에 등장한 배들 가운데 권위로 가장 인상적인 배는 단연 15세기 정화의 함선이라고 생각한다. 

 명나라 환관 정화는 군사적 위업을 쌓고 오늘날 장관격인 태감(太監)의 지위를 얻었다. 그는 겨울 몬순 계절풍을 타고 남해를 돌아 말라카해협, 뱅골만, 스리랑카, 인도, 페르시아만까지 항해하고 여름 몬순을 타고 중국으로 돌아왔다. 그의 원정대는 역사상 유례없는 거대한 해상 사업단이었다. 200척의 선박에 27,000명의 선원이 동원되었고, 적재량도 엄청났는데 실린 품목은 도자기, 비단, 금속 공예품, 차, 약재, 동물, 무기, 갑옷, 곡물, 물, 술 등이었다. 제일 큰 선박에 실은 무게만 1,500~2,500톤으로 추정한다. 이 배는 4층 구조로 사이즈는 151.8 × 61.6미터에 9개의 마스트와 비단으로 만든12장의 돛, 23문의 대포까지 장착된 엄청난 거선이었다. 길이만 따진다면 50층 이상의 아파트와 견줄 수 있는 정도이니 배 안에 하나의 마을이 꾸려졌다고 해도 무방할 것 같다. 정화는 목적지에 닿으면 황제의 조서를 낭독하고 조공을 요구하면서 가져온 선물을 준 다음 명나라에 복속하기를 요청했다. 정화의 원정대는 명나라가 세계의 중심임을 알리고 위엄을 보여주기 위한 국가 프로젝트의 일환이었다.


인류와 배

  배에는 바다 사람들의 삶이 깃들어 있다. 기원전 2000년경 이집트인의 무덤에서 출토된 목제 선박 모형은 단순한 장난감이 아니다. 모형으로 실제 장례가 배에서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죽음 이후에도 삶이 이어진다고 믿었던 그들은 망자와 함께 모형을 묻음으로써 풍요, 재생, 순환의 상징인 나일강을 따라 저승으로 흘러가고 다시 돌아오기를 기원했다. 

  사람들은 어업, 상업, 교역, 정복, 의례 등 원하는 삶을 배에 담았다. 그때그때 변화하는 배를 관찰하는 일은 세상에 가지각색의 삶이 있음을 생각해보게 했다.



◎ 참고 자료와 사이트

『바다 인류』(주경철, 휴머니스트출판그룹)

『인류의 대항해』(브라이언 페이건, 미지북스)

『고대의 배와 항해 이야기』(라이오넬 카슨, 가람기획)

루브르 박물관 https://www.louvre.fr/en/explore/visitor-trails/journey-along-the-nile/the-nile-source-of-life

해양 역사 팟캐스트 https://maritimehistorypodcast.com/ep-009-new-kingdom-maritime-war-maritime-peace/

위키피디아 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Model_of_a_greek_trireme.jpg

Timothy S. Y. Lam 인류학 박물관 

https://lammuseum.wfu.edu/exhibits/virtual/stoneware-on-the-silk-roads-ceramics-from-the-changsha-kilns/belitung-shipwreck/?utm_source=chatgpt.com

곡스타드배 https://sights.seindal.dk/norway/oslo/viking-ship-museum/gokstad-ship/

한자동맹 코그선 https://memphislibrary.contentdm.oclc.org/digital/collection/p15342coll10/id/1012/

https://www.britishmuseum.org/collection/object/Y_EA9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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