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 에세이] 먹어서 연결되다
기술인류학 에세이(4) / 먹는다 / 2024.12.22. / 진진
먹어서 연결되다
우리는 매일 무언가를 먹는다. 먹지 않고는 살아가기가 어렵다. 물을 마셔야 체내에 수분을 공급할 수 있고 음식을 먹어야 에너지를 주입할 수 있다. 이렇게 먹는 일은 내 생명을 유지하거 나를 살게 하기 위한 일이다. 나 또한 먹는 일을 내 입으로, 몸으로 먹거리를 넣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먹는다는 행위를 이렇게 생각하며 나는 먹거리를 고르고 음식을 먹었다. 내 입맛에 맞는 것을 골라 먹고, 배가 불러 도저히 못먹겠다 싶으면 음식을 남겼고, 내 몸에 좋은 식재료만 골라서 먹으려고 했다. 내 몸에 들어와 탈이 나느니 버리는 게 더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일까. 내 입을 즐겁게 해주고 배를 채워줄 음식들은 언젠가부터 냉장고와 찬장에 차곡차곡 쌓여갔고, 내 기억에서 잊혀져 유통기간을 넘긴 음식들은 어느 날 쓰레기통으로 가득 담겨져 버려지기를 반복했다. 버려지는 음식들에 불편한 마음이 계속되던 어느 날, 기술인류학 세미나에서 『전쟁과 농업』을 읽었다. 이 책의 저자 후지하라 다쓰시는 먹는 일을 입으로 음식을 넣는 일로만 보지 말고 항문으로 배설하는 일까지 확장해서 생각해보자고 했다. 먹는 일이 싸는 데까지 이어지는 일이라니, 나는 먹는 일에서 맞닥뜨렸던 문제를 풀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의하면 식사란 나를 살리는 일뿐만이 아니라 자연의 생명을 살리는 일이다. 내가 먹어서 배설하는 똥과 오줌이 자연으로 돌아가 그들의 먹거리가 된다는 것이다. 이때 내 몸은 먹거리가 다른 형태로 자연에 놓이게 하는 관으로서 역할을 한다. 내 몸이 자연 생태계를 위한 관이라니, 먹는 일을 내 몸이라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고민해서는 좋은 먹음이 될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오직 나를 위해 먹을 것과 아닌 것을 취사선택했던 일련의 행동들이 왜 문제가 될 수밖에 없었는지, 후지하라의 먹는다는 재정의를 만나고 새삼 깨닫게 된다.
자연의 식탁을 차리는 일
후지하라는 어느 날 산오징어를 먹으며, 과연 그 오징어가 언제 사체가 되는 것일까 생각했다. 그는 그 경험으로부터 먹는 행위가 단순히 음식을 입에 넣기만 하면 끝나는 일일까 하고 질문을 던지게 된다. 그를 따라 생각을 이어가보니 실제로 내 입으로 들어간 음식은 식도를 통과해 위, 십이지장, 대장의 대사과정을 거쳐 항문을 통해 밖으로 나온다. 이렇게 보면 먹는 일은 내 입안으로 들어가 내 몸 안에서 끝나는 일이 아니다. 내가 먹는 것들은 내 몸을 통과해 세상으로 다시 나간다. 그들은 내 몸의 관을 통해 세상을 여행한다.
지금은 똥차를 보기도 내가 싼 똥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기도 어려워 머릿속에 그려보기 어렵지만, 나의 배설물은 하수관을 통해 흘러가 정화조 처리를 거쳐 자연으로 흘러간다. 자연의 벌레나 미생물들은 내 몸을 통과한 배설물을 먹고 자란다. 이들이 다시 식물과 동물의 먹이가 되는 식으로 자연 생태계의 연쇄를 거쳐, 그 생명들은 다시 내 식탁 위에 놓이게 된다. 내가 싼 오줌과 똥이 언젠가 내가 다시 먹을 음식이 되어 돌아오는 것이다. 돌고 도는 연결고리 속에 일부분으로 내 몸의 관들이 자연의 생명들을 연결시켜준다. 먹는다는 일은 이렇게 중단이 없이 생명과 생명을, 생태계 전체를 연결시켜주며 자연에 먹거리를 제공한다.
내가 먹는 일이 자연의 밥상을 차리는 일이라니 내가 먹거리를 고를 때 내 몸에 들어오는 것만 생각해서는 자연에게 풍성한 먹거리를 제공해줄 수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잘 먹어서 자연의 여러 생명들과 이곳저곳을 잘 연결시켜줘야 자연도 골고루 먹을 수 있다. 내 입맛만 생각해서 골라서 먹고, 내 배가 안 고프다고 굶거나 배부르다고 음식을 남기거나 버리면 자연은 먹을 수 없다. 건강을 생각해서 먹는 것도 마찬가지다. 내 몸에 좋은 것만 골라서 먹는 것도 자연의 입장에서는 문제가 될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극단적 채식과 육식과 같은 요즈음의 식사에 대한 태도도 다시 생각해볼 수 있다.
확장되는 나
후지하라의 먹는다는 정의를 통해 나는 내 몸이 막혀 있지 않고 위아래가 뚫려 있음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나는 입과 항문을 통해 매일 외부로부터 생명을 받아들이고 내뱉는다. 나는 먹는 행위를 통해 생태계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받기도 하며 끊임없이 교류하고,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 또한 내 몸을 통해 다른 존재들과 끊임없이 연결되고 교류한다. 나는 세상의 많은 생명들과 연결되기 위해, 그리고 나를 통해 그들을 연결시키기 위해 먹고 있는 것이다.
먹는다는 걸 외부와의 연결로 보게 되면 ‘나’에 대한 생각도 달라지게 된다.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나일까? 나를 ‘내’ 신체로 끊어서 생각할 수 있을까? 먹는 행위를 통해 나는 다른 모습이지만 자연의 일부로 존재하게 된다. 반대로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 또한 다른 모습으로 내 안에 존재하고 있다. 즉 자연 안에 나 아닌 것이 없고 내 안에 자연이 아닌 것이 없다. 외부로부터 경계를 치고 있다고 생각했던 내가 뚫려 있는 존재임을 알게 되자, 협소하고 갇혀 있던 내가 광대하고 풍요로워진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먹는 일이 나를 살리는 일에서 끝나지 않고 세상의 생명들을 연결하는 일이 된다니 감격스럽기까지 하다.
나와 자연의 생명들이 연결되어 있으니 나만 잘 먹는다고 될 일도 아니다. 나의 먹음뿐만 아니라 내 옆 사람의 먹음도 내게 중요하게 된다. 그가 먹고 싼 것 또한 내 식탁에 올려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후지하라는 지금의 먹거리 체계를 비판한다. 식품회사는 사람들이 구입만 해주면 그만, 그것이 사람들의 입으로 들어가든 버려지든, 그 후에 어떤 피해가 오든지에는 관심이 없다. 오로지 판매에만 혈안이 되어 맹렬히 내달리게 한다. 그들이 식품을 생산해 파는 일을 돈을 버는 일로만 생각하는 게, 내가 먹는 일을 내 몸을 불리는 일로만 바라보고 그것이 무엇과 연결되어 있는지 보지 못했던 나의 협소함과 관련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품과 생명의 위계
후지하라가 먹는 행위를 이렇게까지 확장하는 것은 왜일까? 그는 먹거리가 상품이 돼버린 현대사회를 비판하면서 먹거리란 한때 자연의 생명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한다. 우리의 먹는 현장에서는 먹거리가 생명이라는 감각은 찾아보기 힘들다. 돼지는 잘 손질되어 삼겹살, 목살, 항정살, 등갈비와 같은 식으로 진열대 위에 놓여지고, 닭은 후라이드, 양념통닭, 전기구이와 같이 조리된 상태로 식탁 위에 올려진다. 생명이라는 감각은 모두 제거된 채 상품으로 둔갑된 먹거리를 우리는 소비하고 있을 뿐이다.
기술인류학에서 함께 읽었던 또 다른 책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E.F. 슈마허는 우주의 존재들에는 위계가 있다고 말한다. 인간은 세계를 존재의 수준과 위계 안에서 이해하고 그 안에 자신의 자리를 위치 지을 수 있어야 한다. 그 자리에 의해 인간은 더 고귀해질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상품인 삼겹살과 돼지는 존재의 수준에서 같은 위계에 있을 수 없다. 인간 또한 생명인 만큼 상품과 같은 위치에 있을 수 없고 동물인 돼지보다도 인간은 더 상위에 있다. 인간이 다른 존재와 달리 고귀할 수 있는 데는 이 동물과 상품을 어떤 수준에서 대하고 다루느냐에 있다.
먹는다는 행위가 나에 국한된 일이 아님을, 내가 먹는 것이 나를 통과해 자연으로 나가서 자연의 수많은 생명들을 연결하고 있음을 생각하며 먹을 때 나는 좀 더 고귀한 인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