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모던한 바다 엄마의 동화 읽기] 페티시즘, 사물과 우정 맺기
[모던한 바다 엄마의 동화 읽기]
‘바다 엄마’ 남연아 입니다^^ 현대 여성으로서 가장 피하고 싶었던 건 바로 엄마 되기였습니다. 도시에서 나고 자라면서 합리성을 계산하며 살았고, 현대 시대의 육아는 아무리 계산해도 마이너스가 나오는 듯 보였습니다. 모든 인류는 엄마의 품속에서 태어났고, 육아는 인류가 수십만 년간 해온 일입니다. 그런데 유독 현대 시대에 육아는 더 힘들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육아는 작은 존재를 돌보고 또 성장을 지켜보며 부모와 아이 모두 함께 진화하는 생명의 활동입니다. ‘모던한 바다 엄마’는 돌봄과 성장의 근원을 찾으러 동화의 세계로 들어갑니다. 동화의 배경은 숲입니다. 숲속에서 다양한 생명이 우글우글 가득 차 있습니다. 숲속의 모든 것(인간, 동물, 식물, 사물, 바람, 돌, 눈 등등)은 각자 말을 합니다. 계절에 따라 각자의 존재 위치가 달라지며 숲의 질서를 따라갑니다. 동화는 도시의 계산을 멈추고, 숲에서 한눈을 팔며 이런저런 목소리를 듣습니다. 숲에서 육아는 어떻게 펼쳐질까요?
페티시즘, 사물과 우정 맺기
에드워드 타일러는 ‘만물에 영이 있다’라는 애니미즘 이론을 정립했습니다. 만물은 모든 물질을 의미합니다. 여기에는 바로 사물도 포함되는데요. 사물에도 영이 있다는 ‘페티시즘’이 파생되었습니다. 페티시즘은 18세기 샤를 드 브로스가 아프리카인들의 사물 숭배에 인상을 받아 만든 이론입니다. 아프리카뿐만 아니라 전 세계 다양한 문화권에서 비슷한 현상을 발견했고, 그 이후 페티시즘 이론은 널리 퍼졌습니다. (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아카넷, 311쪽)
타일러는 페티시즘을 “신기한 것에 대한 갈망, 자연의 법칙과 균일성의 지루한 느낌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에드워드 버넷 타일러, 『원시문화』, 아카넷, 312쪽)이라고 해석합니다. 원시 부족들은 치아, 발톱, 뿌리와 말린 씨앗, 조가비, 돌 등등 다양한 물체들을 늘 몸에 지니고 다녔다고 합니다. 또한, 더 문명화된 지역에서도 물건을 수집합니다. 오스탸크족은 돌들을 주워 숭배하고, 중국인들은 거북 등딱지를 모았고, 영국인은 우표나 지팡이를 수집해 왔다고 합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왕들의 위패를 모시는데, 서울에 종묘가 바로 위패를 모시는 사당이죠. 이런 물체들을 숭배하고 수집하는 이유는 행운을 위한 상징적 부적으로 해석될 수 있습니다. 아름다운 형태와 희소성이 있는 물체들을 수집 자체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면에서 주목할 만한 물체들을 수집하는 건 인간의 본성이라는 것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상품에 끌려다니는 현대인
현대인은 페티시즘을 특정한 물건에 성적 흥분을 느낀다는 부정적인 의미로 인식합니다. 페티시즘을 ‘사물에도 영이 있다’라는 정의로 다시 돌아가면 사물의 관계를 다양하게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영이론에 따라 상품, 물건, 사물 이렇게 세 가지 영역으로 나눠보려고 합니다. 동화 인류학에서는 물건과 상품의 차이를 논의했습니다. 물건에는 영이 있고, 상품에는 가격이 있습니다. 내가 쥐고 있는 컵에 나의 영이 들어갈 수도 있고, 나에 컵의 영이 들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컵과 나는 존재론적으로 동등합니다. 하지만, 상품은 가격표가 붙어있고 돈으로 교환됩니다. 가격은 공급과 수요의 그래프에 따라 가격이 올라가기도 하고 내려가기도 합니다. 영은 빠져있고, 내가 이 상품을 소유해서 내 물건으로 만드는 것이 목표입니다. 타일러가 말한 대로 원시인이나 현대인이나 물건을 통해 지루함을 벗어나려는 노력은 똑같지만, 물건은 영이 들고나와서 동등하고, 상품은 누군가의 소유로 종속적입니다.
현대 사회에서 소비자가 물건의 주인이 된다고 생각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페티시즘 관점에서 사람들은 물건의 영에 불려 다닙니다. 한정판이나 명품 구매를 위해 오픈런을 하기도 하고, 앱에 들어가면 갖가지 광고를 자기도 모르게 누르고 있습니다. 심지어 별 필요한 것이 없어도 다이소에 들어갑니다. 필요해서 산다고 합리화하지만, 쇼핑백을 들 때 택배 상자를 뜯을 때 순간적인 에너지를 받습니다. 하지만, 물건을 소유한 후 인간의 영이 물건으로 빨려 들어갑니다. 대부분 현대인은 물건을 가격에 따라 가치를 매깁니다. 어떤 사람은 차를 사람보다 더욱 아끼는데 물신주의로서 사물을 숭배하는 원시 부족과도 비슷한 모습입니다. 대부분의 물건은 집 어딘가 방치해 어디 갔는지도 모르는 물건들이 많습니다. 그 물건들에 인간의 영이 빼앗겨 기운이 달리고, 또 다른 영을 받기 위해 백화점, 팝업스토어, 다이소 등등 여기저기 떠돌아다닙니다.
가까이 존재한 애니미스트들
상품을 구매한 나의 손이 잠깐 닿은 물건이 되고 페티시즘을 한 단계 나아가 보면 서로의 영이 왔다 갔다 하는 사물로 변화합니다. 사물과 우정을 맺는 것이죠. 결혼 하고 이사를 하면서 크기가 맞지 않는 가구를 당근에 팔았습니다. 남편은 물건을 팔기 전에 물건에 인사하라고 했습니다. 저는 갑자기 인사를 하라고 해서 당황했는데요. 남편은 “우리랑 옆에서 같이 2년 동안 살았는데 잘 가라고 인사를 해야지.”라고 말했죠. 차분하고 이성적인 줄 알았던 남편이 이런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는 것을 처음 알고 놀랍기도 하고 웃기기도 했는데요. 그 이후 당근으로 사물을 팔 때마다 그동안 고마웠다고 인사합니다. 제 친구 중에는 자기 차를 “육뚱이”라고 이름을 붙이면서 매일 출퇴근할 때마다 육뚱이에게 나를 안전하게 데려달라고 해서 고맙다고 인사합니다. 애니미즘을 몰랐을 때는 순수하고 어린애 같은 면이 있다고 웃고 넘겼는데 그들은 물체에도 영을 보는 애니미스트들이었습니다.
저는 의류와 화장품 업계에서 마케팅 일을 하므로 가격의 합리성, 유용성, 심미성을 기준으로 상품을 평가했습니다. 일하기 위해 더 많은 상품을 봐야 했고, 상품들에 더욱 끌려다녀 많은 물건이 집에 쌓여져 있었습니다. 쇼핑한 후 내가 이걸 왜 샀지, 후회와 자책이 이어졌습니다. 또한 남들의 소비에서도 비합리성과 허영심이라고 가치판단을 했죠. 애니미즘을 알게 된 후 사물과 맺는 관계라고 바라보니 더욱 다양한 세상이 펼쳐졌습니다.
영빨 가득한 중고 장난감과 육아
당근으로 중고 물품을 팔기만 했지, 중고 물품을 사지는 않았습니다. 누가 썼던 걸 입는 게 꺼림칙했기 때문이죠. 육아하면서 이렇게 중고 물품을 적극적으로 구해본 건 처음이었습니다. 여기도 도시의 계산법이 들어갑니다. 짧게 쓰는데 돈 주고 사기 아깝기 때문이었죠. 중고 물품을 페티시즘으로 해석해 보면 어떤 영이 들어가 있는지 모르기 때문에 위험한 일이기도 하죠. 세미나 시간에 영빨약사님의 시어머님은 중고 물건을 싫어하고, 물건이 오면 화장실에 두셨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흥미로웠습니다. 현대인에는 중고 물건을 영보다는 어떤 바이러스가 묻어있을지 몰라 더러워 소독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바다의 장난감들은 대부분 친척 언니와 친구에게 물려받았습니다. 그중에서는 그들이 선물 받은 것도 있고, 어디서 왔는지 출처가 불분명한 것들도 있죠. 출처가 불분명하지만, 그 안에는 많은 아기의 영들이 묻어 있을 것입니다. 아기들은 애니미즘의 안내자입니다. 가장 영빨이 충만한 존재들이죠. 그렇기 때문에 중고 장난감은 공장에서 조립되어 마트에 전시된 새 장난감보다 훨씬 영이 강력할 것입니다.
중고 장난감을 보니 토이 스토리의 한 장면이 생각납니다. 버즈는 앤디의 특별한 장난감이고, 진짜 우주를 향해 날아갈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중 장난감들이 집밖에 나와 모험하는 중 마트에 우연히 들어갑니다. 장남감코너에서 수많은 버즈가 박스 안에 갇혀있는 것을 보고 놀라죠. 버즈는 수많은 상품 중 하나라는 것을 자각합니다.
바다에게 가장 영빨 가득한 사물은 바로 애착 담요입니다. 잘 때는 하얀색 극세사 담요를 왼손에 쥐고 오른쪽 엄지를 빨면서 잠에 듭니다. 빨래해야 해서 다른 담요를 주면 계속 주변을 두리번거리면서 그 이불을 찾으면서 웁니다. 결국 같은 담요를 샀고, 새 제품도 똑같이 반응할까 궁금했는데요. 택배를 뜯자마자 그 이불을 잡고 손가락을 빨고 있었습니다. 바다에게 편안한 영을 전하는 직물인가 봅니다.
바다는 인형들에게 큰 관심은 없습니다. 인형들은 바다의 꿈을 지켜주는 수호령들 일까요?
신체는 땅으로 영은 사물로
2022년 5월 이어령 선생님의 장례전에 갔습니다. 이어령 선생님 집에서 열렸는데요. 안경, 만년필 컴퓨터, 명함, 연필, 지우개, 편지, 먼저 떠난 딸의 사진 등등 정말 많은 사물이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누구보다 빠르게 컴퓨터를 사용했지만, 여전히 책상 한편에는 몽당연필과 지우개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합니다. 물건 하나하나를 이야기로 풀어갈 수 있는 진정한 애니미스트가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달에, 길상사에 갔는데 절 안쪽에 법정 스님의 유골을 모신 장소를 우연히 발견했습니다. 작은 푯말과 꽃이 피어 있습니다. 법정 스님은 출가하신 후 책 한 권을 못 들고 가 글씨를 못 읽는 게 가장 괴로웠다고 합니다. 우연히 신문 조각이 떨어져 있으면 그것에도 반갑고, 감사함을 느꼈다고 합니다. 두 분이 남긴 것은 종류와 숫자는 다르지만, 작은 물건도 애정을 가지셨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느껴집니다.
저 또한 돌아가신 엄마의 물건을 저를 ‘보호령’으로 생각했습니다. 엄마가 옷을 좋아하셨는데 그 옷을 입으면 엄마의 손길이 느껴졌습니다. 회사에서 중요한 미팅이나 프레젠테이션을 할 때 꼭 엄마의 바지를 입었는데요. 엄마의 영빨을 받기 위해서였습니다.
엄마를 따라서 자주 백화점 쇼핑을 했는데 이런 영향으로 마케팅이란 일까지 하고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엄마도 사물과 관계 맺는 애니미스트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학교에서 왔을 때 식탁의 다리를 톱으로 자르고 있었습니다. “엄마 뭐해?” 물어보니 좌식 식탁을 만든다면서 톱질하고 있었죠. 어느 날은 또 벽지와 문을 페인트칠하고 있었습니다. 청소기에 연결된 고무가 찢어지면 테이프로 돌돌 말아서 쓰기도 하고, 소파의 가죽이 벗겨지면 새로운 가죽 천으로 옷을 입혔습니다. 그렇게 10년~20년을 사물과 우정을 쌓아왔습니다. 제가 태어나서 이사 온 그 집은 아직도 아빠가 살고 있는데 지금은 리모델링했지만, 어딘가 엄마의 흔적이 있었습니다.
엄마는 쇼핑도 좋아했지만, 법정 스님을 좋아하셨어요. 작년 추석에 친정집에 가서 엄마가 읽었던 법정 스님 책들을 집으로 모셔 왔습니다. 책에 밑줄이나 메모가 없어서 너무 아쉽지만, 엄마가 한 페이지씩 넘겼을 것 같은 느낌에 가끔 책을 펴봅니다. 엄마의 책들 덕분에 제가 공부의 인연이 닿은 거 같아 감사한 마음이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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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에 깃든 영을 볼 줄 아는 엄마와 함께 자라는 바다는 얼마나 크고 깊은 감사와 사랑을 배울까요. 손때 묻은 장남감과 책의 기운이 엄마와 바다의 맑은 영을 이끌고 있는 것이 느껴지네요. 우정으로 가득한 영의 이야기를 나눠주셔서 감사합니다.^^
아 너무 좋은 글이네요. 이어령 선생님, 법정스님, 어머니, 바다 엄마, 바다의 영발이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조금 과장하자면) 숨도 안쉬고 끝까지 읽었네요.
확실히 오래 쓴 물건이나 생명이 있는 물건은 그냥 쓰고 버리기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생애 처음 차를 사서 남들이 범퍼카냐고 할 정도로 여기저기 긁히고 찌그러지게도 탔는데, 팔 때 몇 번이고 쳐다보게 되더라고요.
그 다음에는 그래서인지 지인들에게 제 차를 팔아서 아직도 가끔씩 그 차들과 인사합니다. 나의 희노애락을 함께 해준 차들에게 새삼 고마운 마음도 드네요. 얼마 전에는 아파트 공동 현관 앞에 누군가가 가져가라고 안내문을 적은 큰 화분을 보았는데요. 아마도 꽤 오랜 시간 함께 했을 가족들의 이사로 공동현관 앞에 오래도록 벌서듯 있는 화분이 꼭 누군가가 버려버린 반려동물마냥 미안한 마음에 그 화분에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했습니다.
바다 엄마 덕에 사물의 영을 다시 생각하며 제 방 사물들에게 인사하게 됩니다. 먼저 인사하신 바다 아버지도 너무 멋지시네요.
육아는 그냥 ‘힘들겠다’라는 말로 뭉뚱그려 버리고 살았습니다. 새로운 영을 만나 열리는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 배우고 갑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이시네요. 연아샘과 바다 이야기 연재가 기대되고 기다려지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