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화인류학 연구실에서는 이렇게 지금 여기의 삶을 완전히 긍정하는 주인공들의 세계를 탐험합니다. 동화 속 주인공들은 정황에 따라 즉흥적으로 자신을 만들어갑니다. 주인공의 삶이 어디로 이끌릴지는 아무도 모르고 정해진 것도 없습니다. 어떤 것으로도 규정 지을 수 없는 존재들이 온갖 살 궁리로 복작거리는 숲에서 깔깔 웃고 떠들며 놀다 옵니다. 그리고 돌아온 그 자리에서 지금 여기의 삶에 감사하며 한 걸음 더 낯선 길을 나서봅니다. 필요한 것은 모든 우연을 수용하고 마음껏 상상하는 것 뿐!
상상력의 리얼리티
상상력의 리얼리티
깔깔마녀
지난 시즌 동화인류학은 ‘다카하타 이사오’ 감독의 애니메이션 <가구야 공주 이야기>를 보고,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과정을 담은 그의 전시회를 다녀오는 것으로 시작됐다. 그리고 이것은 나에게 리얼리티가 무엇인지 생각해보는 계기가 됐다.
애니메이션은 만물에 ‘영’이 있다는 ‘애니미즘’에서 파생된 말이다. 애니메이션은 그림(현실 가능성)에 영을 불어 넣어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따라서 애니메이션이 리얼리티를 담고 있다는 말은 얼마나 현실을 잘 표현하고 있느냐와 상관없이 얼마나 주어진 현실에서 ‘상상력’을 동원하느냐에 달려 있었다. 상상력을 동원해 움직이지 않는 그림들을 작가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일이었다. ‘상상력’은 마치 영혼을 불어넣은 ‘숨’과 같았다. 상상력은 아무것도 없는 無에서 有를 창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있는 것들에 새로운 관계의 숨을 불어넣은 일인 것이다. 끊임없는 관찰과 주의력으로 어떤 ‘촉발’을 얻은 힘이 인간을 행동하게 하고, 현실이 되게 한다.
달님의 설명에 의하면 <가구야 공주 이야기>에서 가구야 공주가 벌을 받아 지상에서 달로 추방되는 이유가 ‘상상력’을 잃고 자기와 세계의 새로운 관계 구현을 할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모든 개인의 현실은 이미 있는 세계에 스스로 만들어내는 관계, 즉 상상력에 의해 매 순간 새롭게 출현한다. 자기와 관계 맺는 것들에게 숨을 불어넣는 적극적 수행에 의해 자기 삶이 조형된다. 하지만 가구야 공주는 모든 관계를 거부했다. 이는 숨쉬기를 거부한 것과 같고, 새로운 관계에 의해 매 순간 새롭게 탄생하는 현실, 그 순간이 전부인 삶 자체를 거절한 것과 같다. 한마디로 가구야 공주는 스스로 자기 삶을 살아낼 ‘용기’가 없었다.
『신성한 용기』(오스카 미로–퀘사다, 보니 글래스–코핀 지음, 추미란 옮김, 정신세계사)에서 우리는 이미 온전하게 있는 그 세계를 알아차릴 힘이 ‘용기’라고 배웠다. ‘용기’는 매 순간 포용하고, 매 순간 기뻐하고, 필요한 것은 이미 가졌음을 믿는 일이었다. 슬픔도 기쁨도 모두 삶의 온전함이라 믿을 수 있는 일이 ‘용기’였다. 그러나 가구야 공주는 세계의 온전함을 믿을 수 없었다. 이 세상의 온전한 존재는 자기뿐인 것만 같았다.
가구야 공주뿐만 아니라 우리는 이 ‘용기’를 잃고 사는 때가 많다. 내가 가진 조건을 부정하고, 차라리 어제와 똑같은 오늘로 머물기를 바라고, 내일도 오늘처럼 변함없기만을 바랄 때가 있다. 그래서 원시문화인들은 ‘용기’를 의례와 결합했는지 모른다. 의례를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새로운 관계 맺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기’를 불어넣는다. 그리고 이 의례는 언제나 ‘일상적’이다. ‘용기’란 너무도 자주, 쉽게 잃어버릴 위험이 있으므로 매일 매 순간 몸과 마음으로 익히는 반복적 의례 행위가 필요했다.
구체적 일상과 상상력
나는 <동화인류학>을 시작하면서 동화 읽기를 통해 ‘상상력’을 키우고 싶다고 말했었다. 그러나 이런 말을 할 때조차 나는 ‘상상력’이 무엇이고 그것을 키우기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상상력이란 막연히 공상(空想)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상상력과 공상은 달랐다. 현실이 될 수 없거나 실현된 가망이 없는 공상과 달리 상상력은 현실이 되게 하는 일이었다. ‘상상력’은 그 자체로 만물이 어떤 연결성 안에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따라서 그것은 나의 삶이 다른 존재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아는 것과 관련된다. 나의 삶을 이루는 수많은 관계의 ‘구체성’을 생각하는 일이다. 주의 깊게 바라보지 않으면 나와 연결된 존재들 사이의 작은 빈틈에 끼어들어 적극적으로 자기 자리를 만들어 갈 수 없다. 언제나 움직이는 세계에서 리듬을 맞출 타이밍을 놓친다면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없고, 삶이라는 현실을 만들 수 없다. 삶이란 언제나 움직인다. 종이에 그려진 그림들이 작가의 손끝에서 살아나 움직임을 얻듯이, 일상의 나열된 관계들이 나의 수행력을 통해 언제나 새로운 현실, 리얼리티가 된다.
상상력이란 관계를 발견해내는 능력이다. 상상력은 아무런 바탕도 없는 곳에서 마법처럼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알고 있는 것들의 관계를 끊임없이 고민할 때 상상력이 발현된다. 그럴 때 “모든 상상하기는 기억하기다.”(팀 잉골드, 『모든 것은 선을 만든다』, 268쪽) 현실이 되지 못하고 지나쳐온 관계들을 기억해 새로운 관계를 발견해내고 조합해서 없던 세계를 드러나게 하는 것이 상상력이다.
영靈들의 관계를 보는 상상력
애니미즘 세계에서 만물은 ‘영靈’이 있다. 영이 있는 만물은 인간과 같이 정신과 감정이 있다. ‘영’은 물체적 존재로 자기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보이지 않는 영들이 자리를 차지하는 실재적 존재였던 것처럼, 보이지 않지만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이 현실에 자리를 차지하며 실재가 된다.
애니미즘 세계에서는 영들이 얼마나 많은 관계에 참여하는지에 따라 생명력이 늘어난다. 즉, 상상력에 따라 생명력이 증가한다. 내가 새롭게 만들어내는 관계는 매 순간 다른 관계에 참여하는 도구가 되어 또 다른 관계를 만들며 생명력을 증식한다. 개별 영들은 관계에 의해 재생산되며 현실의 공동창조로서 세계에 참여하고 있다. 영들은 관계들을 먹고 살아간다. 관계를 만들어내는 능력이 없으면 굶어 죽는다. 그래서 만물이 자기 상상력을 조합하고 있는 세계는 언제나 소란스럽고 분주하다.
애니미즘 세계의 주술사들은 주물을 사용해 주술을 행한다. 주술은 주로 영을 치유하기 위해 시행되는데, 삶의 활기가 떨어진 사람들, 예를 들어 병들거나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활기를 찾아주기 위해 주물의 배치를 달리하는 방법을 쓴다. 주물의 배치를 달리해서 힘이 미치는 관계의 장을 바꿈으로써 현실의 어려움을 치유할 수 있다고 사고하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애니메이터가 그림의 배치를 달리해서 다른 표정,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것을 떠올리게 한다.
동화인류학을 배우며 나는 ‘상상력’의 뿌리에 애니미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만물에 영이 있고, 그 영들의 관계를 엮는 일이 상상력이다. 활기 없는 것들에 나의 실천적 경험으로 활기를 불어넣는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하는 관계의 힘을 생각한다. 서로 수용하고 수용되는 공동인격들의 관계를 볼 수 있는 능력이 ‘상상력’이다. 어떤 것 옆에 다른 것이 놓인다면 기존의 관계가 달라지고, 새로운 것이 나타나게 될 것을 미리 아는 예지력이다. 이것은 근대 이후의 삶을 살고 있는 우리의 개인적 상상력과는 다르다. 오로지 ‘나’만으로 수렴되는 그런 상상력이 아니다. 오히려 관계성이 증폭되면서 나를 잃고 자아가 ‘분열’한다. 다양한 관계를 위해 언제나 유연한 사고의 도중에 있는 예민하고 포용력 넘치는 상태로 열려가는 일이다.
부정되는 상상력
그런데 애니미즘 세계가 활기에 넘쳐보인 이유는 에서 이토록 넘치는 생명력으로 살아가던 존재들은 어떻게 됐을까? 자크 브로스의 『나무의 신화』에서 배웠듯이 살아가는 동안 빌어온 것에 불과한 활기의 에너지를 언젠가는 다시 되돌려주어야 한다. 마치 겨울이 되면 나무들이 모든 잎을 떨구고 땅에 자기 에너지를 되돌려주고, 봄이 오면 땅에서 그 에너지를 되찾아와 잎과 꽃을 피우는 것과 같다. 자신이 태어난 세계와 다시 결합해 재생하기 위해서는 모든 물질로부터 해방되는 순간이 필요하다. 『나무의 신화』가 들려주는 우주목 이야기는 나무 한 그루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나무 한그루는 햇살과 바람과 새와 비와 구름, 버섯과 뱀과 연결되어 있다. 그 연결성은 서로의 모습으로 변신하는데까지 확장된다. 신화의 시대에는 신과 나무와 사람은 서로의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원래 사람이었던 나무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또는 지은 죄에 대한 벌로 변신했었다. 신과 나무 사람이 서로 몸을 바꿔 변신하는 세계에서 인간은 함부로 나뭇가지를 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크고 거대한 우주목에서 볼 수 있었던 다양한 관계의 ‘깊은 숲’은 사라졌다. 『나무의 신화』는 나무가 신이었던 시기를 지나 요정이 되어서도 그 나무의 본성을 갖고 있었음을 이야기했다. 숲속 거대한 우주목과 함께 살던 신은 사라지고, 작아지고 희화화된 요정과 마법사, 은둔자, 포악한 사냥꾼만 남았다. 숭배받던 나무 신들은 유일신의 등장에도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신비롭고 기괴한 ‘이교도의 신’으로 생생하게 살아남아 두려움과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관계의 숲의 상상력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 치명적 원인은 과학과 함께 발달한 합리주의적 이성이었다. 근대 이후 이성의 시대에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금기와 두려움조차 해제되었다. 합리주의는 만물을 영이 있는 존재로 생각하고 그 관계에 의해 세계가 탄생하는 상상력의 세계를 부정했다. 이제 숲과 나무는 자원이 되어 그 효용성의 가치로만 남아있다. 사라진 숲과 신들과 함께 만물과 관계를 엮던 ‘상상력’도 사라졌고, 그와 함께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세계도 축소되었다.
상상은 현실이 된다
‘상상력’은 좋은 것과 함께 나쁜 것도 수용하며 온전한 세계의 힘을 믿는 일이다. 대립과 모순조차 긍정하며 치유술에 따라 관계의 배치를 조정하며 자기 삶을 좋은 쪽으로 구성하는 능력이다. ‘상상력’이 사라진 시대에 동화를 읽으면서 ‘상상력’을 키운다는 것은 편협한 관계에 빠진 삶의 공간에 동화라는 주물을 놓아 관계의 배치를 바꿔 치유하는 주술이다. 주술을 통해 삶의 온전함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사람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동화를 읽으며 좋은 삶을 꿈꾸는 나의 상상이 현실이 되기를 바라며 그 앞에 더 큰 세계가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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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력은 영혼의 숨을 불어넣고, 동화 인류학은 잃어버린 상상력을 일깨워준다고 생각하니 더욱 동화와 이 인연이 소중하게 느껴집니다! “주술을 통해 삶의 온전함을 믿을 수 있는 용기를 얻는 사람은 상상을 현실로 만들 수 있다.” 마지막 사진 보니 바로 미소 지어지네요. 웅장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또 동시에 귀여운!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