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월터 J. 옹 [구술문화와 문자문화]_구술성에 대해서
월터 J. 옹 지음, 『구술문화와 문자문화』_구술성 정리
날개 달린 말
2025.2.25. 최수정
구술성이란, 쓰기를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의 구술성을 가리킨다. 인간은 어디서든 언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그리고 그 언어는 기본적으로 말하고 듣는 언어이며 음성의 세계에 속한다. 언어란 압도적으로 목소리에 의존하는 것이다.
쓴다는 것은 말을 공간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쓰인 텍스트라 하더라도, 직접적이든 간접적이든 언어가 본래 존재하는 장소인 음성의 세계에 결부되지 않고서는 의미를 지닐 수가 없다. 텍스트를 ‘읽는’ 것은 음독이든 묵독이든 간에 텍스트를 음성으로 옮기는 일이다. 쓰기는 구술성 없이는 존재 불가능한 것이다. ‘텍스트(text)’라는 말은 ‘엮다(to weave)’라는 어원적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어원적으로도 구술적 발화와 모순되지는 않는다.
힘과 행위로서의 음성언어
말은 소리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을 다시 ‘발음할’ 수 있다. 즉 ‘재발음할’ 수도 있다. 그러나 말을 ‘찾아서 읽을’ 데는 어디에도 없다. 말은 초점을 맺지 않으며 자취도 남기지 않는다. 말에는 궤적조차 없다. 말은 발생된 것이자 사건이다.
모든 감각은 시간 속에서 생기지만, 소리는 인간의 감각으로 등록된 다른 영역과 달리 시간과 특수한 관계를 맺는다. 소리는 그것이 막 사라질 때만 존재한다. 소리는 단지 소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덧없는 것이며, 덧없는 것으로 이해된다. ‘permanence’라는 말을 발음할 경우, ‘-nence’라고 발음할 때 이미 ‘perma-’라는 소리는 사라진다. 사라지지 않을 순 없다. 소리를 멈추게 할 방법은 없으며 그것을 소유할 방법도 없다. 모든 감각은 시간 속에서 생겨나지만, 진정 이러한 방식으로 행위를 억제하고 고정하는 데 저항하는 감각 영역은 청각뿐이다. 시각은 움직임을 기록할 수 있다. 또한 부동 상태도 기록할 수 있다. 소리에는 정지 상태로의 변환이 없다.
말리노프스키가 분명히 한 바와 같이, ‘원초적인’(즉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 사이에서 언어란 일반적으로 행동 양식이지 사고를 표현하는 기호는 아니다(Maliowski 1926,pp.451, 470~81).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아마도 예외 없이 말에 위대한 힘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음성은 힘을 사용하지 않으면 소리로서 울릴 수 없다. 모든 음성, 특히 구두로 하는 발화는 ‘유기체 내부에서 발하는 것’이기 때문에 ‘역동적’(주술성)이다. 구술문화 속에 있는 사람들은 말에 마술적 힘이 있다고 생각하는데, 말이란 반드시 발화되고 소리로 울리는 것이며 그러므로 ‘힘에 의해 발생한다’는 감각이 있기 때문이다. 활자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은 말이란 무엇보다도 우선 목소리이며 사건이고, 따라서 필연적으로 힘에 의해서 발생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잊는다. 구술문화 속에서 사는 사람들은 한결같이 ‘이름(일종의 말)’이 사물에 힘을 불어넣는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이름을 붙임으로써 자신이 이름 붙인 것을 지배하는 힘을 갖는다.
소리의 내면성
구술문화의 정신역학을 논하는 가운데 지금까지 주로 사람들이 주의를 기울여온 것은 소리(sound)의 특징 중 하나인 덧없음, 즉 소리와 시간의 관계이다. 소리는 그것이 사라지려고 할 때만 존재한다. 그러나 소리의 다른 특징도 구술성의 정신역학을 규정하고 그것에 영향을 준다.
소리가 사물의 내부에 대해서 갖는 독특한 관계는 소리를 다른 감각과 비교할 때 분명해진다. 이 관계가 중요한 것은 인간 의식과 인간끼리의 의사소통 자체가 내부적인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물의 물리적인 내부를 확인하는 데 소리만큼 직접적으로 효과가 있는 감각은 없다. 청각은 내부에 손을 대지 않고서도 내부를 감각 할 수 있다. 소리를 내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소리로 그 내부 구조를 감지할 수 있다. 인간의 목소리는 인간 몸의 내부에서 나온다. 인간의 몸이 목소리의 공명체를 이루는 것이다. 시각은 분리하고 청각은 합체시킨다. 보는 사람은 그가 보는 대상의 외부, 대상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반면, 소리는 듣는 사람의 내부로 쏠려 들어간다. 들을 때는 동시에 그리고 순식간에 모든 방향으로 소리가 모여든다. 우리는 자기 청각 세계의 중심에 있다. 그 세계는 우리를 에워싸고 우리는 감각과 존재의 핵심에 위치한다. 소리의 이러한 중심화 효과를 하이파이 스테레오는 매우 세련된 방식으로 이용한다.
청각의 이상은 하모니, 즉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다. 내면성(interiority)과 하모니는 인간 의식의 특징이다. 인간 개개인의 의식은 완전히 내면화되어 있다. 즉 인간은 내면으로부터 의식을 감지할 수 있으며, 내면으로부터 의식을 직접 감지하는 것은 당사자 이외엔 불가능하다. ‘나’라고 말하는 사람은, 당사자 이외의 타인이 ‘나’라고 말할 때 지시하는 것과는 다른 것을 그 말로써 지시한다. 나에게 있어 ‘나’는 당신에게 있어 ‘당신’일 뿐이다. 그리고 이 ‘나’는 경험 일체를 ‘하나로 통합해서’ 자신 안에 합치한다. 지식이란 궁극적으로 분리가 아니라 통합이며 하모니를 구하는 일이다. 하모니가 없으면 내면의 상태, 즉 심리는 병든다.
여기서 내부나 외부라는 개념은 인간 자신의 신체 경험에 입각한다. 나의 신체는 나의 내부에 있다. 동시에 나의 신체는 외부에도 있다. 신체는 나 자신과 다른 모든 것의 경계이다. ‘내부’나 ‘외부’라는 말의 의미는 단지 신체 경험에 비춰서만 파악할 수 있다. 내부와 외부라는 말이 지시하는 것은 신체성에 관한 우리 자신의 경험이며, 이 경험에 따라 다른 여러 사물들이 분석된다.
구술사회에서는 소리의 현상학이 인간의 존재 감각 깊숙이 파고 들어간다. 즉 존재는 자화된 말에 의해서 처리된다. 말이 경험되는 방식이 심리적인 생활에서 언제나 큰 의미를 가지기 때문이다. 소리의 중심화 효과(소리의 장이 내 앞이 아니라 나를 중심으로 주위에 퍼져 있다는 것)는 인간의 코스모스 감각에 영향을 끼친다. 구술문화에서 코스모스는 인간을 중심에 두고 진행되는 사건이다.
소리 지배적인(sound-dominated) 언어 체계(verbal economy)는 분석적이거나 분리적인 경향 보다는 첨가적인(조화를 이루는) 경향과 공명한다. 또한 그것은 추상적인 사고보다는 보수적인 전체주의(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항상성을 지닌 현재, 손상되지 않고 그대로 유지되어야 하는 정형구적인 표현) 그리고 상황의존적 사고(인간 행동을 중심에 놓는 점에서 역시 전체론적)와 공명한다. 나아가 인간이나 인간적 존재의 행동, 즉 내면화된 인격의 행동을 핵심 삼아 지식을 조직하는 것과 공명하며, 비인간적인 사물을 핵심 삼아 지식을 조직하는 것과는 공명하지 못한다.
구술성, 공동체, 성스러운 것
목소리로 된 말(spoken word)은 인간의 내부에서 생겨나 의식을 가진 내면을, 즉 인격을 소리라는 물리적인 상태로 인간 사이에서 표명한다. 그러므로 목소리로 된 말은 사람들을 굳게 결속하는 집단을 형성한다. 어떤 화자가 청중에게 말할 때 청중 사이에 그리고 화자와 청중 사이에는 일체가 형성된다. 구술된 말(oral word)이 지닌 이처럼 내면화된 힘은, 인간 존재 궁극의 관심인 성스러운 것과 특수한 방식으로 결부된다. 대부분의 종교에서 목소리로 된 말은 의식이나 예배를 실행하는 데 필수적인 기능을 발휘한다. 신은 인간에게 ‘말을 거는’ 존재로 여겨지지 결코 인간에게 뭔가를 써 보내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는다. 히브리어에서 말을 의미하는 ‘dabar’는, 사건도 의미한다는 점에서 목소리로 된 말을 직접적으로 지시한다. 목소리로 된 말은 언제나 시간 속에서 움직이기 때문이다.
말은 기호가 아니다
사고는 소리로서 말에 깃드는 것이지 텍스트에 깃드는 것은 아니다. 모든 텍스트가 의미를 갖는 것은 시각적 상징과 음성의 세계 간의 관련성 때문이다. 말을 기호라고 생각하는 데 아무런 의심도 느끼지 않는 우리의 태도는 모든 감각, 나아가 모든 인간적인 경험을 시가과 유사한 것으로 생각해 버리는 경향에 바탕을 둔다. 소리는 시간 속의 사건이며 ‘시간은 걸어 나아간다.’ 시간에는 어떠한 정지도 분할도 없다. 현실의 시간은 결코 분할되거나 중단되지 않고 이어진다.
구술문화 속에서 사는 인간이 말을 ‘기호’로, 즉 정지된 시각 현상으로 생각하는 일은 있을
성싶지 않다. 호메로스는 말(words)을 ‘날개 달린 말’이라는 표준적인 형용구를 사용해서 표현했다. 이 표현은 말의 덧없음, 힘, 자유를 암시한다. 즉 말은 끊임없이 움직이는 가운데 움직임의 힘찬 형태인 비상을 통해 일상적이고 둔중하며 묵직한 ‘개관적’ 세계에서 자유로워져 하늘로 날아오르는 것이다.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특징들
1) 종속적이기보다 첨가적이다.
첨가적인 구술 양식으로서 우리에게 익숙한 예는 창세기 1장 1~5절에 있는 천지창조 이야기이다. ‘and’로 이어지는 구술적인 형태를 보존하고 있다.
2) 분석적이기보다 집합적이다.
구술문화에 입각한 사고와 표현의 구성 요소들은 한데 모여서 덩어리가 되는 경향이 있다. 예컨대 병렬적인 단어나 구나 절, 대비적인 단어나 구나 절, 형용구와 같은 것이다. ‘군인’보다 ‘용맹한 군인’, ‘공주’보다 ‘아름다운 공주’, ‘참나무’보다 ‘단단한 참나무’라고 말하는 방식이다. 반대 의미의 형용구가 있을 수 있다. ‘거만한 군인’이라든가 ‘가련한 공주’와 같은 형용구도 표준적이다. 일단 정형구적인 표현이 성립되면 그것을 건드리지 않고 내버려두는 것이 상책이다. 레비스트로스가 한마디로 잘 표현한 바와 같이, “야생의(즉 구술적인) 정신은 전체화한다”(Levi-Strauss 1966, p.245).
3) 장황하거나 ‘다변적’이다
장황한 말투, 즉 직전에 발화된 것의 되풀이는 화자와 청자 양쪽을 이야기의 본래 줄거리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단단히 비끄러매둔다. 구술문화는 유창함, 과장, 다변을 촉발한다.
4) 보수적이거나 전통적이다
일차적 구술문화에서 개념화된 지식은 소리 내어 되풀이하지 않으며 바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구술 사회에서는 여러 세대에 걸쳐서 끈기 있게 습득한 것을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입으로 말하는 데 상당한 에너지를 투입해야 한다. 그 결과 응당 지적인 경험들이 유산으로 남아 정신을 이루며, 이 정신은 매우 전통적이고 보수적인 틀을 취하게 된다.
5) 인간 생활세계에 밀착된다
구술문화는 범주화가 결여되어 있어서 모든 지식을 인간 생활세계에 다소라도 밀접하게 관련시키는 방식으로 개념화하고 언어화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한 개념화와 언어화는 외적이고도 객관적인 세계에 대한 관계에서도 더욱 직접적이고 가까이 지내는 인간끼리의 상호관계를 본뜬다. 전승되는 이야기 속의 이름과 그들이 지배하는 지역이 열거될 때도 인간 행위의 전체 상황 속에서 이루어진다. 즉 사람 이름과 지명은 행위와 관련되어 나타난다.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나 계보는 중립적인 목적이 아니라 인간 사이의 관계를 기술하고 설명한 것이다. 구술문화는 인간 활동이나 그와 유사한 활동에서 동떨어진 요소나 통계 같은 것은 거의 알지 못한다.
6) 논쟁적 어조가 강하다
구술성은 지식을 인간 생활세계에 파묻힌 채 놓아둠으로써 사람들의 투쟁 상황에 위치시킨다. 속담이나 수수께끼를 인용하는 것은 지식을 쌓기 위해서가 아니라 언어로 상대방과 지적인 대결을 하기 위해서이다. 지식의 사용 방식뿐만 아니라 물리적 행위에 대한 찬양에 있어서도, 구술문화는 논쟁적으로 만들어져 있음을 드러낸다. 폭력적 장면은 시각적으로 제시될 때보다 말로 구술될 때 덜 혐오스럽다. 구전 예술의 여러 형태에 나타나는 폭력은 구술성 그 자체의 구조와도 결부되어 있다. 모든 언어적 의사소통이 입으로 내뱉는 말로 이루어져 음성을 역동적으로 주고받아야만 할 때 사람들의 관계는 고양된다.
7) 객관적 거리를 두기보다 공감적이며 참여적이다
구술문화에서 배우거나 안다는 것은, 알고자 하는 대상과의 밀접하고도 공감적이며 공유적인 일체화를 이룩한다는 것을 뜻한다. 즉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쓰기는 알고자 하는 대상(the known)에서 아는 주체(the knower)를 끊어냄으로써 ‘객관성’의 조건을 세운다. 이 객관성이란 알고자 하는 대상에 개인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거리를 둔다는 의미이다.
8) 항상성이 있다
구술사회는 이미 현재와 관련이 없어진 기억을 버림으로써 균형상태 또는 항상성을 유지하는 현재 속에 영위된다. 구술문화의 개별단어의 의미는 구디와 와트가 ‘직접적인 의미의 승인’이라고 부른 것을 통해, 즉 그 단어가 지금 여기에서 쓰이는 실생활의 상황을 통해 통제된다. 구술문화에 뿌리박은 정신은 정의에 무관심하다. 단어는 언제나 그 단어가 끈질기게 실제 서식하는 곳에서만 의미를 얻는다. 몸짓, 목소리 음조, 얼굴 표정, 실제 발화되는 단어가 야기하는 인간적이고 실존적인 전체 환경을 포함하는 것이다. 단어의 의미는 끊임없이 현재에서 나온다.
9) 추상적이기보다 상황의존적이다
구술문화는 상황의존적이고 조작적인 준거 틀에서 개념이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준거 틀은 일간 생활세계에 여전히 밀착해 있다는 의미에서 추상 정도가 매우 낮다. 구술문화 속에 사는 사람들은 기하학적 도형을 식별할 때 각 도형에 여러 대상의 이름을 연결하여 식별했다. 원을 접시·채·물통·시계·달, 사각형을 거울·문·집·살구 건조판 등으로 불렀다. 도형을 자기네들이 아는 실제 구체적인 물건으로써 식별했다.
‘망치’, ‘톱’, ‘나무’, ‘손도끼’를 실천적 상황의 관점에서 분류했다. 즉 ‘상황의존적인 사고’에 따라서 생각하고, 나무 이외의 것을 모두 ‘도구’로 분류하는데 유의하지 않았다. 도구와 도구가 필요한 대상으로 구분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도구를 사용하는 방식을 생각할 뿐이다.
읽고 쓸 수 없는 사람들은 형식적인 연역적 절차에 따라서 사고하는 것을 전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이들은 말로써 자기를 분석하는 데 곤란을 느낀다. 자기분석을 할 수 있으려면 상황의존적인 사고를 어느 정도 깨뜨려야만 하기 때문이다. “당신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합니까?”라는 질문을 했을 때 “우리는 똑바로 하고 있어요. 우리가 나쁜 놈들이라면 아무도 우리를 존경하지 않죠”라고 대답하며 자기평가는 집단평가(‘우리’)로 조정되어 버린다. 나아가 타인으로부터 예상되는 반응으로 교묘하게 환치되어갔다. 자기 내부로부터가 아닌 외부로부터의 판단이 개인을 압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