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 수업 후기 “말은 사이의 것”
동화인류학 수업 후기 2025-4-22 김유리
<읽기>
『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③』5부 제7장~제12장 경작지를 물들이는 주술의 언어와 법적 경제적 언어
<토론>
트로브리안드 군도의 경작지 언어를 다룬 장을 읽고 주술 언어와 소유 개념에 대해 토론했다.
주술의 말
주술이라는 일반 명사가 있다. 주술 활동에 이름이 붙어 있다는 것은 주술이 인간 활동의 다른 어떤 형식들과도 대비된다는 뜻이다. ‘메그와’는 영어 ‘magic’에 정확하게 대응한다. 메그와는 (1)주술 일반, (2)주술의 효험, (3)주술 활동을 포괄하며 동사로도 사용된다.
주술 활동을 구성하는 요소는 말, 몸짓, 그리고 사물이다. 주문이 있고, 주문을 읊는 퍼포먼스가 있으며, 주술용품들이 있다.
주술의 말은 대상 집중적이다. 주술의 말은 주술사의 입에서 나와 주술을 걸 대상 속으로 들어간다. 주술 문구는 대상을 정확하게 지정한다. 주술을 거는 사물, 식물, 영들의 이름을 부르거나 ‘이것’ 또는 ‘여기’라고 가리킨다.
주술 언어는 효과를 일으키는 말이다. 주술 언어는 효과를 초래하므로 터부를 걸어 중화한다. 주술사는 말의 최고 수행자다. 주술사는 말을 잘 할 뿐 아니라 터부를 지키는 자이다. 주술사는 금식 터부를 지킴으로서 자기를 굶기고 공동체의 말을 한다.
재현 언어
주술 언어는 맥락적이다. 주술 언어가 사용되는 맥락이 밝혀지지 않으면 단어들은 무의미해 보일 뿐이다. 이에 비해 재현 언어는 사전적 의미만으로 지시 대상과 대응한다. 재현 언어는 맥락과 분리되어 있고, 발신 언어와 수신 언어가 동일하다고 가정한다. 재현 언어의 대표적인 사례는 ‘신문의 언어’이다. 신문은 정보를 사실 그대로 전달한다고 여겨진다. 카프카는 ‘편지의 언어’에 대해 생각했다. 사람은 앞에 있는 사람을 붙잡거나, 앞에 없는 사람에 대해 생각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앞에 없는 사람에게 편지를 보낸다는 것은 낯선 일이다. 그는 편지에 써 보낸 말이 그대로 전달된다고 믿지 않았다. 그렇게 믿을수록 사람 사이에 전달된다고 착각하는 말들이 늘어난다고 생각했다. 이것을 카프카는 유령이 다 마셔버린다고 표현했다.
편지를 쓸 수 있다는 쉬운 가능성이 단순히 이론적으로 보면 세상에 섬뜩한 영혼의 혼란을 초대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것은 유령과의 교신인데 그것도 편지 수신자인 유령과의 교신일 뿐 아니라 자기 유령과의 교신이기도 합니다. 자기 유령은 편지 쓰는 사람의 손에 의해 편지 속에서 성장하거나 한 편지가 다른 편지의 증거가 되어 이 편지를 증거로 원용할 수 있는 일련의 편지 속에서 성장합니다. 어떻게 인간들은 편지를 매개로 서로 교류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을까요! 우리는 멀리 있는 사람을 생각할 수 있고, 가까이 있는 사람은 붙잡을 수 있지만, 그 외의 모든 것은 인간의 힘을 넘어섭니다. 그러나 편지를 쓴다는 것은 탐욕스럽게 편지를 기다리는 유령 앞에 자신을 노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편지에 쓰인 입맞춤은 보내질 곳에 도달하지 못하고 유령이 도중에 다 마셔 버립니다. 이러한 풍성한 영양분으로 인해 유령들이 엄청나게 늘어납니다. 인류는 이를 느끼고 그에 맞서 싸웁니다. 인류는 인간들 사이의 유령 같은 요소를 되도록 쫓아내고 자연스러운 교류, 즉 영혼의 평화를 이룩하기 위해 철도와 자동차며 비행기를 발명했습니다. 하지만 더 이상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분명 그것들은 이미 추락 중에 만들어진 발명품입니다. 상대편은 훨씬 더 침착하고 강력해져서 우편에 이어 전보와 전화, 무선 전신을 발명했습니다. 유령은 굶어 죽지 않겠지만 우리는 몰락할 것입니다. (『프란츠 카프카 디 에센셜』,민음사, 733-34, 밀레나 예센스카에게 1922년 3월 말 쓴 편지에서)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한 ‘의사 소통 모델’을 살펴보자(4월 2일 수업). 이 모델에는 발신 언어에 담긴 의미가 그대로 조사되고 수신자에게 도착해 전사된다는 입장이 담겨 있다. 이때 언어는 중성적이고 투명한 매개체로 가정된다. 이것은 제국주의 시대 비서구 지식인이 강요받은 모델이다. 그들은 제국주의의 언어를 그대로 옮겨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근대 초기 번역가는 출발 언어를 학습해서 취사 선택하는 학생이면서 동시에, 도착 언어를 마치 다 아는 듯한 선생님이 되어야 했다.
관계를 열고 의미를 창조하는 생성 언어
언어는 사전 속에 있지 않다. 언어는 맥락 속에 있다. 언어는 수행적이고 결과를 초래한다. 이를 화용적 언어라고 한다. 언어는 대화적 관계를 연다. 모든 말은 효과를 낳는다. 단지 지시하는 것이 아니다.
주술 언어는 현실을 일으킨다. 말리노프스키의 책에 쓰인 주술 문구는 죽어 있는 것이지만, 경작지에서 경작자가 대상에 읊을 때 주술 문구는 살아 있다. 주술 문구는 지시하고 정보를 전달하는 재현 언어와 다르다. 인류학의 언어는 재현 언어를 비판한다. 언어를 통해 읽는 이와 대화적 관계를 열고자 하며 대상에 대한 이해를 일으키려고 한다. 말리노프스키는 언어를 화용적 관점에서 보고 있다.
한 사람의 행위자에게서 또 다른 이에게로 건너가는 말이 주로 생각을 소통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아니다. 말은 작업을 연결하고 신체적인 움직임들을 서로 관련시킨다. 말은 행동의 일부이며 행동과 동등하다……. 언어는 말하는 사람의 머리에서 듣는 사람의 머리로 생각을 옮겨붓는 수단이라고 여기는 그릇된 이해가 언어에 대한 문헌학적 접근을 주로 망쳐왔다.(『산호섬의 경작지와 주술③』, 53)
말은 “사이의 것”
말은 누구의 것인가? 내가 말하지만, 나 아닌 것에 대해 말한다. 말은 사이의 것이다. 말은 사이에서만 의미가 있다. 말을 하는 관계가 없다면 말의 소유가 무슨 의미가 있는가? 화용적 언어는 관계를 설정한다. 단어의 의미는 관계라는 맥락 안에서만 생긴다.
재현 언어의 관점에서 말은 발신자의 것이지만, 관계적 언어에서는 소유 개념이 변한다. 말은 너머의 것에 대해 말한다. 말은 발신자를 넘어서 있다. 말은 듣는 사람의 변화를 유발한다. 관계적으로 언어를 사용하는 사회에서는 정체성 개념도 소유 개념을 벗어난다. 이름 안에 정체성을 구겨 넣는 것이 아니라, 처한 조건과 위치에 따라 역할이 바뀐다. 나의 정체성은 나에게 속한 것이 아니게 된다. 빼앗기는 것도, 권리를 가지는 것도 아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조건 속에서 시기적으로 달라진다. 맥락에 따라 강세가 바뀐다.
관계적으로 의미를 생성하는 언어를 쓴다면 자기 동일성을 고수하는 능력보다 중단 없는 반응력이 중요해진다. 생성하는 언어는 고정된 것, 옳은 것, 되어야 할 일을 보는 재현적 언어와 다르게, 벌어지는 일들에 중단 없이 반응하며 새로운 의미와 마주친다. 언어의 주고 받음에서 중요한 일은 무엇을 주고 받느냐가 아니고, 중단 없이 이어가는 일이 된다.
주술의 도구들
경작 주술의 도구와 재료들을 열거해 보겠다. 누구나 손쉽게 얻을 수 있다. 막대기, 토치, 도끼, 화덕, 바위, 솥단지, 매트, 허브 식물, 조개껍데기, 크고 둥근 것 등이다. 길쭉한 도구로 건드리고 두드리고 휘두른다. 휘두른다(wield)는 것은 지배하는 것이며 휘두르는 자의 탁월한 능력을 함축한다. 돌은 누르고 깨뜨린다. 무게감은 금기와 상관있다. 터부를 거는 것은 무겁게 누르는 것이며 터부를 해지하는 것은 가벼워지는 것이다. 흙으로 빚어 장식하고 구운 단지와 실로 직조한 천은 자연물을 취하고 다듬어 조응 관계를 맺은 것들이다. 요리하는 화덕은 이질적인 세계를 매개하는 장소다. 산호섬에서 화덕 돌은 영들에게 공물을 바치는 장소다. 횃불은 경작지 화전의 도구인데, 극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도구다. 주술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들을 사용한다. 일상적인 사물들은 성스럽다.
그렇다고 해서 아무 도구나 주술의 힘을 갖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주술사의 성스러운 주술용 지팡이는 유일무이한 것이다. 물론 평범한 지팡이와 똑같이 생기기는 했지만 때가 되면 경작지에서 주술에 쓰인다. 매년 쓰는 농사용 도끼는 주술사가 매년 공식적으로 주문을 걸어서 ‘치료’해야 힘이 회복된다.
성장 주술
성장 주술에서 쓰는 동사는 일상의 말에서 빌려온 것이다. 주문에 쓰이는 동사는 각 성장 단계에 정확하고 완벽하게 부합해야 한다.
때를 가리키는 말은 ‘크웰루바’이다. ‘지금은 얌의 크웰루바이다’ 등으로 사용된다. 일정한 사건에 관계되는 계절을 가리키고, 그러한 계절들의 순서와 계절을 계산하는 체계를 나타낸다. 주술은 크웰루바에 맞는 말과 몸짓을 하는 것이다. 해를 입히기 위한 나쁜 주술도 크웰루바에 정통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〇성장 단계에 부합하는 평범한 동사들
깨우다 – 싹을 깨운다(촉 틔우기, 발아)
등장하다(emerge) – 싹이 나오다(새싹)
뒤덮는다 – 잎이 무성하게 된다, 우거지다, 어두워지다
(동굴에) 들어가다 – 뿌리가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다
쏟아져 나오다 – 덩이줄기가 주렁주렁 달리다
닻 내리다 – 흙에 고정되다(활착, 착근), 안정
붙잡다 – 타이투 줄기가 버팀대를 붙잡고 장대로 올라간다(유인)
자르다 – 여문 것의 줄기를 자르다, 목을 치다(가을하다, 바심하다, 베다)
뛰어오르다 – 버팀대 사이를 뛰어오르다
먹다 – 의례적 먹기, 먹음으로서 개시
먹는다는 동사도 의례적으로 쓰인다. 첫 수확물은 모든 남자가 자기 집에서 먹는다(370). 이것은 의례적 먹기이며 햇 수확물 먹기를 개시한다. 경작지 주술사에게는 먹기와 관련된 터부가 있다. 그는 중요한 공적 주술을 수행할 때마다 그 단계를 완수할 때까지 금식한다. 주술사의 입은 사적인 먹기를 중단하고 공적인 말하기에 사용된다.
성장 주술에 사용되는 이름들은 다른 주술보다 단순하고 직접적이고 생생하다고 한다. 명확한 주문과 의례 활동을 통해 식물 성장 단계를 틀림없이 밟아가는 데에 성장 주술의 목적이 집중되어 있다.
수확 주술과 풍요 주술
수확과 풍요의 주술은 성장 단계를 마무리한 다음 여무는 단계에 해당한다.
용어는 맥락에 따라 특정 의미가 활성화되고 대조에 의해 명확히 이해된다. 검정색(어두운 색)은 타이투 표면에 쓰일 때 한편으로 잘 익었다는 의미를 갖는다. 다른 한편, 병든 타이투를 지칭하기도 한다. 이때 반대말인 흰색은 건강하다는 의미를 갖게 된다.
경작지에서 설화와 민요(ditty)를 낭송하는 활동이 경작지에 미치는 영향력은 모호하다. 설화를 암송한 뒤에 읊는 민요는 표준화된 리듬감 있는 이야기다. 신화(설화, 민요)는 주술적 영향력을 가지지 않는다. 그런데 왜 경작지에서 낭송하는지는 알 수 없다. 옛날이야기와 짧은 노래를 들려주는 관계 모델은 어떤 것일까? 기르는 일에는 소리가, 기르는 소리에는 이야기와 노래까지 동원되는 것 같다. 단, 주술적 효과는 모호하거나 없다. 작업으로나 주술로나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하고, 이에 더하여 효과가 모호한 설화까지 들려주려는 것은 어떤 마음에서일까?
신화와 주술을 구분하는 토착민들의 관점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언어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가 다층적이라는 것이다. 언어들은 영향력을 발휘하는 수준이 모두 다르다. 백인 선교사들은 예배를 드리면 그 결과로 경작도 잘 된다고 말하는데 이를 트로브리안드 농부들은 거짓이나 어리석음으로 여긴다. 농부들이 아는 것은 경작에는 경작지 주술이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성장 주술에서부터 수확과 풍요 주술까지 주술사는 스스로 금식하면서 모두의 밭에 빠짐없이 주술을 건다. 농사철 내내 주술사는 완수해야 할 일이 많다. (주술용 지팡이는 지휘봉과 비슷하다. 오케스트라 단원들은 충실히 연습해왔고 완벽하게 준비되어 있다. 순서도 이미 다 안다. 이들의 노고와 기술적 숙련도는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이 개별적으로 이루어지지만, 콘서트에서 완벽한 공연을 펼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지휘봉을 휘두르는 지휘자와 함께여야 한다.)
경작과 관련된 법적 경제적 소유 문제
: ‘이것은 누구의 것인가?’에 대한 답을 복잡화한 사회
“가장 광범위한 의미에서 소유권(ownership)이라는 추상적인 개념, 곧 인간이 사물을 이용하고 처분할 권리를 나타내는 단어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인간이 사물 혹은 환경의 한 부분과 맺는 이러한 관계들은 수많은 언어적 도구들을 통해 서술될 수 있다.”(401)
소유권 개념은 인간과 사물이 맺는 관계에 대한 관념을 보여준다. 사물 또는 환경의 일부분에 대해 인간이 소유 관계를 맺는다고 할 때, 그것은 처분권이 아니다. 인간에게는 그러한 권리가 없다(달님). 이른바 ‘경제적 소유권’으로 환원되지 않을 무수한 관계들이 있다. 하물며 화폐 가치를 매길 수 있으랴?
트로브리안드에서 소유 개념은 네 가지 유형이 있다. 관계의 인접성 또는 친밀성의 차이에 따른 구분이다.. (1)가장 가까운 소유(혹은 의존)는 신체, 친족, 개성에 해당된다. ‘나의 손’, ‘나의 아버지’, ‘나의 마음’, ‘나의 욕망’이 이에 해당한다. (2)약간 더 먼 소유 관계는 옷이나 몸에 지니는 소품에 해당 되어 ‘나의 춤 깃털’, ‘나의 벨트’ 등이 사례이다. (남자의 치골잎과 여자의 섬유치마는 가장 가까운 소유 관계에 해당하여 예외이다.) 대부분의 식량 품목도 여기에 해당하는데 당장 먹을 것이 아닌 식량일 경우에 쓰인다. ‘나의 얌’, ‘내 소유로 쌓아둔 타이투’, ‘나의 과일’ 등이다. (3)당장 먹을 식량은 그보다 조금 더 먼 관계의 소유격을 사용한다. 생존을 위해 소비할 식량에 해당한다. 이 식량이 없다는 것은 치욕적인 일이다. (4)끝으로 가장 먼 소유 관계가 우리가 생각하는 경제적 소유에 해당한다. 법적으로 보장되거나 주장되는 경제적 소유권, 거주권, 사용권 등이 이러한 소유 개념에 해당한다.
소유 개념을 담은 용어가 많이 있다. 그중 ‘톨리-’는 주인이라는 뜻이다. ‘누가 주관하는 예식인가’, ‘누가 주관하는 밭구획인가’ 등에 사용된다. 주인이란, 책임을 지고 조직하고 관리하는 일을 하는 사람이다. ‘토-카비’는 소유의 권리보다는 능력을 가리키기 위해 사용된다. 장인이 자기 도구를, 또는 기능공이 부속품을 기술적으로 통제하는 것을 가리킨다. 무엇을 휘두르는 자로 번역한다. 경제적이고 법적인 관계와 함께 기술적 통제 능력을 소유 개념으로 쓰는 것이 흥미롭다. 나는 노트북이나 휴대폰을 소유할 수 있지만, 기술적으로 통제하지 못하고 거꾸로 휘둘린다는 점에서 나는 그것들의 ‘토-카비’라고 할 수 없다. 우리가 소유하기를 간절히 바라는 돈도 우리를 휘두른다(연아샘). 영토와 같은 명목상의 소유 관계를 맺는 경우도 있다. 영토는 경제적으로 공동체 전체 또는 대표자에 의해 소유되고 신화, 경제, 법적으로 권리가 표현되고 보장된다.
소감
재현 언어와 소유 관념의 관계를 짚은 달님의 설명이 어렵고 놀라웠다. 그리고 재현 언어를 비판하는 관계적 언어를 지칭하는 개념어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말리노프스키는 언어의 관계성을 중시했다. 인류학 연구는 언어의 번역이 아니라 맥락의 번역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맥락을 보여주는 민족지가 언어학과 보완 관계에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트로브리안드의 소유 개념을 친밀한 거리에 따라 네 가지 유형으로 살펴본 것이 흥미롭다. 소유는 거리의 문제라는 관념이다. 이중 가장 먼 소유 관계는 경제적 관계다. 경제적 관계는 소유 관계의 일부에 불과하다. 그리고 마음은 가장 가까운 관계인데, 마음의 여러 가지 상태(정서 변화)를 의복이나 소품처럼 조금 먼 관계로 설정한 것도 재미있다. 그렇게 보면 감정도 인접 관계로서 옷처럼 탈착이 가능할 것 같다. 감정은 조건적으로 가까이 다가온 것이지 자기 자신과 동일하거나 자기 내부에 소지한 것이 아니다. 거리는 외부 관계다. 소유가 내포 관계가 되면 사로잡히는 관계(posessed)가 될 것이다. 책임 있게 관리하거나, 능숙하게 휘두르는 것도 소유하는 방식이라는 관념도 흥미로웠다. 사적이고 배타적인 소유를 넘어서는 소유 개념들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