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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동화 전집(4)] “버드나무 아래서”에 나타난 아름다움 강박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0-16 17:10
조회
180

“버드나무 아래서”에 나타난 아름다움 강박

 

 

주제문 : “버드나무 아래서”에 ‘아름다움’이라는 형용사가 빈출하는 이유는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비실용적인’ 감수성을 긍정하는 텍스트의 강박이 작용하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의 “버드나무 아래서”는 고향 마을에서 함께 자란 소녀를 잊지 못해 방황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젊은 직공의 이야기다. 작품 속 ‘아름다움’에 대한 발화를 따라가면서 주인공 크누트의 행보를 이끄는 감정선을 살펴보자.

아래 인용한 작품 도입 문단의 다섯 문장에서 아름답다는 형용사가 여섯 번 나온다. 왜 이렇게 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일까?

 

“쾨게 마을 주변 지역은 매우 황량하고 춥다. 그러나 해안에 있는 조그만 쾨게 마을은 늘 아름답다. 이곳은 아마도 평원이 넓게 펼쳐져 있고 숲과 멀리 떨어져 있기 때문에 더 아름다워 보이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디에 살든 한 곳에 살다 정이 들게 되면 아름다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고향이 아닌 가장 아름다운 곳에 가도 그리워지는 아름다운 것 말이다.”(“버드나무 아래서” 465)

 

같은 형용어지만 지시 대상이 다르다. 먼저, 어디에서나 누구에게나 통하는 일반적인 아름다움을 지칭한다. 한편, 정든 고향 마을에 대해 느끼는 주관적인 아름다움이 있다. 세상에 아름다운 장소는 많이 있지만, 그 아름다움을 감지하는 사람 마음속에는 그만의 아름다움이 간직되어 있다. 내부와 외부의 아름다움이 감지자의 감수성을 통해 서로 연결된다.

작품은 크누트의 어린 시절에서 청년기까지를 그린다. 시간 순서로 크누트의 발걸음을 따라가 보자.

 

<어린시절>

장소들 : 쾨게 마을

정원 나무아래 / 시장 / 크누트의 집 / 교회 묘지

 

“이 버드나무들은 꼭대기에 있는 가지들을 쳐버려 아름답지는 않았지만 쓸모가 있었다. 그러나 정원에 있는 늙은 버드나무는 길가에 있는 버드나무들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그래서 두 아이는 이 늙은 버드나무 아래에 앉아 놀기를 좋아했다.”(466)

 

“(상인에게 들은 것을 묘지에서) 다른 아이들에게 이루지 못한 벙어리 사랑에 대해 이야기해 주었다. 그들은 그것을 진정한 사랑이라고 말했다. 아이들은 모두 아름다운 그 이야기에 감동했다.”(467)

 

“두 아이는 딱총나무와 버드나무 아래서 함께 놀았다. 요한나는 은방울 구르는 듯한 목소리로 아름다운 노래를 불렀고, 크누트는 음악성은 없었으나 노래 가사를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다. 그것은 정말 아름다운 모습이었다.”(467)

 

여기서 아름답다고 묘사된 것은 강가 정원의 손대지 않은 버드나무, 요한나의 노래, “진정한 사랑”의 이야기다. 어린 아이 크누트가 경험하고 속해 있는 아름다움들이다. 아름다운 나무가 더 실용적인 것은 아니라는 언급도 있다.(‘쓸모’에 대한 주제는 “쓸모없는 여자”에서도 다루어진다. 저마다의 사연이 있을 뿐 쓸모를 평가할 수는 없다. 쓸모를 강조하는 자는 지배적인 가치를 무기로 자신의 사욕을 분칠한다.)

 

<분리>

장소들 : 코펜하겐

구둣방 / 요한나의 방 / 거리 / 극장

 

“(편지는) 코펜하겐에서 아주 잘 지내고 있으며, 특히 요한나는 목소리가 아름다워 앞으로 큰 행운을 잡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468)

 

“방안이 너무도 아름답게 꾸며져 있어 마치 딴 세상 같았다. 쾨게 마을 전부를 통틀어도 그런 아름다운 방은 없었으며 왕비의 방도 그처럼 화려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녀는 이제 성숙한 여인이 되어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으며 전보다 훨씬 더 아름다웠다. 쾨게에 그녀와 견줄 만한 처녀는 없었다. 아, 얼마나 우아하고 아름다운가.”(469)

 

“그날 저녁 크누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극장에 갔다. 그리고 거기서 무엇을 보았던가? 물론 그가 본 것은 아름답고 사랑스런 요한나였다……. 크누트는 갑자기 자신이 너무 초라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다음 순간 자신이 요한나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요한나도 그를 마음속 깊이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471)

 

“요한나는 크누트에게 여느 때처럼 차를 따라 주고 노래도 불러 주었다. 노래는 가슴이 복받치도록 아름다웠지만 예전 같지 않았다.”(472)

 

청년 크누트는 어린 시절 그 자신이 일부로 속해 있던 아름다움으로부터 분리된다. 이제 아름다운 것은 요한나이다. 요한나의 노래, 우아한 차림새와 화려한 방, 공연이 아름답다. 그와 비교하면 자신의 처지가 초라하게 느껴진다. 이 지점에서 사랑의 감정이 수면 위로 떠오른다. 아름다운 요한나와 결혼하면 분리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을 것 같다. 크누트는 요한나에게 청혼을 하고, 요한나는 거절한다. 요한나는 크누트가 다가갈 수 없는 곳으로 점점 더 멀어져간다. 그렇지만 크누트는 요한나를 잊지 못한다.

 

<여행>

장소들 : 뉘른베르크, 알프스, 밀라노

구둣방 / 극장 / 나무 아래

 

“크누트는 가슴 깊은 곳에 슬픔을 감추고 어느 누구에게도 요한나에 관해 얘기하지 않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숨이 막혔다. 그가 본 것은 그를 둘러싼 세계의 절반뿐이었고, 나머지 절반의 세계는 그의 마음속에 고통스럽게 침잠해 있었다.”(474)

 

잃어버린 아름다움이 크누트의 내면으로 거소를 옮긴 듯, 크누트의 생활에서 내면이 커지고 깊어진다. 그에 맞추어 크누트의 보폭도 커진다. 요한나는 가수의 길로, 크누트는 구두 직공의 길로 각자의 진로를 가는가 했더니, 크누트는 돌연한 여행 충동을 느끼고 길을 나선다. 체류지에서 요한나와 어린 시절을 연상시키는 경관을 만날 때마다 견디지 못하고 다시 여행 가방을 싸서 이동한다. 알프스 산맥을 도보로 남하해 밀라노에 이른다. 눈 덮인 산이 과거의 기억을 막아줄 거라고 생각했다.(475) 그러나 그것은 오산이었다. 밀라노의 오페라 극장에서 유명 가수가 된 요한나의 공연을 우연히 관람하게 된다.

그렇게 잊으려고 애썼던 요한나와의 재회는 더 이상 부인할 수 없는 격차와 분리감으로 크누트의 심장을 가격한다.

 

“공연장 밖에 세워진 요한나의 마차 둘레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사람들이 말 대신 마차를 직접 끌었다. 크누트도 맨 앞에 서서 그들과 함께 환성을 지르며 마차를 끌고 갔다. 마차가 밝게 불이 켜진 어느 집 앞에 멈춰서자 크누트는 마차 문 옆으로 다가갔다. 마차 문이 활짝 열리고 요한나가 밖으로 나왔다……. 그녀는 크누트를 알아보지 못했다. 가슴에 반짝이는 별을 단 신사가 그녀에게 팔을 내밀었다. 사람들은 그들이 약혼한 사이라고 했다.”(477)

 

그날 크누트는 다시 여행 가방을 싼다. 알프스 산맥을 넘어 고향으로 돌아가려고 하던 크누트는 결국 동사하고 만다. “아무와도 나누지 못할” 자기만의 사연을 가슴에 품고 혼자가 되어 “북쪽 고향을 향해 떠도는 이방인”으로 죽었다.(478)

아름다움에 대한 사랑이 왜 그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일까? 죽음에 이르게 하는 사랑이 아름답다는 의미일까? 아름다움에 고양되고 깊은 고뇌를 안고 낯선 풍광을 여행하는 인물이 등장하는 낭만주의적 작품을 보며 당대의 독자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을까? 실용성과는 거리가 멀고, 고전적이거나 종교적인 절제미와도 멀어 낯설어했을까? 억눌린 감수성을 일깨우며 시대를 풍미한 ‘현대적’이고 유행하는 사조였을까?

아름답지만 이루어지지 못하는 낭만적인 사랑을 다룬 동화는 어떤 현재적 의의를 가질 수 있을까? 거의 두 세기를 건너 뛰어 지금 “아름다움과의 분리”가 격한 슬픔을 일으킬 수 있을까? 일상에서 이런 일이 일어난다면 아마도 전문가의 상담을 권유받을 것이다. 예민한 감수성은 업무에 지장을 주고, 심지어 생존에도 해로운 관리되어야 할 감정이라고 여겨질 것이다. 그렇다고 아름다움이나 사랑이 부정되는 것은 아니다. 아름다운 외모, 볼거리, 여행지에 대한 강박적인 추구가 있다. 다만, 그것이 추구되는 방식은 ‘소유’를 지나쳐 ‘선택’과 ‘소비’의 영역에 잠식되어 있다.

이상으로 아름다움이라는 실마리를 따라 작품을 풀어 보았다. 아름다움이라는 말은 작품 앞부분인 유년 시절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청년 크누트가 어린 시절과 함께 멀어져가는 아름다움과 결합하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그의 내면의 크기가 자라나는 것을 확인했다. 그가 사로잡힌 과거의 기억과 강도 높은 감정은 이상 행동들과 죽음으로 이어진다. 작품에서 자주 등장하는 아름답다는 표현은 크누트의 상실의 충격과 그로 인한 내면의 상처를 강조해주는 장치다. 더불어, 임사의 환각 속에서라도 사랑을 이룬 크누트 이야기를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긍정하고자 하는 작품 자체의 반복 강박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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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생각해 볼 내용

 

진단하는 나

위 해석은 나의 ‘진단’하는 시선에서 나온 것이다. 작품 속 아이들이 아름답고 진정한 것으로 여겼던 감정에서 초래된 행보를 나는 ‘이상 행동’으로 ‘진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언급은 다른 작품에도 자주 나온다. 반복되는 것에 대해서 무의식의 발로라고 진단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생각다 못해 안데르센의 취향이 ‘게이’스러운가 싶기도 했다. 아름다움이라는 이상이 어째서 현재 특정 성이나 집단의 ‘취향’으로 여겨지게 되었는지가 역사적인 현상일 수 있겠다.

 

다른 작품에 나오는 “아름다움”과 비교

 

“미망인의 손자들은… 개의 무덤을 흙으로 덮고 토닥거리느라고 바빴다. 참으로 아름다운 무덤이었다. 그런 무덤이라면 그 안에 묻히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았다.”(“슬픈 마음” 451)

: 아이러니, 혹은 풍자적 사용

 

“새옷을 입은 거위치기 소녀는 귀족 집안의 귀부인처럼 아름다웠다.”(“모든 것은 제자리에!” 453)

: 아름다움의 보편성. 특정 신분이나 외양에 귀속된 것이 아님

 

“가문을 상징하는 그 나무는 가지를 치지 않고 자유롭게 자라게 해 주면 얼마나 아름답게 자라는가를 보여 준다.”(상동 454)

: 실용성과 아름다움의 동등한 가치

 

“현관으로 나 있는 널따란 계단에는 아름다운 장미꽃이 피어 있으며”(상동 454)

: 아름다움의 전형적인 상징으로 장미 사용

 

“그 해 봄에 견신례를 받은 남작의 어린 딸이 아름다운 들꽃을 한 다발 꺾었다. 그 꽃들은 모두 있어야 할 곳에 있었기 때문에 아름다워 보였다.”(상동 456)

: 아름다움의 조건. 아름다움은 감지되고 수호되어야 함.

 

“몸이 아름답게 불었네. 곧 터질 것 같아. 아무도 나만큼 멀리 오지 못했을걸. 나 꼬투리 속에 같이 있던 완두콩 중에서 제일 뛰어나!”(“한 꼬투리 속의 완두콩 다섯 알” 482)

: 자기중심주의 비판

 

“현자의 돌”

-“현자의 돌”은 ‘아름다움’의 가치에 대해 비중 있게 다룬 또 하나의 작품이다.

 

-“현자의 돌”은 “버드나무 아래에서”와 비교할 때 사실적이기보다는 옛 이야기 쪽에 가깝다. 사실적인(현실에 인접한) 동화일수록 결말이 비극적이다. “부싯깃통”과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는 같은 소재(불 켜기 기술)에 대조적인 결말이 특징이다. 왜 부싯깃통이 소원을 이루어줄 때 성냥은 그러지 못하는가? 사물과의 접촉으로 일어나는 일들은 민담의 주요 소재다. 나무 지팡이로 건드리는 것만으로 변화가 일어나고 마법이 일어난다. 램프를 어루만지고, 부싯돌을 강철에 문지르는 것으로 인류 무의식의 힘에 접근할 수 있다. 주인공은 그 힘으로 소원을 이루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19세기의 발명품 성냥은 나무(숲)와 화학물질(연금술)의 결합인데 왜 소녀를 살리지 못하는가? 왜 환상의 힘이 사실성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걸까? 동화가 사물의 사물화(??)를 예고하는가?

 

-인도의 현자의 네 아이가 세상의 진실, 선함, 아름다움을 찾으러 나선다. 현자의 돌은 진선미의 가치가 결합되어 만들어지는 보석이다. 영원불멸을 기록한 진리의 책장은 현자의 돌에 비추어야 읽을 수 있다. 진선미는 어떻게 알아볼 수 있는가? 사람의 내적 외적 오감을 통해서 감지된다. 오감을 통해 가치들을 평가하고 보호하고 격려할 수 있다. 이 작품에서도 아름답다는 말이 빈출한다. 그러나 아름다움이 진실과 선함보다 더 강조되는 것은 아니고 동등한 가치를 가지며 통합적이다.

 

-아래 인용구들은, 세상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일이 어렵거나, 세상에서 아름다움이 취급되는 모습이 마땅치 않다는 내용들

 

-“편안하고 아름다운 집에 앉아서 보는 것” 보다 아이들은 세상에 나가고 싶어 함.(540)

 

-사람 마음속을 들여다 본 아이는 아름다움이 “하찮은 생각과 조롱”에 의해 가려진 것과, 아름다운 사람들에게 주어져야 할 것이 흉측한 사람들에게 돌아가는 것을 발견(542)

 

-“가치를 알아주는 친구이자 보호자”가 있을 때 자라다 멈춘 장미나무가 가지를 뻗고 꽃을 피움. 아름다운 장미꽃이 세상에 나타나자, 곧바로 소유의 대상이 되고 더럽혀짐. “이 세상에서 아름다운 것들은 저렇게 되고 마는구나.”(545)

 

아름다움에 대한 노래를 불러도 듣는 이가 없음. 북치는 사람을 사서 홍보하자 비로소 사람들이 좋아함.(545)

 

-가치들은 낱낱의 파편으로 쪼개지고 갈려서 가루가 됨. 보이지 않는 먼지 상태로 존재함.(550)

먼지는 (1)작은 것 (2)희미한 것 (3)흔한 것 (4) 하찮은 것 (5) 덧없는 것들이나, ‘눈 먼 막내딸’이 소중히 간직하여 진선미를 결합

 

“소녀가 가져온 먼지가 떨어진 책에서 빛나는 아름다움은 무지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진리의 낟알이 떨어져 빛이 나는 ‘믿음’이란 글자에는 아름다움과 선함의 빛이 한데 어우러져 있었다.”(551)

-믿음은 영원한 사랑으로 이어진다. 결론은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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