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미야자와 겐지 과학관] 유연하게 상상하라
<미야자와 겐지의 과학관>
유연하게 상상하라!
우주는 137억 년 전 대폭발로 시작되었다. 이후 원시 태양이 만들어지고 태양 주위를 도는 행성들도 만들어졌다. 46억 년 전 활발한 용암 활동으로 뜨거웠던 최초의 지구는 행성 테이아와 격렬한 충돌로 위성 달을 갖게 되었다. 달이 일으키는 힘으로 지구의 바다는 밀리고 당겨진다. 우리 눈에 보이는 밤하늘 달은 한 달 주기로 초승달, 상현달, 보름달, 하현달, 그믐달로 모양을 바꾼다. 같은 시간이라도 우리가 어디에 서있느냐에 따라 달의 모습은 다르게 포착된다. 별은 핵융합으로 에너지가 만들어져 빛을 낸다. 무리지어 나타나는 별들에 이름을 붙여 이해를 돕는다. 내가 알기에 과학의 세계는 드러나는 현상과 수치로 설명되는 분명하고 물질적이고 실체적인 세계다. 답사로 방문했던 제주도 수월봉에서 14,000년 전 마그마와 바닷물이 만나 폭발한 결과로 1.5km의 거대한 화산 퇴적물이 만들어졌다. 지금 그 바다 앞에 선다고 해도 과거의 움직임이 보이지는 않고 다만 안내된 자료들로 과학적 사실을 짐작하거나 암기하려고 했다. 하늘과 땅과 바다를 보고 있으면 종종 왠지 모를 경이감을 느낀다. 자연이 주었던 그 감동의 이유는 알 길이 없고, 충분히 설명되지 않은 채로 경치를 감상했었다.
나는 미야자와 겐지가 그리는 세계를 거닐며 내가 자연을 바라보며 느끼던 경이감의 이유를 찾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곰에서 왕으로』의 나카자와 신이치는 미야자와 겐지의 작품에서 드러난 대칭성에 주목했다. ‘미야자와 겐지는 인간과 동물을 철저하게 분리하는 사고방식과 인간사회 안에 불평등이나 불의가 행해지고 있는 현실 사이에는 깊은 연관이 있다고 생각했’(나카자와 신이치, 『곰에서 왕으로』(동아시아), 22쪽)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현재, 과거, 미래가 지금 여기에서 함께 존재함을 끊임없이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겐지의 작품에 드러나는 과학적 세계는 물질성을 가진 존재들이 여러 층위의 시공간에서 존재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하모니를 이루며 묘사되는 듯하다. 이러한 통합적 관점은 ‘숲’이라는 개념으로 그의 작품에서 자주 등장한다. 온 생명들이 동등한 이 숲에는 동물, 식물과 더불어 마음씨 좋은 돌, 들판을 꿋꿋하게 지키는 멋진 전봇대도 함께 산다. 사실에 바탕을 이루어 환상이 아닌 듯하면서 마치 환상처럼 느껴지는 것은 통합된 세계, 숲을 넘나들기 때문이다.
통합된 시공간
미야자와 겐지의 『이기리스 해안』 에는 기타카미 산악지대를 가로지르는 사루가이시 강이 기타카미 강으로 합류하는 지점에 해안을 닮은 강가가 있다. 푸르스름한 응회질 이암층이 넓게 드러나있는 이곳을 걷다보면 영국에 있는 이기리스 해안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기에 화자는 ‘이기리스 해안’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강가나 절벽에 보여지는 이암층과 땅을 파면 계속 발견되는 이암층들은 신생대에 이 지역이 바다 둔치였다는 과학적 사실을 증명한다. 이러한 사실을 넘어 해안에 쌓인 모래와 점토에서 그 아래를 채운 지층으로 깊숙히 들어가 더 길고 먼 시간으로 이동한다. 겐지의 묘사는 사실 전달을 넘어 현재의 풍경에서 다른 시공간을 자연스럽게 오가는 느낌을 갖게 한다.
강가에 쓰러진 갈대들은 비가 많이 와서 물이 불어났을 때, 물속에 잠기고 강물의 유속에 쓰러졌던 기억을 회상하게 한다. 지금 여기 풍경을 맡고 있는 각각의 존재들은 다층적 시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미야자와 겐지는 곧 이암의 성분, 모양, 맛 등 물질성을 묘사하며 우리의 관점을 전환한다. 거시적 관점에서 마치 현미경으로 들여다보듯 빨려들어가는 듯한 관점의 전환은 익숙하지 않고, 갑작스러운 전개 또한 어질어질함을 느끼게 한다. 어쩌면 이 익숙하지 않음과 혼란스러움에 대한 자각은 미야자와 겐지가 우리에게 요구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통합된 이 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고정된 사고에서 한 발 나아가 시공간에 얽매이지 않는 유연함이 필요하다. 지금 여기 풍경을 맡고 있는 각각의 존재들은 다층적 시공간을 상상하게 한다.
숲에는 정답이 없다
그의 작품을 읽다보면 나는 어느 지점에 응고되지 않음을 느낀다. 「다이가와 강」에 등장하는 인솔 교사는 숲을 통과하며 다른 사람이 된다. 처음 숲에 들어선 그는 표정이 좋지 않고, 숲이 보여주는 단편적인 이미지에 집중한다. 과학책을 읊는 식으로 학생들에게 절벽을 이루는 암석을 설명하고 나무 수종을 나열한다. 그에게는 인솔 교사로서 해야 하는 정답 같은 말이 따로 있다. 꼭 그 말을 하지 않으면 안되고 틀려서도 안된다. 자칫 말을 잘못해서 정보가 이상하게 전달될까 전전긍긍하는 그가 걱정되기까지 한다. 하지만 곧 그의 관점이 바뀌는 지점이 찾아온다. 일행이 강물을 건너야 하는 상황에서 이제 돌은 유문암이라는 이름을 넘어선다. 돌 입장에서는 징검돌이라는 다른 상황을 맞은 것이고, 인솔 교사 입장에서는 정해진 답을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학생들이 건널 보다 좋은 길을 고민을 하는 것이다. 숲에는 도처에 알 수 없는 일들이 기다린다.
미야자와 겐지가 그리는 세계에서 ‘인솔 교사’의 책임은 과학적 사실과 정보를 알려주는 일에 머물지 않는다. 그가 드디어 웃을 수 있게 된 것은 거기에서 한발 벗어나, 돌들을 옮겨 일행에게 길을 만들어 주었을 때이다. 일행이 폭포에 도착했을 때 이제 숲의 절정이다. 철퍽철퍽 아이들의 신발 소리, 졸졸 떨어지는 물, 돌 위에 자라난 이끼, 매끄럽게 깎여진 돌, 그리고 폭포를 만든 물과 그 물이 만든 침식. 누구 하나가 특출나지 않고, 각각 다른 시공간을 살아온 존재들이 숲을 가득 채운다. 모두가 어우러진 통합된 숲에서 어떤 정답도 들이댈 여지가 없다. 이제 인솔 교사는 학생들의 질문에 걱정이 없고 여유로워보인다. 이 작품의 시작과 끝에서 보여지는 인솔 교사는 표정이 상반된다. 통합된 세계를 이해한 그에게 세상은 좀 더 느긋하고 그럴만한 곳이 되었다.
나는 한 가지 질문에 머문다. 미야자와 겐지는 세상을 왜 이런 관점으로 바라보기를 권유할까? 나는 그의 작품에서 말하는 과학관에 대해 고민하면서 막막함을 느꼈다. 내가 알던 과학과 그가 말하는 과학이 다르긴 다른데 어떤 차이가 있을까 도무지 아리송하기만 했다. 문득 어쩌면 내가 품고 있는 과학에 대한 전제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과학을 세계와 별개로 이해했던 전제 말이다. 그의 작품에서 과학은 어디 따로 떨어져 있거나 단절적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한 눈으로 포착되는 저 위의 하늘은 하나의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수많은 행성과 항성들은 가득한 이유를 품고 하늘을 꾸미고 있다. 미야자와 겐지가 바라보는 세계는 나와 너, 현재와 과거, 미래가 통합된 세계다. 유연하게 그 세계를 더 잘 넘나들 수 있다면, 통합된 세계 어디든 서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면, 그래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면 나는 조금 더 가볍고 상쾌한 마음을 가질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지진과 태풍의 위험으로 인해 계획되었던 일본행을 미루고 국내 루트로 변경했다. 다른 루트를 걸으며 조몬 시대의 사람들, 선사인의 삶에 접속이 가능할까하는 질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미야자와 겐지라면 어떤 말을 해주었을까? 기타가미 강가를 이기리스 해안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처럼 나도 후포리 이중 매장 유적에서 다른 공간, 다른 시간을 상상할 수 있을까? 겐지의 시를 계속 읊조리면 조금 도움이 될까? 남겨진 선사인의 흔적에서 그 너머를 가득하게 상상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