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9] 대칭의 만남
대칭의 만남
주제문 : 대칭의 만남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그림 카드」는 안데르센의 대칭 세계가 펼쳐진다. 아이와 카드, 판지로 만든 성과 촛불, 액자와 여행, 왕 왕비와 기사. 각각 다른 물질과 성격들이 만난다. 주인공 윌리엄은 판지로 오밀조밀한 성을 만들었다. 판지 성은 탑, 도개교, 성문, 리셉션이 다 갖춰져 있었다. 앙증맞은 성이었지만, 크기가 너무 커서 책상을 다 차지했다. 윌리엄은 성문을 열고 리셉션 안에 있는 그림 카드 액자들을 들여다보았다. 그림 카드들은 하트, 다이아몬드, 클로버, 스페이드 그림 카드들의 왕과 왕비의 초상화처럼 걸려있었다. 각각 모양의 카드는 하나씩 리셉션 아래로 내려와 윌리엄에게 왕국의 역사 이야기를 해준다.
윌리엄은 처음 이야기 나눈 하트 카드에게 ‘이 성은 내 것이니 아저씨도 내 하트 카드’라고 말한다. 하지만, 하트 카드는 자신은 왕과 여왕의 카드이지 윌리엄의 카드가 아니라고 선을 긋는다. 그러면서 카드는 넓은 세상 밖으로 나갈 수 있지만, 지루한 여행이기 때문에, 카드에 앉아 있는 것이 편안하고 즐겁다고 말한다. 카드는 많은 선택지가 있었지만, 자신은 ‘본연의 자신’으로 사는 것을 선택했다고 주장한다. 안데르센이 말하는 ‘본연의 자신’은 어떤 의미일까? 안데르센은 자아에 대한 관심이 많은데 나를 고집하는 건 결국 벽에 걸려있는 액자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보여준다. 왕, 여왕, 기사의 위치와 역할도 고정되어 있기 때문에 넓은 세상에서도 새로움을 받아드릴 여유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무리 넓은 곳에 가도 느끼는 것은 지루함뿐이다.
하트 카드와 클로버 카드는 각각 황금기와 암흑기를 보여주며 대칭적 구조를 보인다. 첫 번째는 빵과 버터이다. 하트 왕국은 황금기에는 빵에 버터를 앞뒤로 바르고 설탕을 먹을 수 있었다. 안데르센 동화에서 음식은 경제적 상태를 보여주는 지표이다. 음식을 마음껏 배부르게 먹을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었다. 반면 클로버 왕국은 왕과 여왕도 그런 빵을 먹지 못했다. 두 번째는 바로 교육인데 하트 왕국의 황금기 때 학교에 가지 않고 놀았고, 클로버 왕과 여왕은 학교에 가서 배워야 했다. 근현대 시대에 높은 교육 수준이 경제적 위치를 결정하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안데르센은 하루 종일 노는 것이 황금기를 보여주는 지표라고 생각했을까? 모두가 공평하게 교육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 시대의 윤리이다. 점점 평균 학력은 높아져 갔지만, 사회는 혼란스러워졌다. 안데르센은 학교, 교육, 지식은 사람들을 비판적으로 만들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에만 집중한다고 예상했다.
카드를 위해 켠 촛불에서 불이 번졌고, 성은 활활 타올랐다. 윌리엄은 겁이 나서 엄마아빠에게 달려간다. 훨훨 타는 성에서 카드들의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왕과 여왕들이 가야 할 길이라네. 그들의 카드들이 따라가야 할 길이라네” 불은 카드들을 춤추게 했지만, 또한 죽게도 했다. 죽어가는 순간에도 그들은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었다. 자신의 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종이와 불은 상반된 물질이다. 카드들이 넓은 세상이 지루했던 건 자신과 상반된 존재를 만나지 못해서였던 거 같다. 가장 가까운 존재는 자신을 다채롭게 만들 수 있다. 왜냐하면 현미경으로 다름을 면밀하게 관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 그런 다름으로 괴로워한다. 그럴 때 카드들처럼 춤추고 노래하는 건 과연 다름을 받아드리는 것일까? 불난 줄 알았다면 얼른 빠져나와야 하는 것일까? 손을 잘 씻지 않는 윌리엄은 모든 것이 끝난 후 손을 씻었다. 윌리엄은 이제 손을 잘 씻는 아이로 바뀌게 되었을까? 아니면 그 순간만 바뀐 것일까? 손을 씻은 후 윌리엄은 또 새로운 성을 짓고 있을 것이라고 상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