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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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세.소] 자연, 전략가들이 만드는 무대
[우.세.소] 인문세 ‘자연학 세미나’를 소개합니다
자연, 전략가들이 만드는 무대
2024.11.20. 이기헌
나에게 자연은 산골에나 가야지만 볼 수 있는 거였다. 사계절을 느끼고 공기를 마시고 흙을 밟고 살면서도 왜 그런지 그게 어디 따로 있는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다 2년 전 친구가 자연학을 공부하자며 권유했다. 꼭 알아둬야 할 훌륭한 지식이라니 끌려서 신청하게 되었다. 공지를 보니 선생님이 따로 없고 아는 만큼 발표해야 한다는 데, 발표 울렁증이 있는 나로서는 걱정이 앞섰지만 글쓰기 숙제가 없으니 조금 용기 내보자고 생각했다. 같이 공부하자고 옆구리를 찔렀던 친구는 금요일이 바쁘다며 하차했고 나는 지금 반장이 되어 세미나를 이끌고 있다.
공부를 시작할 때와 다르게 지금은 내 주변의 자연이 전과는 다르게 다가온다. 그들이 더 잘 보이고, 더 잘 들린다. 봄이면 금세 담벼락을 채우는 담쟁이를 보면서 막연히 자리 잡는 속도가 엄청 빠르다고만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그들이 뚜벅뚜벅 매일 걷고 있는 게 보였다. 종종 숲에서 무심히 지나쳤던 소리가 딱따구리의 나무 뚫는 소리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그게 뭐라고 이상하게 감동적이었다. 자연학책을 보니 아주 많은 생명이 저마다의 속도와 방법으로 길을 찾아 살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가 공부한 것은 훌륭한 지식이라기보다는 세상에 자기 전략 개발에 능수능란한 존재들의 생존법을 관찰한 것이다. 얼마전 나는 자연학 세미나를 소개하는 글을 써보라는 미션을 받았다. 덕분에 세미나가 어떻게 진행되어 지금에 이르게 되었는지 천천히 돌아보게 되어 좋았고, 생명이 전략을 펼치는 그 무대 곳곳이 얼마나 생기있게 작동하는지 정리할 수 있었다.
우리 집 담쟁이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
자연학 세미나 첫 시즌은 ‘공생’을 주제로 시작되었다. 자연을 생각할 때 적자생존, 약육강식 같은 법칙은 자연스럽게 연상되었다. 환경에 더 잘 적응한 자가 살아남거나, 남보다 더 강해서 포식자로 우위에 설 때 살아남는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그 외에 다른 생존 방식은 생각지 못했었다. 하지만 자연학은 첫 시즌부터 나를 내 상식 밖으로 데려갔다. 나는 우리가 읽은 책 린 마굴리스의 『마이크로 코스모스』에서 생물이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협력하며 진화했음을 알게 되었다. 30억 년 전, 미토콘드리아(mitochondria)라는 박테리아는 혼자 살다가 우연히 진핵세포(eukaryote) 안으로 들어갔다. 진핵세포는 미토콘드리아에게 살 만한 공간이 되어주었고, 미토콘드리아는 그 속에서 에너지를 만들어 진핵세포를 더 활발하게 성장시켰다. 그들은 상생의 전략을 꾀하며 생존 시스템을 발전시켰다.
상호부조의 생존 시스템은 세포 차원을 넘어 인류에게도 발견된다. 세라 블레퍼 허디의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은 협동 번식, 공동 육아를 했던 사람들을 쫓는다. 이 책에 따르면 아프리카 어느 수렵채집민은 육아 지원이 가능한 무리를 따라 자주 이주한다. 그만큼 생존과 육아가 깊이 관련되어 있었다. 어떤 부족은 결혼 후 처가에서 지내며 경험 없는 육아에 도움을 받고, 또 다른 부족의 아이들은 친족이나 마을 사람들이 임시 엄마가 되어 준다. 저자는 대체 가능한 돌봄의 흔적들을 보여주면서 인간이 전략적으로 돌봄을 제공하고, 조정하며 유연하게 진화했다고 말한다. ‘공생’의 관점으로 자연학을 공부하고보니 세상의 생명은 존재하기 위해 싸우고 경쟁하는 방법 말고도 서로 돕는 전략도 있음을 알게 되었다.
생명이 협력하면서 살아남았다는 말에 좀 더 구체적인 생명의 움직임을 보고 싶어졌다. 두 번째 시즌 ‘초록의 생명사’에서 식물들의 생존 전략은 더 다채로웠다. 이나가키 히데히로의 『싸우는 식물』을 보면 식물들이 생존하기 위해 싸우기도 하고, 서로 돕기도 한다. 그런데 그뿐이 아니었다. 식물들은 혼자 외롭게 고난을 이겨내고, 어떤 경우는 가스 같은 화학무기를 뿜어대거나, 독을 만들어 적을 쫓아내기도 한다. 손도 발도 뇌도 없는 식물들이 전략적으로 살려고 애쓰는 모습을 엿볼수록 초록의 생명이 경이롭고, 우아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국화쥐손이(학명 Erodium Stephanianum)는 땅에 씨앗을 박기 위해 씨앗 모양을 드릴처럼 진화시켰고, 손대면 톡 하고 터질 것만 같은 봉선화(학명 Impatiens balsamina)는 씨앗 주머니의 압력을 증폭시켜 주머니가 터지는 동시에 씨앗들이 사방으로 튀어나가게 만들어 번식했다. 끈질긴 생명력을 지닌 잡초들의 생존 전략도 눈길을 끌었다. 그들은 자주 뽑혀지는 삶에 대비하여 뿌리 아래에 씨앗을 왕창 남겨 둔다. 나는 텃밭이 지저분하다는 이유로 잡초를 뽑을 때가 떠올랐다. 그때 내 손에 머리채 잡힌 잡초는 생명 아닌 것으로 느껴졌는데, 이젠 그들을 볼 때마다 이름은 무엇인지,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는지가 궁금해진다.
출처pixabay
그렇게 다음 시즌은 ‘진화’라는 주제로 공부하고자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을 찾았다. 처음엔 다윈의 『진화론』부터 읽을 계획이었지만 요즘(?) 과학자들마다 진화론이 다르게 해석되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중에 우리의 눈에 포착된 과학자는 스티븐 제이 굴드(Stephen Jay Gould, 1941~2022)였는데, 그는 대중이 과학과 연결되기를 바랐던 사람이다. 과학이 결코 인간 삶과 무관하지 않고 사회적, 역사적 맥락에서 함께 논의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서 열정적으로 과학 대중화 운동에 앞장섰다. 27년간 쉬지 않고 <내추럴 히스토리>(미국자연사박물관)에 에세이를 게재한 것도 그 일환일 것이다.
출처pngwing
스티븐 제이 굴드는 ‘진화는 진보가 아니라, 다양성의 증가’라고 말했다. 생명의 진화를 발전의 관점이 아닌 다양성의 관점으로 보자는 의미였다. 진화를 말할 때 교육용으로 자주 언급되는 ‘인류 진화 과정 상상도’가 있다. 스티븐 제이 굴드는 이 그림에 대해 지적했는데, 처음엔 무엇이 문제라는 것인지 아리송했다. 네 발로 걷던 영장류가 발전하여 점차 두 발로 걷다가, 그다음에는 무기를 들고, 오늘날 현생 인류의 모습으로 발전하는 순차적 도식은 나에게 당연한 상식이었다. 하지만 이런 직선적이고 단선적인 세계관은 무의식적으로 인류의 진화를 진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정말 그랬다. 나는 과거 열등하고 미개한 인류가 오늘날 완성된 인류로 도달했다고 인식하고 있었다. 스티븐 제이 굴드의 진화론을 살펴보면서 하나의 정답, 하나의 목적만 갖게 하는 단선적 세계관이 다양성을 못 보는 생각 방식이고, 종단에는 인종주의와 같은 위험한 생각으로 귀결될 수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가 사는 마을에는 베트남, 중국 등 외국 사람들이 많이 산다. 그들을 볼 때 다른 생김새나 피부색이 순간순간 눈에 들어오는 동시에 나는 자연학에서 공부한 생명들의 생존 전략을 떠올린다. 다르게 보이는 마을 사람들이 다양한 전략의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지리적, 기후적, 또는 그외의 어떤 조건들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얼마나 다양하게 살아갈까. 나는 세상에 다양한 생명, 다채로운 삶의 방식이 존재한다는 것을 계속 공부하고 싶어졌다.
생명들이 무한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무대, 지구에서 그 다양함을 더 포착해보자며 ‘돌덩이 지구’ 시즌을 계획했다. 로버트 M. 헤이즌의 『탄소 교향곡』을 읽으며, 생각지 못하게 ‘생명’을 더 깊게 이해해 볼 수 있었다. 그는 생명의 기원을 말하기 전에 우리가 생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한다. 생명이라는 어휘가 주는 인상으로, 우리는 대상의 우주적 가능성에 대해 놓치고 있다고도 말한다. 펄쩍 뛰는 개구리나 흔들리는 자작나무 등 보이는 것만으로 생명을 인식하기보다는 그들의 독특한 구조와 성분을 이해하라는 것이다. 그에게 생명은 번식하고 성장하고 환경 변화에 대응하며, 참신한 자신의 속성을 진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들이다. 기온에 따라 달라지는 바람, 아래로 흐르는 물, 그것들에 깎여지는 돌도 모두 생명이다. 그 어떤 것도 홀로 떨어져 존재하지 않고 모두가 전체의 필수적인 부분이 된다.
나도 어휘에 붙들리지 않고 생명에 대한 다른 정의를 해보고 싶었다. 미토콘드리아는 살 집을 제공하는 진핵세포에게 에너지를 나눠주고, 식물들은 사람, 동물, 바람 등을 이용해 열심히 씨앗을 퍼뜨린다. 수렵채집민들은 우리집 애들, 옆집 애들을 같이 돌보며 부족의 명맥을 이어간다. 그렇다면 생명은 각자 연결된 네트워크 안에서 자기의 역할을 잘 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각자의 방식으로 다르게 살아가지만, 열심히 자기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는 점에서 생명은 하나로 느껴지기도 한다. 자연학 공부는 다양한 생명의 존재 방식을 탐구하는 공부였다. 나는 그 다양함이 얼마나 광대한지 알지 못한다. 오히려 공부할수록 모르는 그 세상이 더 커지는 느낌을 받는다. 하지만 계속 알고 싶다.
공부 전략을 찾는 세미나
자연의 무수한 종들의 생존 전략처럼 자연학 세미나에도 공부를 만들어가기 위한 저마다의 전략이 있다. 자연학 세미나는 공부 방식에서 다른 세미나들과 차이가 있다.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맡은 분량을 돌아가면서 발표한다. 발표를 위해 자연학책을 기준 삼아 관련된 다른 책, 유튜브, 인터넷 등에서 자료를 찾고 정리하여 프리젠테이션을 만든다. 꼭 프리젠테이션을 준비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발표를 효과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자주 사용하고 있다. 발표를 준비할 때 이 책의 내용을 어떻게 잘 전달할 수 있을까 하는 것은 세미나원 모두에게 중요한 임무가 된다. 좋은 선생님은 많이 알고 있는 선생님이 아니라 잘 전달하는 사람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우리는 세미나 시간 동안 책에서 맡은 부분의 선생님이 되려고 애쓴다. 실력 있고 유능한 선생님을 초빙해서 배우면 더 좋을 것 같았는데, 직접 발표를 준비하니 학인들의 만족도가 높았다. 그래서 그런지, 발표하는 학인들의 목소리에는 힘이 느껴진다.
평소 책 읽기를 좋아하는 손효현 선생님은 발표 끝에 늘 우리가 보는 책의 내용과 관련된 다른 책을 소개해준다. 공부 내용에 대한 궁금증을 더 세부적으로 찾고 혹은 다른 관점을 찾아서 다각도로 관찰한다. 나는 책 소개까지는 어렵지만, 발표를 준비하다보면 궁금증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생길 때가 있다. 그러면 그 내용을 따라 (인터넷 안에서) 멀리까지 다녀오게 된다. 안 되는 영어, 일어를 번역해가면서 정보를 찾는다. 어느 때는 궁금증에 대한 답을 발견하기도 하고, 그렇지 못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 자체도 발표에 재미를 더한다. 권수현 선생님은 외국어와 친해서 자료 찾기에는 단연 선수다. 언젠가 스티븐 제이 굴드의 『경이로운 생명』을 읽으며 약 5억 년 전, 바다를 품고 있는 산을 알게 되었다. 그곳은 캐나다 로키산맥의 버제스 셰일(Burgess Shale fauna)로 바다 생물 종이 대폭발한 시기인 캄브리아기의 화석이 대거 발견된 곳이다. 학인들은 책을 읽으며 이 산에 가서 직접 화석을 두 눈으로 보고 싶다고 말했다. 권수현 선생님은 우리의 말에 금세 검색했는지 버제스 셰일 사이트를 단톡방으로 보내주었다. 덕분에 캄브리아기 바닷속에 들어온 것처럼 3D로 재현해 둔 수많은 생물들, 그리고 현재 화석의 모습을 공부할 수 있었다. 학인들의 공부 전략은 세미나라는 무대를 생기있게 만든다.
<캄브리아기 바다, 생명체의 재구성> 출처wikipedia
나는 얼마전 내년에 공부할 자연학 세미나 과정을 고민하고 있었다. 가을 숲을 여러 색깔로 채운 나무들, 로드킬 당한 동물 주위에 모여있는 까마귀들, 무척 빠르게 떠내려가는 듯한 구름들 등 눈에 띄는 대로 연구대상 후보에 올랐다. 이런 질문을 들고 다니던 중에 오선민 선생님과 담소를 나누다 바람에 대해 공부해보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바람과 날씨의 길을 살펴봐야겠다. 우리는 그때 또 무엇을 보게 될까? 책이 어려울까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어떤 책이라도 그 책을 읽는 방법을 개발할 나에 대한 기대만 있기 때문이다. 자연의 모든 것들이 자기 전략을 갖추며 생명력을 키우듯이 공부의 방법을 하나씩 찾아가보련다.
<읽은 책들>
○ 로버트 M. 헤이즌, 김미선 옮김, 『지구 이야기』(뿌리와 이파리)
○ 린 마굴리스, 도리언 세이건, 홍욱희 옮김, 『마이크로 코스모스』(김영사)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판다의 엄지』(사이언스북스)
○ 세라 블레퍼 허디, 유지현 옮김, 『어머니,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이도스)
○ 데이비드 몽고메리, 이수영 옮김, 『흙』(삼천리)
○ 이나가키 히데히로, 박유미 옮김, 『싸우는 식물』(더숲)
○ 소어 핸슨, 하윤숙 옮김, 『씨앗의 승리』(에이도스)
○ 레나토 브루니, 장혜경 옮김, 『식물학자의 정원산책』(초사흘달)
○ 스티븐 제이 굴드, 홍욱희 · 홍동선 옮김, 『다윈 이후』(사이언스북스)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원더플 라이프』(궁리출판사)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옮김, 『인간에 대한 오해』(사회평론)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명주 옮김, 『플라밍고의 미소』(현암사)
○ 스티븐 제이 굴드, 김동광 · 손향구 옮김, 『레오나르도 다 빈치가 조개화석을 주운 날)』(세종)
○ 도널드 R. 프로세로, 김정은 옮김, 『지구 격동의 이력서, 암석25』(뿌리와이파리)
○ 요시다 다카요시, 박현미 옮김, 『주기율표로 세상을 읽다』(해나무)
○ 로버트 M. 헤이즌, 김홍표 옮김, 『탄소 교향곡』(뿌리와이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