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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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진실의 증거
진실의 증거
「바라우미 초등학교」에 나오는 ‘나’는 증거를 통해 밝혀진 진실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런 그가 바라우미 들판에서 우연히 여우초등학교를 방문하게 된다. 그는 이 경험이 진실의 증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실제로 여우초등학교를 보았고, 본 것이 머릿속에 있으며 자신이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으므로 자신에게는 논리적인 증거인 셈이다. 그러면서 자신의 이야기를 믿는 사람에게도 진실로 존재하게 된다고 말한다. 이것은 증거에 의해서만 진실이라고 믿을 수 있다는 자신의 생각과 모순되는 주장이다. 믿으면 진실이 된다는 것은 자신만의 논리를 통해 타인에게 진실을 강요하는 것과 다름없다. 그가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선생님이라는 것이 의미심장하다. 자연을 자신의 논리, 즉 인간 중심적인 사고로 증명한다는 것이 얼마나 설득력이 떨어지는 일인지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인정하게 된 것이다.
이런 깨달음은 정해진 길이 아니라 들판을 멋대로 다니는 여행에서 얻을 수 있었다. 자신이 학생들을 가르치는 학교, 정해진 규칙대로 생각하고 따라야 하는 공간에서는 절대 발견할 수 없는 깨달음이다. 또 그런 경험을 하면 피곤해지고 계산을 할 수 없게 된다고 경고한다. 인간의 입장에서 사냥 대상으로 보는 여우 말고 여우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여우를 생각하게 되면 여우와 인간이 자연에서 동등한 존재로 살고 있다는 대칭적 사고를 하게 되는데, 그러면 논리적이고 인간중심적인 사고방식으로는 불편해지기 때문이다.
「바라우미 초등학교」에는 인간과 여우가 대칭된다. 인간에게 찔레나무로 둘러싸인 담장은 진로를 방해하는 울타리일 뿐이지만 여우에게는 훌륭한 학교이고 집이고 자연이다. 인간의 학교는 당연하지만 여우의 학교는 당연하지 않다. 인간에게 여우는 덫을 놓아 없애야 할 대상이지만 여우에게 인간은 언제든 올 수 있는 손님, 즉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다. 인간은 덫으로 여우를 잡으려 하지만 여우는 인간이 덫에 걸려 넘어질까 봐 덫을 놓는 것을 금지한다. 인간에게 수렵이 임업을 위해 여우를 없애는 방법이라면 여우에게 수렵은 먹고 살기 위한 방편이다. 수업 참관을 하면서 점차 ‘나’는 기울어져 있는 비대칭성을 느끼고 혼란에 빠진다.
수신이라는 과목에서는 정직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가르치는데 그 예로 ‘가장 좋은 덫’은 덫이라는 것을 잘 알 수 있는 덫이라고 한다. 이 부분에서 작품을 읽는 나도 머리가 아파졌다. 인간의 입장에서 여우가 잘 잡히는 것이 좋으니까 좋은 덫이라는 뜻일까, 여우 입장에서 그러니까 잘 피하라고 가르칠 수 있으니 좋은 덫이라는 것일까. 우리가 일상적으로 쓰는 ‘좋은’이라는 말도 실은 누구를 기준으로 하느냐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무의식적으로 인간에게 ‘좋은, 유리한, 편리한’ 덫을 여우에게도 좋은 덫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복잡해진 것이다.
이 동화는 우리가 진실이라고 여기는 것들은 얼마나 인간 중심적이고 이기적인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논리적이라고 말하는 증거들은 허약하기 이를 데 없고 자기 머릿속에 그려진 것만으로 충분히 논리적이므로 믿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인간이 아닌 여우의 학교가 있고 그곳에 자신이 다녀왔다는 것이 진실임을 증명할 수 있는 물질적인 증거는 없다. 하지만 원래 이날 자신의 목적이었던 화산탄 조각을 여우초등학교에 기증하고 돌아온 ‘나’에게 이 이야기는 계산이나 논리에 근거하지 않지만 대칭성이라는 진실의 증거가 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