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 에세이] 작다는 것
기술 인류학 / 동사의 맛 에세이 준비 / 2024-11-28
작다는 것은
동사로 식탁을 차린다면 어떤 동사를 고르면 좋을까? 따끈한 햅쌀밥, 칼칼한 국물, 시원하고 아삭한 김치, 겨울이니까 햇김에 참기름 간장까지 올려 차린 동그란 밥상을 먼저 떠올려 본다. 밥상 위엔 계절이 들어와 있구나. 그렇다면 “변한다”로 할까? 누군가의 노고가 들어왔으니 “일하다”로 할까? 김치랑 간장이라면 “발효하다”라는 말도 떠오른다. 이상고온에도 돌아온 겨울 김은 “자라다”, 참깨는 “기르다”, 그릇에 “담다”, 수저를 “잡다”, 그리고 “먹다.” 동사로 차린 식탁은 소박하고도 풍요롭구나. 동사 하나하나가 깊이 맛을 음미하기 충분하다.
기술 인류학 세미나에서 지난 달까지 읽은 책은 『작은 것이 아름답다』(문예출판사 2024)였다. 읽기 범위를 따라가기에 급급한 참가자(나)에게 선생님이 “작다”와 “크다”를 비교하며 동사의 맛을 보는 법을 예시해주셨다. 그 시작은 규모의 문제를 다룬 장에 나오는 다음 세 문장이었다.
“지금까지 설명한 거대주의라는 우상 숭배는 (특히 운송과 통신 영역에서) 근현대 기술을 낳은 주요 원인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그 결과는 분명하다. 고도로 발달한 운송과 통신 체계가 엄청나게 강력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데 그 결과 사람들은 뿌리 뽑힌(footloose) 존재가 되었다(82).”
크다는 것은 뿌리 뽑는 것이다. 기술이 크면 많은 사람들을 운반하는 열차가 탄생한다. 사는 곳이 크면 도시가 된다. 작은 일터들이 기업과 산업단지로 커지고, 토착 지역들이 근대 국가가 된다. 사람들은 도시에 살면서 직장과 국가에서 중앙 집중된 체계의 일원이 된다. 매뉴얼대로 행동하는 관료 사회에서 사람들은 자기가 있는 곳이 전체적으로 어떤 모양인지 알 길 없는 채로, 자기에게 일을 시키는 자가 누구인지 접촉해 본 적 없이 불가해함을 노력과 의지로 덮으며 살아간다. 뿌리 뽑힌다는 것은 아무 관계도 없게 된다는 뜻이다. 추구하는 목적과 하는 행동이 나라는 사람과 상관이 없는데도 그 일을 계속 하면서 타락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와 반대로 뿌리 내린다는 것은 관계를 구체적으로 맺어가는 것이다. 밥과 국이 담긴 따뜻한 그릇과 바삭바삭 구운 김을 잡을 때처럼 접촉이 일어나고 질감을 느끼는 만남이다. 뿌리는 솜털 같은 잔뿌리들을 내면서 진행한다. 진행하는 중에 닿는 것들을 파악하려고 시도한다. 뿌리에서 작은 활동들이 날마다 일어나고 이어진다. 꼭 필요하고 실질적인 이해의 관계들이 계속해서 새롭게 일어난다. 뿌리 내린다는 것은 작은 목적들을 수용하면서 가는 것이다. 계속해서 발생하는 목적들과 활동들을 많이 겪는 것이다. 이루어야 할 것을 미리 정해놓고 이루어지는지를 보는 것은 큰 것이다. 작은 것은 겪어나가면서 새로운 전망들이 포착되는 것이다. 모퉁이를 돌 때마다 처음 보는 목적들이 나타나는 것이다. 사물, 생물, 때와 얽히는 것이다. 작은 것은 진행의 세계 속에서 자기가 내린 뿌리의 강도와 탄성을 만들어 가는 것이다. 조건 속에서 무얼 할 수 있는지 알게 되는 것이다. 작은 것은 많은 일을 겪는다. 겪는 과정에서 잔뿌리들은 날마다 묻고 해석을 안으로 들인다. 실질적인 욕구와 필요가 일어남에 따라 자기답게 움직여 간다. 작은 것은 자기 뿌리로 머무는 것이다. 자립하는 것이고 자율적인 것이다. 수준을 높이는 것이다. 하나의 목적 달성으로 수렴하지 않고, 이어지는 문제들로 발산하는 것이다. 문제는 작은 것이다. 문제는 옳은 것이다.
슈마허 선생님의 세 문장에 담긴 동사 두 개를 디딤돌로 해서 오선민 선생님의 해석의 불 세례를 받았다. 선생님은 그 주에 “작다는 것”에 대한 후기를 적어보라고 제안하셨지만, 나는 혀가, 아니 손가락이 얼떨떨하게 굳어서 책이 끝날 때까지 정리하지 못했다. 오늘, 동사 에세이 초안 잡기 과제 시간을 빌어 정리해둔다.
‘작다’는 것은 일단은 ‘동사’가 아니니까, ‘작아지다’로 해서 글을 잡아볼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