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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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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와 겐지] 수정(2)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

작성자
보나
작성일
2024-12-01 22:59
조회
41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

 

우리는 자신의 잇속을 따지지 않고 행동하며 호의를 베푸는 사람들을 어리석다고 생각한다. 한편에서는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며 착하게 살아야 한다는 사회적 가르침을 받는다. 이처럼 다양한 가치관이 반영된 사회적 메시지가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갈피를 잡기 어렵다. 이에 미야자와 겐지는 옳고, 그름을 분별하기 이전에 선악을 가르는 자신의 잣대와 그 잣대의 기반이 되는 사고체계를 검토해 보기를 제안한다. 단지 무엇이 옳은지를 재단하는 사고방식은 피상적이기 때문이다. 만물에 혼이 있다고 생각하는 애니미즘을 기반으로 한 미야자와 겐지의 동화는 우리의 사고체계 자체를 뒤흔든다. 자신의 욕망과 기준에 따라 쓸모를 재단하고 쓸모가 없으면 배제 시키는 것이 당연한 우리의 상식은 숲속 세계에는 통용되지 않기 때문이다. 다름을 이유로 이웃의 조롱을 받지만,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보자는 마음씨 고운 화산탄의 가르침을 통해 미야자와 겐지의 숲속 세계를 좀 더 살펴보자.

사화산(死火山) 기슭의 들판에 베고라는 별명을 가진 둥근 모양의 크고 검은 화산탄이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고 자리 잡고 있었다. 베고는 소가 움직이지 않을 때 소가 돌이 되었다는 표현으로 쓸모없다는 의미에서 주변의 모난 돌들이 붙여준 별명이다. 모난 돌들과 베고는 모두 화산에서 분화했을 때 함께 떨어졌는데, 베고만 둥글둥글한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사화산의 모난 돌들과 주변의 떡갈나무, 여랑화, 작은 모기와 베고 위에서 자란 이끼는 모두 자신의 잣대를 기준으로 베고의 모습과 크기, 쓸모없음을 조롱했지만 베고는 화를 내지 않는다.

반전은 들판에 도쿄 제국대학의 지질학자들이 베고를 발견했을 때 일어난다. 작은 이끼에게 놀림을 당하던 베고는 지질학자들에게 화산이 분화했을 때의 상황을 설명해주는 완벽한 화산탄의 표본이었다. 화산탄 위에 살면서 베고를 천년만년 변하지 않을 검댕이라고 놀리던 작은 이끼들은 화산탄 표본에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베고에서 떼어지게 된다. 미야자와 겐지는 다양한 삶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숲속 세계에도 그들의 윤리가 존재함을 직간접적으로 보여준다. 지질학자의 등장과 함께 베고를 발판 삼아 자랐지만, 그 고마움을 모르던 이끼는 베고와 입장이 역전되어 쓸모없는 존재가 되는 사태에서 우리는 자신을 성장시켜 주는 존재의 고마움을 잊지 말라는 교훈을 얻는다. 또한 주변에서 들리는 대로 편협한 관점으로 상대를 놀리면 좋지 못한 일이 생길 수 있으니 주변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한다든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준다.

그런데 베고는 자신이 쓸모없다고 놀림을 받던 사화산의 들판이 완벽한 화산탄의 표본으로 인정받는 도쿄 제국대학의 연구실보다 밝고 즐거운 곳이라고 말하는 부분에서 우리는 고개가 갸웃하게 된다. 이는 완벽한 화산탄에 붙은 작은 이끼를 대하는 지질학자들의 태도로 그 이유를 짐작해볼 수 있다. 이끼는 지질학자들에게 하등의 쓸모없는 것으로, 이끼를 바로 제거함으로써 쓸모없는 존재를 대하는 연구실 학자들의 이분법적 사고체계를 보여준다. 지질학자의 연구실은 쓸모에 따라 존재를 나누고 그 존재를 부정하는 무정한 곳이다. 연구실에서 필요한 완벽했던 화산탄은 그 쓸모가 다하면 이끼가 그랬던 것처럼 바로 버려질 것을 베고는 알고 있었다. 세밀한 관찰을 통해 베고는 지질학자의 태도에서 앞으로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예견할 수 있었다.

연구실에서 베고를 상상해본다. 베고는 연구실에서 자신이 버려질 것을 두려워하며 슬퍼하고만 있을까? 베고보다 작았던 새싹은 몇 번이나 헌 잎을 버리고 새잎을 피우며 자라기를 반복해 떡갈나무가 되어 베고의 다섯 배나 커졌고, 황금 왕관을 쓴 것처럼 고운 자태를 뽐내는 여랑화는 매년 눈이 오면 꽃이 지고 다시 태어나기를 반복해야 한다. 하늘은 때때로 차가운 눈과 비를 내려 안개가 자욱해져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하지만, 그 비는 떡갈나무를 자라게 했고, 여랑화의 생명수가 된다. 그리고 하늘은 다시 쨍쨍 빛을 비춘다. 베고는 사화산의 들판에서 오랫동안 하늘과 바람, 달과 별을 관찰하며 자연의 모든 것은 순환의 원리에 따라 서로 얽히어 쉼 없이 변하고 있음을 배웠다. 또한 친구들과의 경험을 통해서 베고는 좋고 나쁨의 구별은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다를 수 있음을 알았다. 베고는 친구들의 놀림에 기분이 나쁘지 않아서가 아니라 친구들이 그럴 수 있음을 인정할 만큼 세상을 바라보는 넒고, 깊은 안목 덕분에 너그러웠다.

애니미즘이 지배적인 숲속 세계에서 만물은 모두 자신에게 주어진 조건과 능력에 따라 다채로운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세계에서 자신과 다르다는 것은 일상의 지루함에 놀림의 대상이 될지언정 쓸모없음을 이유로 존재 자체를 제거해버린다는 사고가 부재한다. 동물, 식물은 물론이고 돌멩이, 전봇대, 기찻길의 신호기와 산도깨비까지 모두가 다양하게 자신의 의견을 밝히며 살아가는 숲속 세계의 이야기는 당연하다고 여겨지는 우리의 상식이 어느 시대, 누구에게 통용되는 상식이냐고 묻는다. 베고는 연구실에서도 숲속 친구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온몸으로 말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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