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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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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젖은 후 나무 불꽃

작성자
오켜니
작성일
2024-12-09 18:11
조회
54

채식주의자/최옥현

 

젖은 후 나무 불꽃

 

영혜가 숲으로 간 날도, 그로부터 3개월 후 인혜가 영혜의 정신병원을 방문한 날도 비가 왔다. 이번 정신병원의 방문 목적은 더 특별하다. 숲에 다녀온 후 영혜는 먹기를 거부하였고 큰 병원으로의 이송 여부를 결정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숲속, 나무 둥치, 콘크리트 병사(病舍), 버스 밖의 모든 것이 비에 젖는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 세찬 빗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인혜는 영혜의 정신병원으로 가면서 계속 숲을 응시한다. 영혜가 병동 환자들의 산책 대열에서 빠져 나와 밤 9시에 발견되기 전까지 있던 숲이 바로 저 숲이었을까? 저기 저 비탈이었을까? 그곳에서 어둠과 빗물에 푹 젖은 영혜는 무슨 생각으로 나무 옆에 가만히 서 있었을까? 인혜는 계속 숲을 응시하고 과거를 응시하고 영혜에게 마음으로 묻고 자신에게 묻는다.

과연 먹기를 거부하는 영혜만이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에, 삶과 죽음의 경계에 있는 것일까? 꿈속 인혜의 왼쪽 눈에서는 늘 피가 흐른다. 인혜는 죽는 날을 선고받을 줄 알았는데 자궁폴립만 떼게되어 실망했으며, 자궁폴립의 상처는 아물지 않고 그 구멍으로 자신을 집어삼킬 것 같았다. 그녀는 이른 새벽 미친 듯이 산에 올라가 인내력이 바닥난 삶이 끝나길 소망하였다. 자신의 삶을 복기해보면서 영혜가 먼저 빠르게 지나간 길을 자신도 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비에 젖으면서 어쩔 수 없는 삶의 조건들을 받아들이고 있지만 인혜는 물기 하나 없이 건조하다. 너무나 건조한 너덜너덜한 육신. 세찬 빗속에서 뿌리를 내려 자신의 몸으로 물을 끌어올려야 하는데 영혜도 인혜도 그 방법을 알지 못한다.

인혜는 어린 시절에 주사 폭력이 심한 아버지의 해장국을 끓였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열심히 돈을 벌고 아이를 키웠다.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할 바를 열심히 해왔다.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지쳐 쓰러지기 일보 직전의 인혜에게 잠깐만 참으라는 남편의 말은 그녀를 무너뜨린다.

축성산의 숲을 바라보며 인혜는 영혜의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인혜는 자신보다 영혜의 삶이 더 바짝바짝 말라 있었음을 느낀다. 영혜에게 집은 이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곳이었다. 집은 아버지의 폭력을 꼼짝없이 당하는 곳이었다. 아버지가 오토바이에 매달고 다닌 개의 운명처럼 자신도 아버지의 집에 묶여있다. 어린 시절의 인혜는 집보다 숲이 더 무서웠지만 영혜는 숲보다 집이 더 무서웠다. 그러면서 인혜는 아주 조금 영혜를 이해하게 된다. 영혜가 왜 자신보다 더 빠르게 사회의 정상성이라는 경계를 넘어섰는지. 영혜는 집이라는 공간에서 고기를 먹는 일은 온갖 폭력이 겹겹이 쌓인 공간에서 다른 생명을 먹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녀의 먹지 않음속에서 그녀를 둘러싼 먹음의 폭력을 대면할 수 있다. 고기를 먹어라, 남편을 잘 먹여라, 씹지 못하면 엑기스를 마셔라, 연하작용이 안되면 콧줄을 끼고 식도에 미음을 넣어라, 목혈관으로 단백질을 주사하라! 영혜가 토하면서까지 먹는 것을 거부하자 콧줄에 미음을 넣고 진정제 주사를 놓아서 그녀를 억지로 재워 토하지 못하게 한다. 먹음과 먹지 않음에 대한 그녀의 의지적 권리를 완전히 박탈하는 것이다. 영혜는 인혜에게 말한다. 진정제 주사가 너무 싫다고. 먹지 않겠다는 일념 하나로 사는 영혜에게 진정제 주사는 그녀의 마지막 의지조차 폭력적으로 막는 것이다. 영혜는 말한다. 자신을 이해하려는 사람은 아무도 없고 그저 약을 먹이고 주사를 찔러 자신을 길들인다고.

인혜는 자식을 젖 먹일 때 입던 보라색 낡은 티를 입고 산으로 자살을 하러 갔다. 그 보라색의 낡은 티는 그녀가 힘들 때마다 힘을 주던 도구였다. 그녀는 자식을 키워야 한다는 의지로 꾸역꾸역 여기까지 온 것이다. 그녀에게 웃음을 짓게 하는 유일한 존재인 아이. 그녀가 위대한 모성을 장착하고 있어서 산을 내려온 것이 아니라, 그저 책임져야 할 아직은 연약한 아이가 있어서 그녀는 산을 내려온다.

 

– 인혜는 영혜가 진정제 주사를 맞는 것을 거부한다.

– 비가 그치고 해가 비치는 6월의 날씨, 비가 갠 후(젖은 후) 나무와 숲들은 불꽃 같은 푸른 생명력을 내뿜는다.

– 인혜는 숲을 응시하며 영혜를 살려내라고 강력히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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