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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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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얼굴(초고)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2-09 18:42
조회
63

『채식주의자』를 읽고

 

 

주제문 :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힘을 다하는 얼굴이 바로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이다.

 

한강의 『채식주의자』는 중편소설 “채식주의자,” “몽고반점,” “나무불꽃”들을 합친 장편소설이다. 세 명의 각기 다른 화자가 등장해 가족의 식사라는 시공간을 중심축으로 세 겹으로 포개지는 이야기들을 이끌어간다. 한다. 한 인물이 정상성에서 이탈하고, 외도를 저지르고, 죽음에 다가가는 과정의 각 구간을, 그와 긴밀하게 접촉한 세 인물이 이어받아 서술한다. 세 명의 인물을 통과해 나온 이야기를 읽으며 독자는 자신과 별다를 것 없는 일상에서 출발해, 계속된 이탈의 과정을 거쳐 생의 끄트머리까지 따라가게 된다. 인물이 물리적이고 정신적인 시공간을 빠른 속력으로 통과해 나가는 과정에서 우리가 속해 있는 가정, 가족, 일, 규범, 도시, 의사소통, 생사라는 겹겹의 층을 뚫고 경계를 허물면서 외부라고 여겨지는 방향을 향해 나가는 광경을 보게 된다.

 

얼굴

『채식주의자』는 그 구성과 의미의 차원에서 여러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소설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지는 여러 겹의 베일에 덮여 있어 끝내 드러나지 않는다. 아니, 여러 층위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만약 나에게 제목을 새로 달아보라고 한다면 ‘드러나지 않는 얼굴’이나 ‘가려진 얼굴’을 제안했다가 편집자와 작가의 반대에 부딪칠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이 소설의 주제는 가려짐에 있기 때문에 그 주제를 드러내는 제목은 어울리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1부 “채식주의자”까지 읽었을 때 그리스 로마 신화에 나오는 프시케와 큐피드 이야기가 떠올랐다. 아름다운 프시케는 큐피드와 결혼을 했지만, 남편은 밤에만 집에 들어온다. 프시케에게는 남편의 얼굴을 보아서는 안 된다는 금지 명령이 주어져 있다. 프시케는 어느 밤 남편이 잠든 틈에 보아서는 안 될 얼굴을 본 죄로, 온갖 고난을 겪으며 죽음의 세계까지 다녀오게 된다. 프시케는 영혼을 의미하는 이름이다. 영혜는 결혼 5년차의 젊은 여성이다. 남편은 직장일로 얼굴을 볼 수가 없다. 프시케처럼 그의 얼굴을 보는 것이 금지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의 삶은 남편의 얼굴을 보지 않거나 보지 않아도 되는 형태로 양식화되어 있다. 낮에는 자기 방에 들어가 있고, 식사 때는 마주 앉지 않고 비스듬히 앉는다. 영혜는 하루 종일 혼자 새 아파트를 지낸다. 그리고 꿈에서 본 피웅덩이에 비친 얼굴에 사로잡힌다.

영혜와 세 화자 앞에 반복해서 얼굴들이 나타난다. 영혜는 꿈에 드러나거나 가려진 얼굴에 사로잡혀 이상 행동을 한다. 남편과 형부는 자기 아내와 서로의 아내의 얼굴을 훔쳐본다. 남편과 형부는 지하철 어두운 차창에 떠오르는 자기 얼굴을 본다. 도대체 이 얼굴들은 왜 떠오르는가? 낯설거나, 불분명하거나, 어두운 이 얼굴들이 뜻하는 것이 무엇일까? 인간의 영혼이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너무 관념적인 표현일까? 이런 표현이 불편하게 느껴진다면 자체가 우리의 문명의 속성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우리는 인간이란 영혼이 있는 존재라는 점을 외면하거나 무시하는 문명을 허용하고 있는 것 아닐까? 얼굴이란 말의 어원과는 상관없는지 모르겠는데, “얼”이란 영혼을 뜻한다. 영혼이라는 뜻의 프시케는 자신이 영영 잃어버린 얼굴을 다시 마주하기까지 아름다움과 젊음과 생명력을 모두 바쳐야했다. 그리고 영어 “face”에는 마주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우리는 익숙해진 하루하루 속에서 정작 직면해야 할 어떤 것에서 얼굴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럼 그 마주해야 할 그 무엇이란 무엇일까? 영혜를 둘러싼 세 화자의 진술이 엇갈린다. 그들 모두 영혜의 마음과 행동의 이유 등을 투명하게 해석하고 전달해주는 것은 아니다. 세 화자는 각자 저마다의 마주해야 할 것들이 있을 뿐이다. 그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영혜의 꿈 속의 피로부터 시작되어 그들의 흰 옷과 그릇에 뿌려진, 영혜 몸을 뚫고 나온 피다.

 

피, 희생

피는 경계를 뚫고 분출한다. 피가 남편과 형부의 흰옷에 뿌려지면서 그들의 경로는 변경된다. 남편은 자기의 일상과 정상을 지키기 위해 아내를 버린다. 하지만, 그가 왜 자기를 깨우지 않느냐고 사람들에게 항의할 때, 독자들은 영혜가 아니라 실은 남편이 잠들어 있고 꿈꾸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가 병상 앞에서 넥타이를 풀어 말아 쥘 때 이 사람이야말로 어딘가에 묶여 있었던 것이 아닌가 묻는다. 이상한 일이란 나에게 일어나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는 이 사람은 아내를 통해 사실 이상한 일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몸으로 겪은 것이다.

흰옷에 뿌려진 피의 이미지는 형부의 서사를 처음 여는 보랏빛 장막, 언니의 보라색 티셔츠 등으로 변주된다. 무채색에 핏빛이 더해지면서, 다채로운 색을 펼치는 2장의 색정과 색욕의 향연으로 넘어간다. 이 장에서 연상되는 신화적인 장면은 디오니소스 희생제의를 닮았다. 디오니소스는 과일의 신, 과일이 변하여 사람을 취하게 하는 포도주의 신, 덩굴의 신이다. 디오니소스 신화와 그에게 바쳐지는 제전은 쾌락과 혼음난무, 여자들에 의해 찢겨지는 남자 희생물, 급작스러운 격통, 생명을 돌려받기 위해 뿌려지는 절단된 성기, 죽음으로부터의 회생 등으로 이루어진다. 온몸에 꽃을 그리고 덩굴처럼 뒤얽힌 영혜와 형부의 몸은 어떤 죽음과 불모의 상태로부터 생명력을 되살리려는 몸짓 같다. 최소한 형부에게는 그렇다. 그는 과일 공물을 들고 영혜를 찾아가, 결합의 의례를 통해 어떤 예술적 비상을, 그리고 쇠락한 몸에 활력을 불어넣을 생기를 얻어내고 싶었던 것 같다. 모든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아내가 두 사람이 동침하는 집 안으로 들어오면서 남자의 환상의 장막이 찢기듯, 모든 마법은 일순간에 사라진다. 두 자매 사이에서 그는 이전의 일상과 관계에서 뜯겨져 가정 밖으로 추방된다.

언니 인혜가 마주해야 할 기억이 있다. 두 자매가 함께 자란 가정의 폭력, 그 속에서 어린 동생에게 집중된 학대의 기억이다. 그는 본인이 직접 겪은 일이 아닌 일에 대해서 부채의식이 있다. 그 또한 어렸기에 어쩔 수 없었기도 했다. 그리고 어떤 일은 겪는 그 순간에는 이해되지 않고, 아주 오랫동안 그런 채로 남아있기도 하다.

인혜는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어느 병원에 입원한 영혜의 유일한 보호자가 된다. 그동안 영혜가 겪어야 했던 폭력의 현장에서 자기 힘으로 자매를 보호하지 못했던 기억들이 돌아온다. 영혜가 병원에서 구토하고 얼굴을 씻고 거울 앞에 서는 장면은 이 소설의 모티프인 얼굴 마주하기가 가장 온전하게 나타난 장면이다. 그리고 떠오르는 기억들을 마주한 인혜가 하나의 이해에 도달하는 장면이기도 하다. 그것은 동생 영혜의 행동의 이유나 해결책에 대한 이해는 아닐 것이다. 영혜가 낸 수수께끼라고 할 법한, 영혜의 삶의 방식은 인혜가 지속해온 평범한 삶에 균열을 일으켰다. 그 벌어진 틈으로 드러난 것은 자기가 마주해야 할 문제들이었다.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으며, 이미 오래전부터 죽은 것과 다름없이 살고 있었고 더 이상은 견딜 수 없다는, 자기 삶에 대한 이해에 도달한 것이다.

인혜는 자기에게 온 약한 존재들을 돌볼 책무를 수용한다. 그들이 아직 어리거나 쓰러진 상태이므로 그들이 스스로 설 수 있을 때까지 그들을 보호하기로 한다. 끈질기게 붙잡고, 손을 떼지 않는다. 이것은 견디고 참는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의 우선 순위를 자기가 정하는 일이다. 영혜는 자신을 위로 끌어올려 줄 무언가를 희망해왔고, 그것에 자기를 맞추기 위해 인내해왔다. 그렇지만 어느 순간, 자기 영혼을 봉쇄하고 억누르고 타인이 원하는 모습을 체택하는 속에 자기 삶에서 소외된 길을 가고 있었던 것 같다. 아이방 천정에 달린 모빌 끈을 참을성 있게 풀어서 끈을 말아 주머니에 넣고 집에서 나와 흙길을 밟아 나무들 속으로 들어가는 장면은 자신이 진정으로 연결되고 싶은 어떤 것을 찾는 모습으로 읽혔다. 그가 선택한 연결점은 아직 어린 아들, 그리고 아이로 퇴행한 듯한 형태로 무너져 있는 여동생이었다.

 

다시 얼굴

3부의 결말은 영혜와 인혜가 함께 구급차를 타고 이동하는 장면으로 끝난다. 구급차가 향하는 방향 끝에 무엇이 있을까? 쓰러진 영혜의 몸과 영혼은 죽음의 방향으로 다가가고 있다. 영혜의 귀에 속삭이는 인혜는 아직 남은 작은 생명의 불씨를 살리려고 숨을 불어 넣는 것처럼 보인다. 작가는 이 작품을 대답이 아닌 질문을 품은 작품이라고 말했다. 과연 영혜가 던진 질문에 세 화자와 독자들은 아무도 시원하게 답을 내놓지 못한다. 다만, 자기 안에 자기의 질문들을 품게 되었을 뿐이다. 언니 인혜와 영혜는 피를 다 씻어내고 다시 하얀 옷을 입은 듯이 구급차 안에 타고 있다. 이 차에는 창문이 있다. 바깥에는 밝은 햇빛이 눈을 찌르고 초록의 불꽃같은 나무들이 활활 타오른다. 질문을 품고 창밖을 쏘아보는 인혜의 눈길로 작품이 종결된다. 이 장면을 창밖 나무의 시점에서 바라볼 수 있다면, 창문을 통해 인혜라는 어떤 인간의 질문하는,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얼굴이 하나 떠올라있다. 질문하고 이해하려고 힘을 다하는 얼굴이 바로 영혼을 가진 살아 있는 인간의 얼굴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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