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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

[채식주의자] 특강 후기 _ 엉망진창 속에도 산다는 것

작성자
기헌
작성일
2024-12-10 23:26
조회
39

동화 인류학적 관점

동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은 자기 조건을 전적으로 수긍한다. 삶은 원래 내 뜻대로 되지 않고 때론 고통스럽고 또 어느 때는 엉망진창이 된다. 인간은 끊임없이 신체의 변화를 겪고, 자신과 다른 타자들 속에서 감정에 휘둘리며 산다. 그런 점에서 동화 인류학은 환상 같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을 적극적으로 보여주는 것 같다. 동화 속에서 원래 그래야만 하는 삶은 없어 보인다. 오히려 수많은 인과 속에서 어디로 휩쓸릴지 알 수 없다는 것을 솔직하게 안고 간다. 동화가 벌을 주는 것은 이 숙명에 대해 거부했을 때이다. 그것이 동화의 윤리다. 누구나 들어봤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 먹지하며 떡을 몇 번 얻어먹던 호랑이는 어느 날 엄마가 떡이 없자 엄마를 잡아먹는다. 동화 속에서는 거짓말, 살생에 대한 가치판단은 없다. 그럴 만 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호랑이는 배가 고팠고 떡이 없는 엄마는 호랑이에게서 달아날 만큼 빠르지 못했을 뿐이다. 여기서 조건을 수긍한다는 이야기가 삶에 어떤 의지도 보이지 않고 포기하라는 이야기와는 좀 다르다. 어떻게 하라는 것이 아니라 알 수 없는 삶이 그렇다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다. 동화에는 가치판단이 들어있지 않기 때문에 어떤 원망도 억울함도 없다. 그래서 엄마를 잃은 아이들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기 위해 달아날 뿐 호랑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나는 동화 인류학 [애니미즘]시즌에서 다카하타 이사오(高畑 勲, 1935~) 감독의 가구야 공주 이야기(스튜디오 지브리, 2013)를 공부했었다. 간단한 줄거리는 대나무숲에 둘만 사는 노부부에게 어느 날 엄지 공주 같은 대나무 아이가 딸(가구야 공주)로 오게 되고, 아버지는 이 딸이 너무 귀해 좋은 집으로 시집보내려고 숲을 떠나 대궐 같은 집으로 이사한다. 하지만 결혼이 싫은 딸은 모든 남자의 구혼을 거부해서 아버지를 애타게 한다. 가구야 공주는 원래 달에서 온 존재로서 결말에는 달로 돌아가게 되는데, 가면서 지구에서 있었던 모든 기억을 잊는다. 딸이 떠나는 모습을 보며 울고불고하는 부모님의 모습이 기억에 남았는데, 여기에서 벌 받은 사람은 딸을 잃은 슬픔으로 울부짖는 부모님이 아니라 멋진 옷 입고 하늘로 승천하는 가구야 공주라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오선민 선생님은 이 작품에 대한 해석으로 슬픔도 고뇌도 느끼지 못하는 삶은 형벌이라고 했었다. 그런대로 살다가도 고통은 부지불식간에 삶을 점령한다. 하지만 고통을 느낀다는 것 자체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가구야 공주의 표정은 어떤 슬픔도 기쁨도 없는 무표정으로 생명력을 찾을 수 없었다. 동화를 읽다보면 조금도 봐주지 않는 자연의 이치가 무척 냉정하게 느껴지기도 하고, 어떤 면으로는 솔직하고 또 순수해보인다. 동화 인류학적 관점을 배우면 상상의 세계에 빠질 것 같았는데, 이상하게도 현실이 더 잘 드러나는 느낌을 받는다.

 

죽음과 삶 : 어떻게 살 것인가?

나는 이번에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를 읽으면서 주인공 자매 영혜와 인혜의 대비되는 삶에서 가구야 공주 이야기의 생명과 고통을 다시 한번 더 떠올리게 되었다. 채식주의자의 영혜는 어느 날 갑자기 고기를 거부하며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어린 시절 아버지는 개를 잔인하게 죽였고, 요리해서 먹었다. 영혜도 함께 먹었다. 그날의 트라우마는 어느 날 갑자기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만들었다. 자신의 손목에 칼을 댄 영혜는 고통스러운 삶을 거부한다. 나중에 영혜는 병원에 입원하게 되는데 모든 음식을 거부하기에 이른다. 자기 바깥의 어떤 것도 받아들이지 못하고 누구도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며 원망의 말을 한다. 영혜는 이미 생기를 잃었다. 살아도 살아있지 않은 느낌을 받는다. 폭력을 경험한 영혜가 안쓰럽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의 윤리로 보면 어쩌면 영혜는 벌을 받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다른 존재의 죽음 없이 누구도 생명을 이어갈 수 없다. 작은 버섯조차 그들의 생명을 먹는 자에게 바쳐지는 것이다. 의도적으로 혹은 의도치 않게 상처를 주고받는다. 이 냉혹한 이치 속에 우리는 타자와 살아간다.

허무를 사는 영혜와 달리 인혜는 생기를 찾으려고 애쓴다. 아니 참고 참으며 인과의 폭풍에서 뚜벅뚜벅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인혜는 스스로에게 질문했다. ‘막을 수 없었을까. 그날 아버지의 손을 막을 수 없었을까. 영혜의 칼을 막을 수 없었을까. 남편이 피흘리는 영혜를 업고 병원까지 달려간 것을 막을 수 없었을까. 정신병원에서 돌아온 영혜를 제부가 냉정히 버린 것을 말릴 수 없었을까. 그리고 남편이 영혜에게 저지른 일을.(한강, 채식주의자(창비), 199)’ 나는 인혜의 질문 한 문장 한 문장을 읽을 때마다 없지라는 대답이 절로 나왔다. 우리는 삶을 둘러싼 일을 좋든 싫든 거부할 수 없다. 우리는 살아있기 때문이다.

 

조용히 그녀는 토하기 시작한다. 뿌연 차와 함께 노란 위액이 나온다.

바보같이.

세면대 앞에서 얼굴을 씻으며, 그녀는 떨리는 입술로 바보같이,라고 되뇐다.(같은 책, 259)

 

 

채식주의자를 강의하신 오선민 선생님은 인혜가 세면대 거울 앞에서 읊조리는 이 장면이 이 소설에서 중요한 장면이라고 하셨다. 나는 언제 바보같이라는 말이 나올지 생각해보았다. 그녀는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삶이라고 원망하지 않는다. 욕망에 휘둘려 사는 인간의 슬픔도 아픔도 그럴만함을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의 바보같이는 단념의 말이 아니라 이해에 다가서려고 애쓰며 마침내 어렵게 어렵게 터져 나온 말처럼 들렸다. 이상한 일들이 난무하는 삶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오선민 선생님은 우리가 어떤 질문과 함께 사건을 마주할 것인가?’라고 이 책이 독자에게 말하는 것 같다고 하셨다. 그런 생각을 하니 지금 삶이 좀 어지럽고 고통스럽다고 울고 원망할 때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 생각하고, 성실하게 하루를 보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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