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안데르센] 자기 말을 맏아쓴 안데르센
<안데르센>
자기 말을 받아쓴 안데르센
2024.12.11. 최수정
“하루 종일 썼다. 입이 아프다.” 이는 어느 날 안데르센 일기에 적혀있던 문구라고 한다. 하루 종일 글을 쓰는데 손이 아픈 것이 아니라 입이 아프다고 하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없었으나, 안데르센이 걸치고 있던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면 이해할 수 있는 문장이었다.
안데르센(1805년~1875년)은 덴마크 오덴세라는 시골 마을에서 태어났다. 그곳에서 안데르센은 할머니와 노인들로부터 옛날이야기들을 전해 들으며 시간을 보냈다. 14세가 되어 고향을 떠나 살게 된 도시 코펜하겐은 산업화와 도시화가 진행되고 있었다.
안데르센이 살던 시기는 근대 소설의 태동기이기도 했는데 나는 안데르센이 소설가가 되지 않고 동화작가가 된 이유 중 하나가 할머니로부터 들은 민담의 영향이 컸다고 생각된다. 안데르센은 할머니로부터 민담을 되풀이해 듣고 자라나면서 자연스럽게 이야기로 전달되는 공동체의 기억에 합류됐다.
이것은 안데르센 동화에서 가끔 보이는 주제의 혼란과도 관련이 있어 보이는데, 동화 속 주인공에게 근대의 선악관이 있다는 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모호하게 그려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안데르센이 ‘동화’라는 새 장르를 만들고 글로 이야기를 쓰면서 할머니로부터 전해오는 전통적 이야기 속에 들어있는 선악의 가치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어 보였다. 그의 동화에는 옛이야기가 전하는 자연질서 전체의 선악이 근대의 새로운 선악관과 충돌하는 느낌이 드는 경우가 꽤 있었다.
안데르센이 살던 시대는 구술문화의 전통이 남아있었던 문자문화 시대였다. 안데르센은 “일차적으로 목소리를 말하는 실제 장면을 떠올리고, 자신이 낭랑하게 발음한 말을 어떤 표현에 아로새긴다. 쓰기(writing)가 쓰기를 통한 글짓기(composition in writing)가 되는 일은 매우 느리게 진행된다. 쓰기는 실제로는 큰 소리로 말하는 것이다”(월터 J. 옹 지음, 임명진 옮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63쪽) 이런 쓰기는 곧 ‘자신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는 것’(같은 책, 64쪽)으로 생각되었다. 그래서 하루 종일 동화를 썼던 안데르센이 입이 아프다는 표현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자신에게 받아쓰기를 시키면서 쓴 글을 다시 자기 목소리로 낭송하며 세상에 울려 퍼지게 하는 안데르센의 동화의 매력은 구술문화 세계에서 목소리로 힘을 나누고 대결하던 힘과 같은 효과가 있었던 것 같다.
민담과 동화
오랜 시간 공동체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온 민담은 신화의 찌꺼기로 인류 공동의 자산이었다. 민담에는 놓치기 쉬운 타자들의 감각이 이야기로 엮어 들어가 그것을 반복해서 듣는 사람들의 기억에 오랫동안 남아있었다.
민담은 삶과 죽음이 끝없이 순환하는 목적 없는 세계를 이야기한다. 어떤 특정한 누군가의 자기 경험이 중요하지 않고, 그 경험이 축적되지 않는다. 이 세계는 차이를 만드는 겪음만이 있고, 그 겪음 자체만 중요하다.
안데르센은 이 민담을 수집하고 각색하고 창작도 하며 동화를 썼다. 안데르센 이전에는 신화의 일부였던 민담이 전승되면서 어느 누군가에 의해 이야기가 각색된 적이 없었다. 민담이 지시하는 어떤 관계나 감각이 잊혀지지 않게 하기 위해 이야기의 주된 내용은 변형되지 않았다. 그런데 안데르센이 이를 각색하고 변형하면서 안데르센 자신도 뭔가 혼란에 빠진다.
사고 체계의 혼란
문자 사용에 익숙한 우리는 구술문화의 효과가 무엇인지, 전혀 쓰기를 모르거나 쓰기라는 수단이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문화가 어떠한 것인지 상상하기가 매우 어렵다. 더욱이 안데르센은 구술문화와 문자문화 그 사이에 있다. 그래서인지 안데르센의 동화는 어떤 관점에서 읽어야 하는지 매우 어려웠다.
안데르센 동화 속 주인공들은 사람뿐만 아니라 살아있는 동·식물, 병뚜껑이나 아마포 같은 사물이기도 하다. 요정이 등장하기도 하고, 하느님이 있기도 하다. 안데르센의 세계에서 신은 인간, 비인간을 아우르는 자연의 신이기도 하고, 인간을 대표하는 하느님이기도 하다. 안데르센이 믿는 세계가 애니미즘의 세계인지 유일신의 세계인지 모호하다. 안데르센은 어디에 있고 싶은 것일까? 안데르센은 자신이 믿어야 할 세계가 무엇인지 몰라 혼란에 빠져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술문화의 전통으로 전해지던 집단 목소리의 세계어서 벗어나 ‘자의식’을 가진 개별 존재가 되기 위해 분열하고 있었다. 안데르센은 동화를 쓰면서 자신과 투쟁하고 있었다고 해야 할까? 공동체의 일부이며 고정된 주체로써 글로 써야 하는 안데르센의 심리적 갈등이 있었다.
“말이 문자로 쓰여지면 그것은 시각 세계의 일부가 된다. 시각 세계를 구성하는 대부분의 요소와 마찬가지로 그것은 정적인 것이 되고, 음성 세계의 특별한 특징이고, 특히 말의 특징인 역동성 같은 것을 잃게 된다. 많은 개별적인 말로서의 특성을 잃게 되는데, 그 이유는 듣는 말이란 대부분 특정인을 대상으로 한 것인 반면 보여진 말, 즉 문자로 쓰여진 말은 그렇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독자의 기분에 따라 읽히기도 하고 읽히지 않기도 한다. 그것은 감성적 뉘앙스와 강조점을 상실하고 있다.” (『구텐베르크 은하계』, 47쪽)
안데르센의 자기
안데르센 동화의 주인공들은 자기에 집중되어 있다. 그 자기는 안데르센 자신의 모습이기도 했다. 그 자기는 분열되어 있다. 동화 속 등장인물들과 어떤 관계의 조건에서 자기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관계에서 떨어져 고립되어 자기 말만 하고 있다. 관계를 아우르는 역할을 갖는 대신 자신의 ‘직업’을 위해 있던 관계도 떠난다. 공동체에서 멀어진 ‘자기’가 관념적으로 존재한다.
안데르센처럼 고정된 관점으로 ‘나’를 중요하게 여기고 자기분석을 할 수 있으려면 구술문화에 입각한 즉흥적 상황 의존적 사고를 어느 정도 깨뜨려야만 한다. 안데르센 주인공들의 자기 인식은 문자문화의 영향이다. 말을 붙들어 매는 쓰기의 형식은 평평한 지면에서 주체를 끊어냄으로써 개인을 독립된 존재로 생각하게 한다.
그러나 안데르센이 ‘나’의 정서를 강하게 쓸 때도 혼란을 느낀다. 그의 동화에 등장하는 ‘요정’이라는 불확실한 존재가 ‘정서’를 대변해주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안데르센 자신도 감정이나 정서의 정체를 완전히 받아들이고 있지 않은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