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세상이라는 나의 고향(3) 어떻게 노동가치설을 볼 것인가
어떻게 노동가치설을 볼 것인가
아마르티아 센은 10대 시절부터 마르크스 사상에 관심이 아주 많았다고 한다. 하지만 마르크스는 대안 경제학의 영웅으로만 여질 뿐 표준적인 경제학에서는 거의 전적으로 배제를 당하는 처지다. 마르크스하면 ‘노동가치설’이 떠오른다. 상품의 가격은 그 상품을 생산하는 데 들어간 노동량을 반영하며 이것이 착취의 존재를 드러낸다고 본다. 즉 노동자들이 생산한 것을 자본가가 가져가고 노동자들은 자신이 상품에 투여한 노동력의 가치보다 훨씬 적은 임금을 받는다는 것이다.
하지만 상품 가격에는 노동 이외에도 다른 요소들이 있기에 비노동 생산요소들까지 고려하면 착취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따라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노동가치설이 너무 기초적인 일차적 근사법이라고 기각해 버린다.
그러나 아마르티아 센은 다른 경제학자인 모리스 돕을 인용하면서 노동가치설에는 그 ‘무언가’가 있다고 말한다. 마르크스는 그의 모든 주제에 ‘인간이 어떻게 관여되어 있는지'(p.319) 큰 관심이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 착안을 둔 돕은 노동가치설이 ‘사회경제적 관계에 대한 사실들의 묘사적 기술'(p.319)이라고 주장한다. 묘사적 기술은 인간의 노동에 방점을 찍고 있는데 그 묘사를 오류로 보는 것이 아니라 노동자, 자본가 등 서로 다른 사회적 주체 간의 관계를 볼 수 있는 중요한 관점을 제공한다는 것이다.
생산을 묘사하는 다양한 방법이 있고 그중에 노동에 방점을 두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뿐이다. 묘사의 목적과 맥락에 따라 즉 우리가 어떤 측면을 드러내고자 하는지에 달린 것이다. 우리가 어떤 측면을 묘사한다고 해서 그것이 다른 면을 오류라고 말할 수는 없다. 예를 들어 봉건제의 특징을 고된 노동을 하는 노동자에게 방점을 두고 있다면 봉건 영주가 타인의 노동으로 먹고사는 존재라고 말한 데 대해 양해를 구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노동가치설의 적절성과 유의미성은 우리가 어디에 중점을 두는지에 달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