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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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식주의자] 삶으로 말한다
『채식주의자』
삶으로 말한다
2024.12.13. 최수정
한강 작가의 『채식주의자』 내용 전개는 생각보다 너무 일상적이고 평범했다. 어느 날 갑자기 육식을 거부하고 채식을 선언하는 영혜는 아버지의 폭력과 함께 연상되는 개고기 이미지가 싫어 육식을 거부할만했고, 모든 것을 참고 인내하는 인혜의 일상도 이해 못 할 것이 없었다. 영혜의 삶이나 인혜의 삶 모두 특별할 것 없는 우리 주변에 있는 평범한 이웃 이야기였다.
영혜의 아버지처럼 사랑한다면서 때리는 사람이나, 남편처럼 자기 이해에 부합하지 않는다고 상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는 사람들의 일방적인 말들의 풍경은 익숙하다. 나에게 오는 말이나 내가 보낸 말이 도착지에 닿지 못할 때 느끼는 좌절감은 너무나 흔해 어떤 화젯거리도 되지 않는다.
사람들은 같은 폭력적 상황이라도 누구는 좀더 아파하고 누구는 좀더 견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폭력에 익숙해져 불합리를 느끼지 못하기도 하고, 달리 어쩔 방법이 없다고 생각해 참으며 살기도 한다. 또한 영혜처럼 견디기 힘들어 정신분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모두 어떻게든 살아가기 위해 자기 방식을 선택한 것이다. 영혜의 말수 없음, 인혜의 사근사근한 말솜씨는 모두 삶을 살아가는 평범한 사람들의 닮은 듯 다른 얼굴이다.
순수한 식물성의 허위
『채식주의자』라는 제목은 먹는 모티브를 사용한 것처럼 보이지만, 작가는 음식을 가려서 먹는 먹는다는 순수 이미지에 ‘말’의 이면을 오버랩한다. 자기의 말이 어디에도 닿지 못하고 방향을 잃은 주인공 영혜는 자기 생각을 몸으로 말하려고 한다. 육식의 거부를 채식으로 행동하며 ‘말’의 폭력성과 이중성을 표현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 중 어느 누구도 영혜의 말에 관심이 없고 모두 자기 할 말만 한다. 모든 가족들이 걱정해주는 척 끝없이 고기를 먹으라는 똑같은 명령만 되풀이한다. 영혜는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하고 입을 벌려 우격다짐으로 고기를 입에 밀어 넣는 그들 모두가 자신을 먹어치우려 하는 것처럼 느낀다. 영혜는 그들 입맛에 맞는 고기가 되고 싶지 않고 누군가를 먹고 싶지도 않다.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주는 즉각적인 느낌은 순수성과 죄 없음의 코드다. 감각적으로 다가오는 식물 이미지는 식물도 생명인 것은 잠시 잊게 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면 먹고 먹히는 관계로 얽힌 이 세계에서 완전히 결백한 존재는 있을 수 없다.
우리가 쉽사리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갖는 순수 이미지에 빠져들어 그 단어가 은폐하는 배제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째서 ‘채식’이라는 단어에서 당장 푸릇푸릇한 순수 이미지만 떠오를까?
작가가 주인공 영혜를 채식주의자로 설정하는 이유는 그 채식의 이면이 언어의 이면과 닮았기 때문이다. 육식과 대비되는 채식 이미지를 선망하는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동물의 생명과 식물의 생명에 위계를 나누고 있다. 자신도 모르게 식물의 생명이 동물의 생명보다 가볍다고 생각하는 폭력의 구도에 빠져 있다. 거대한 육식의 폭력을 거부한다면서 스스로 또 다른 폭력의 구도를 만들고 있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얼마나 언어의 이미지에 현혹되고 있는지 보여준다.
작가는 ‘채식주의자’라의 이미지를 통해, 언어의 이면에 숨겨진 폭력의 구도를 보여준다. 영혜를 사랑한다는 가족들은 영혜를 위해서 고기를 먹으라고 말하면서, 정작 영혜가 자신을 위해 고기를 먹지 않겠다고 하는 말은 못 듣는다. 모두 자기가 하는 말의 이미지에 갇혀 그 말의 이면에 있는 폭력성을 보지 못한다.
작가는 영혜를 통해 ‘채식주의자’라는 단어가 지향하는 순수 이미지가 은폐하는 풍경을 보여준다. 영혜의 ‘채식주의자’ 선언은 자신 안의 육식성을 발견한 때다. 그녀는 꿈에서 자신이 물컹한 고기와 피 맛을 즐기는 육식주의자임을 보게 된다. 폭력을 혐오한다고 믿었던 자기가 뱃속에 폭력의 얼굴을 숨기고 있는 것을 알게 된 후 정신분열에 시달린다. 남의 것인 줄만 알았던 그 얼굴이 사실은 자기 얼굴이었다는 자기모순에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뱃속 얼굴이 자기주장을 하기 전에 자기 몸에서 그것을 몰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 끈끈하게 달라붙어 있다가 어린 조카들 앞에서 자살을 시도할 때 그녀의 뱃속을 빠져나와 얼굴을 드러낸다. 그리고 발가벗겨진 듯, 눈부신 햇빛 아래 앉아 감춰둔 이빨을 번득이며 태연히 살아있는 동박새를 물어뜯는다.
이미지의 장막
그(영혜의 형부)는 다섯 살 난 아들의 엉덩이에 있는 몽고반점을 보며 처제인 영혜의 몸에 남아 있을 몽고반점을 상상한다. 그는 이미지 뒤에 숨겨진 이미지를 열망한다. 그는 ‘현실의 이미지를 견딜 수 없다.’ 삶이 넌더리 났고, 삶을 담은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었다. 그것은 영혜도 마찬가지였다 그녀의 내면에는 어떤 끔찍한 사건들이 벌어지고 있어 그것과 일상을 병행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다. 어떤 격렬함이, 자기부정이 그녀 안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영혜는 고기만 안 먹으면 꿈에 보이던 얼굴들이 나타나지 않을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 얼굴은 그녀의 ‘뱃속 얼굴’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살아있는 한 끊임없이 자기 얼굴을 내밀고 싶어 할 것이다. 소화되지 못한 고기, 뱃속에 남아 호시탐탐 그녀를 먹어 삼키려고 하는 혼돈의 얼굴로 남아 그녀를 괴롭힐 것이다.
영혜는 육식주의자인 자신을 참을 수 없었다. 육식의 고통에서 벗어나 결백한 식물이 되고 싶었다. 자신의 엉덩이에 남아 있는 몽고반점의 식물성의 이미지 때문이었을까? 온몸을 식물의 형상으로 칠한다고 해서 인간의 몸이 식물이 되지 않겠지만, 피부의 표면만이라도 식물이 되고 싶었다.
비디오 작가인 형부는 이미지 작가였다. 영혜가 ‘채식’이라는 이미지에 빠진 것처럼 형부는 ‘예술’이라는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다. 오염된 현실과 자기를 벗어나 순수한 세계를 꿈꾸는 영혜와 형부가 추구하는 이미지가 같다. 그들은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 있고 싶다. 그들이 사는 여기는 자신들의 순수성과 어울리지 않는다. 서로의 순수성을 열망하며 엉겨 붙어 있는 그들은 그들이 탐하는 순수한 이미지가 어떤 폭력의 기반 위에 있는지 알아채지 못한다. 그들이 탐하던 순수성으로 인혜가 얼마나 고통스러워하는지 무관심하다.
영혜의 몽고반점을 자신의 혀로 옮기고 싶다던 형부는 몽고반점이 옮겨진 자신의 혀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푸른 꽃, 푸른 멍이 새겨진 혀로만 할 수 있는 말이 있을까? 식물을 탐하는 그는 인혜의 기억에서 ‘욕조 속에 옷을 입은 채 웅크리고 잠들어 있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그 모습은 인혜의 자궁에 붙어 있던 ‘혀’모양의 폴립과 닮았다. 그의 연약하고 순수한 영혼은 안락한 욕조 안 같은 인혜의 자궁에서만 살 수 있다. 그 원초적인고 순수한 공간에서만 편안하다고 느낀다.
<몽고반점>은 식물성의 허위를 온몸에 그린 영혜와 형부를 통해 환상에 의해 조직된 편향적 이미지, 아무것도 생산하지 못하는 무위의 순수 이미지를 그리고 있다. 그것은 언젠가는 지워질 이미지의 표면을 공허하게 붙잡고 허우적거리는 삶의 또 다른 이미지다.
생명의 푸른 불꽃
영혜는 형부가 자신의 온몸에 꽃을 그려주자 자기 몸이 정화된 듯 느꼈다. 그녀가 바라던 순수의 이미지가 피부를 감싸자 잠시 마음이 안정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온몸에 식물을 그려 준 형부와 몸을 섞으면서 자신의 순수성을 회복할 길이 영원히 멀어진 것을 느낀다. 무구한 존재로 살아갈 길을 완전히 잃은 것처럼 느끼는 영혜는 이제 모든 음식을 거부한다.
자기 말과 생각뿐만 아니라 몸조차 오염됐다고 생각하는 영혜는 인간으로 돌아가길 원하지 않는다. 그녀는 차라리 말과 생각이 필요 없는 나무가 되고 싶다. 인간이 서 있는 것과는 거꾸로 서 있는 것 같은 나무야말로 그녀가 되고 싶은 것이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인간으로 태어나기 전의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다. 그곳에서 나무가 되어 나무들의 형제들과 침묵에 묻혀 살고 싶다.
그러나 순수와 결백을 위해서만 살겠다는 영혜와 달리 인혜는 아이를 돌보기 위해서라도 말과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인혜는 언제나처럼 자신이 돌보는 사람의 말과 생각의 기색을 살폈다. 때로 그녀도 눈을 감고 입을 닫고 싶을 때가 있었지만 누구에게나 사근사근한 말투로 말을 걸고 친절하게 자기 생각을 말하며 성실히 일상을 꾸려나갔다.
남편은 그런 인혜에게 자기 대신 말을 시키고 그 말을 다시 받아먹었던 존재였다. 남편은 영혜의 자궁에 자리 잡아 피를 흘리게 하던 ‘혀’모양의 폴립처럼, 영혜가 얼마나 많은 피를 흘리고 있는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자기가 원하는 순수한 삶을 위해 영혜가 겪어야 하는 고통은 못 본 척했다. 자궁 안에 ‘혀’처럼 매달린 폴립을 떼던 날, 영혜는 자신의 몸에 커다란 구멍이 생겼음을 깨달았다. 그리고 자신의 몸에 기생하는 혀를 뽑아낸 상처를 메울 길이 없어 나무를 찾아간다. 나무가 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나무에 자기 몸을 매달기 위해서다.
하지만 인혜가 자신의 죽음 앞에서 본 나무가 전한 메시지는 ‘무자비한, 무서울 만큼 서늘한 생명의 말’이었다. 얼음처럼 금이 가는 가슴을 안고도 살아야 한다는 말이었다. 따뜻한 온기를 담은 위로의 말이 아니라 차가운 한기로 타오르는 생명의 말은 서늘한 푸른 빛이었다. 푸른 빛이야말로 가장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이다. 이 세상 무엇보다 강한 생명의 불꽃으로 타오르는 나무가 받아줄 목숨은 어디에도 없다. 생명의 나무는 죽음을 품은 그녀가 다가오지 못하게 살아있는 거대한 짐승들처럼 완강하고 삼엄하게 온몸을 버티고 서 있었다.
작가는 『채식주의자』 이야기로 나의 평범한 일상을 잠식하고 있는 무감각이나, 작고 사소한 모습으로 숨어있는 폭력의 또 다른 면을 보여준다. 어느 누구도 완전히 순수하고 무구한 존재로 살 수 없다. 나는 때로 온몸으로 폭력을 거부하는 영혜이기도 하고, 모든 것을 묵묵히 참아내는 인혜이기도 하고, 남편이고 형부이기도 하다.
가장 높은 온도로 타오르는 푸른 불꽃은 끝없이 주변의 모든 것들을 빨아들이며 맹렬하게 타오른다. 인간에 의해 식물성의 이미지로 치장되었지만 나무는 자신의 불꽃을 키우기 위해 모든 것을 먹어치운다. 나무는 혀처럼 날름거리는 불꽃으로 타오름으로써 생명의 육식성에 대해 말한다. 거대한 나무의 숲을 돌아 나와 살아남은 영혜와 인혜는 그 육식성의 나무와 형제가 되어 가장 높은 열기를 내뿜으며 자기 생명을 탐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며 그 삶으로 많은 말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