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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답사 가고 글을 쓰고!

 

[채식주의자] 물과 불과 피 그리고 나무(수정)

작성자
오켜니
작성일
2024-12-14 12:34
조회
24

물과 불과 피 그리고 나무

 

나무는 햇빛을 받고 땅에서 물을 끌어 올려 자신의 줄기와 나뭇잎들을 촉촉이 적신다. 땅은 피를 가진 생명들의 무덤이기에 땅의 물에는 피가 섞여 있다. 덥고 추운 날씨에 따라 나무는 자신의 내부를 끊임없이 조정 중이다. 주변 환경과 자신에 질문과 이해는 필수다. 때로는 세찬 비가 내려 나무의 모든 것을 적시기도 한다. 나무는 세찬 비의 모든 의미를 알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다. 그래도 나무는 질문하고 이해하려 노력한다. 이런 노력은 아래로 흐르는 물을 거꾸로 헤엄쳐 올라오게하는 일이다.

생명력은 절박한 질문으로부터 나온다. 인혜는 죽을 수도 있는 영혜를 대면하며 그동안 미뤄왔던 질문을 던진다. 질문은 어지럽고 답을 찾는 일은 어두운 숲을 응시하는 일이다. 세상의 정상이라는인간의 범위를 벗어난 영혜를 이해하는 일은 한 번도 해본 적 없는 더 큰 질문과 이해를 필요로 하는 일이다. 그러는 과정에서 인혜는 영혜에게 한발 다가선다. 주변의 조건을 늘 받아들이던 인혜는 영혜를 위해 하지마를 외친다. 나무가 되겠다는 영혜의 마지막 생의 의지를 꺾어버리는 진정제 주사 투여를 거부한다. 그리고 자매는 길을 나선다.

 

영혜가 숲으로 간 날도, 그로부터 3개월 후 인혜가 영혜의 정신병원을 방문한 날도 비가 왔다. 이번 정신병원의 방문 목적은 더 특별하다. 숲에 다녀온 후 영혜가 먹기를 거부하였기 때문에 큰 병원으로 영혜의 이송 여부를 결정하는 날이다. 숲속, 나무 밑둥, 콘크리트 병사(病舍), 버스 밖의 모든 것이 비에 젖는다. 전국적으로 비가 온다. 세찬 빗살은 누구에게나 공평하다.

인혜가 산에 올라가 자살을 하려다 포기하고 내려오던 새벽 산길. 샌들을 적신 이슬이 맨발에 차갑게 스며든다. 이 차가운 물기는 그녀의 몸속으로, 뼛속까지 스며든다. 삶의 무의미로 자살충동에 시달리는 그녀의 몸은 차가운 물기를 받아들여 따스하게 만들기 힘들다. 그녀는 차가운 물기에 뼛속까지 시리다.

영혜는 꽃을 그린 신체와의 교합 퍼포먼스에 생식기가 축축히 젖는다. 몸에서 점액이 흘러나온다. 영혜를 흥분하게 한 것은 그것이 이성과의 교합이 아니라 꽃과의 교합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기 냄새가 나는 남편과의 섹스에서 수동적이던 그녀는 몸에 꽃을 그린 퍼포먼스에서 생명력을 느낀다. 몸이 살아남을 느낀다.

물은 피를 품고 있다. 영양성분과 산소를 몸의 세포에 나르기 위해 피는 붉게 응축된 상태로 물과 함께 세포에 다다른다.

 

 

아버지의 주취 폭력으로 영혜에게 집은 어린 시절부터 무서운 곳이었다. 어린 시절 숲에서 언니와 길을 잃었을 때, 언니는 숲이 무서워 빨리 집에 돌아가길 원했으나, 영혜는 숲에 남고 싶어 했다. 영혜의 평범성만을 보고 결혼한 남편은 영혜와 온기를 나누기보다는 영혜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지 않고 안전하게 살기를 바란다. 영혜에게 집은 싸늘한 집, 식은 집이다. 식은 밥, 식은 국처럼 싸늘하다. 영혜는 꽃을 그린 몸의 교합 장면을 연출한 후 그곳의 바닥이 따뜻하다고 느낀다. 공격성을 갖지 않은, 광합성을 하는 무해한, 동물이 되고자 했던 영혜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퍼포먼스에서 그녀는 공간의 따뜻함을 느낀다.

인혜는 어린 시절에 주취 폭력이 심한 아버지의 해장국을 끓였고, 가정에 대한 책임감이 없는 남편을 대신해서 열심히 돈을 벌고 아이를 키웠다. 주어진 조건에서 자신의 할 바를 하면서 자신의 역할에 대해 반항하거나 거부하지 않았다. 남편 집안의 번듯함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려는 욕망으로 결혼하고 남편의 무책임과 무관심을 모른척했지만 그러는 사이 인혜는 온몸의 습기가 바싹 말라버린다. 그녀의 육신은 건조해지고 너덜너덜해진다. 그녀의 혈관은 물기 없이 바싹 말라간다. 세상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어지러이 뒤섞여서,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질문하지 않으면서 죽도록 애쓰는 영혜는 열이 나지만 그 열을 적절히 식히지는 못한다. 그래서 건조해지고 말라버린다.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은 물구나무를 선 영혜의 몸을 감싼다. 인혜가 영혜의 정신병원을 방문한 것은 6월의 비오는 날이었다. 인혜는 계속 (영혜가 정신병원의 산책 대열에 빠져나와 갔던) 숲을 응시하고 과거를 응시하고 영혜에게 마음으로 묻고 자신에게 묻는다. 인혜가 알 수 없는 영혜의 마음에 다가서려 노력하고 있을 때 날씨는 계속 밝아진다. 그리고 인혜가 영혜를 응급차에 태우고 정신병원을 나올 무렵에는 비가 개고 햇볕은 뜨거워지고 6월의 푸른 숲은 열기를 내뿜는다. 나무 불꽃으로 가득해진다.

 

 

영혜는 꿈을 꾼다. 꿈속 헛간 같은 건물에는 시뻘건 고기 덩어리들이 가득 하다. 헛간 바닥은 피웅덩이가 되었다. 가족 모임에서 식구들은 영혜에게 고기를 먹으라고 강요한다. 영혜는 가족들이 보는 앞에서 자살을 시도하고 영혜의 손목에서 선혈이 솓구친다. 영혜의 피가 남편과 형부의 티셔츠에 튀긴다. 꿈속 인혜의 왼쪽 눈에서 피가 흐른다. 모든 음식을 거부하는 영혜의 위는 피를 토하게 만든다. 영혜의 피가 인혜의 얼굴에 묻는다. 인혜는 화장실에 가서 얼굴을 물로 닦는다. 얼굴에 묻은 피는 물로 지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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