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소유하다
<2024 인문세 학술제 에세이>
2024.12.21. 최수정
소유하다
이번 시즌 나에게 중요한 인류학 개념은 ‘소유하다’ 였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소유를 개인의 사적 소유로 생각하지 않는다. 소유는 자신들과 사회공동체 사이의 관계를 지칭한다. 소유형식은 곧 관계형식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부와 가난의 기준은 관계 맺을 사이가 얼마나 다양한가에 달렸다. 많은 관계를 소유한 사람이 부자이고 하고, 관계가 빈약한 사람이 가난하다. 그리고 그 관계는 선물을 주고 받는 관계다.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가 많을수록 부자다. 이런 소유개념은 우리사회가 함축하는 소유의 의미와 전혀 다르다. 내가 생각하는 소유란 개인이 무언가를 자기 것으로 삼는 일이다. 소유는 ‘나의 것’을 확정한다. 내 집, 내 가방, 내 가족, 내 마음 등등. 하지만 이런 소유를 선물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말하지 않는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에게 소유는 언제나 일시적이고 제한적이다. 한시적 소유는 선물은 주고받는 관계를 만들며 돌고 돈다. 그 와중에서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기 위해 경쟁을 한다. 선물이 돌면서 주고받는 선물의 가치가 올라간다. 그런데 이때 그 가치라는 것이 결코 화폐로 환산되는 가치가 아니다. 그것은 그 선물로 오가는 존중과 감사의 마음이다.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상대방의 감성을 모방하고 흉내내며 받은 것보다 더 큰 가치를 덧붙여 되돌려 준다.
모방을 통해 소유한다
인류학 공부를 통해 내가 알아가는 것은 타인을 관찰하고 흉내를 내고 모방하는 능력(감각적인 연결)이 풍부한 문화의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관찰과 모방은 어떤 누군가가 주기로 마음먹어서 되는 일이 아니라, 전적으로 누군가를 모방하고 싶은 자의 의지에 달려있다. 내가 따라하고 싶은 점을 그가 가지고 있을 때 나는 그의 허락과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고도 그를 모방할 수 있다. 매혹될 대상을 만나기만 한다면 언제든 그의 말과 행동을 내 것으로 만들 수 있다.
모방의 이와 같은 일방성은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트로브리안드인들이 선물을 줄 사람의 의도와 상관없이, 일방적으로 선물을 요구하기 위해 ‘쿨라’ 여행을 떠올리게 한다. 그들의 쿨라 여행은 누군가를 모방하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었다. 이는 쿨라 원정을 떠난 사람들이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 임시로 정착한 섬에서 자신들의 평상시 ‘행위 모델을 바꾸는 모습’에서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다. 그들은 몇 주 혹은 심지어 몇 달씩 그들의 파트너, 친구 혹은 친척 집에서 주의 깊게 그 지방의 관습을 지키며 산다. 그들의 일을 도와주고 고기잡이도 따라 나선다. 특히 고기잡이 작업 형식은 자신들이 살던 곳과 다르고 색다른 경험이 된다. 그 섬에 있는 동안 그들은 섬 주민들을 모방하며 다른 문화를 받아들이는 훈련을 한다.
트로브리안드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에게 주기적으로 섬 바깥을 여행할 명분이 되는 ‘쿨라’가 없다면 그들은 ‘울타리’에 갇힌 동물처럼 고립될 것이다. 오랜 시간 외부와 차단되어 그들이 전부라고 생각하고 자신들만의 문화에 갇힌다면 절멸했을지도 모른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의 삶을 기술하던 말리노브스키가 그들이 얼마나 바다 건너 친구가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지 묘사한 글이 있다. 그 안도와 위안에는 자신과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줄 ‘선물’, 즉 ‘모방’할 만한 타자성을 갖고 있다는 데서 온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농작물이 잘되어 풍요가 넘치는 해에 ‘쿨라’원정을 떠난다. 먹을 것이 걱정 없게 됐을 때 그들이 부리는 사치는 축제를 벌여 친구를 초대하고, 멀리 친구를 만나러 간다. 그들에게 친구는 불확실한 삶의 보증 같은 것이다. 멀리 있는 친구의 다른 환경에서 배우는 체험들이 언제 어느 때 맞닥뜨릴지 모를 문제를 해결할 실마리가 될 수 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 도착하는 지점마다 자신들의 ‘행위 모델을 바꾸고’ 새로운 가치에 적응한다. 타자를 모방함으로써 ‘소유’하려고 하는 그들의 사고는 지금 내가 갖고 있는 소유개념과 너무도 다르다. 나의 소유는 신체 행위 모델을 바꾸고 새로운 문제를 발견하고 해결하는 과정에서 다른 것을 겪어보려고 하는 일이 아니다. 내가 소유하고 싶은 것은 정말 무엇인가 다시 생각해 보자.
야생의 사고, 감각의 구체
인간은 살아가기 위해 사회와 문화를 만든다. 마르셀 모스의 『몸 테크닉』에 의하면 문화는 인간의 총체적 신체와 같았다. 한 사회의 행동 제약과 규칙들뿐만 아니라 개인적이라고 생각했던 감정들과 표정들도 사회제도에 의해 규정되었다. 하나의 문화에 속한 우리는 문화의 관습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각 문화에 따라 존재하는 사물을 각기 다른 양식으로 파악한다. 지배적 문화의 관점에 따라 사물과의 상관관계가 변하고 그에 따라 개인의 주관성도 확립된다. 그에 따라 사고체계의 관념이 바뀌고 규정된 관념에 따라 가치관도 달라진다.
내가 ‘소유’의 의미를 떠올릴 때도 나의 사회적 가치관에 따라 소유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린다. 소유란 개인적인 관계에서 물건을 갖는 것, 지배하는 일이다. 나는 그 이상의 의미는 알지 못한다. 내가 ‘소유하다’는 개념으로 사고할 수 있는 범주는 기껏해야 추상적 ‘물질적 소유’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그 개념을 사용함으로써 의미를 단순화하고 숨은 의미를 손쉽게 생략해 버리고 있다.
그런데 클로드 레비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내가 단어의 개념만으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큰 사고체계가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그의 표현대로 ‘야생의 사고’고 ‘구체의 사고’다. 그것은 ‘감각적 직관’에 매우 가깝게 ‘지각이나 상상력의 차원에 시선을 집중’시키는 것이다. 그것이 얼마나 구체적이었는지 야생의 사고를 하던 사람들이 식물을 향기로 분리하던 감각 기준이 지금의 화학이 분류하는 기준과 일치했다(『야생의 사고』, 65쪽)는 예는 놀라웠다.
레비스트로스가 ‘인간의 자연화’를 말할 때는 인간의 감각적 직관이 인간 안에서 발생한다기보다 인간 바깥의 자연으로부터 온다는 의미다. 나를 만드는 것이 바깥에서 온다고 사고할 때 필연적으로 나는 나 바깥의 자연과 연결되었음을 생각하게 된다. 신화와 의례는 이 연결에 대한 “감각계의 이론적인 조직화와 탐색”(69쪽)을 발견하게 해준 관찰과 사고의 양식을 잔존형태로 오늘날까지 보존해 온 것이다. 신화와 의례로 “인간은 가장 힘든 과제, 즉 감각에 직접 수용된 바를 체계화하는 과제에 도전했다.”(64쪽)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턴가 신화를 기억하지 못하고 감각을 체계화하는 방법에서 멀어졌다. 길을 잃은 감각은 더 이상 외부를 향하지 않고 내부를 향하게 됐다. 나의 신체가 느끼는 감각은 오직 나뿐이다. 어떤 외부의 감각과 연결되지 못하고 나의 감각, 취향만 고수하며 자기 안에 갇혔다.
토테미즘
구체적 사고를 하는 ‘야생의 사고는’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감각 체계에 넣는다. 그럴 때 “모든 성스러운 것들은 다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야생의 사고』, 62쪽) 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다. 나는 이 제자리가 우주의 아름다운 질서라고 생각한다. 서로가 서로의 차이를 모방하고, 선물로 주고받으며 서로를 붙들고 있는 자리다. 모든 존재는 자기 자리에서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할 때 성스럽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토테미즘은 토템이라는 상징을 가지고 인간이 무엇을 하는 양식, 태도에 대한 설명이다. 토템이란 자연의 개체를 종 차원에서 일반화해서 인간 집단에 그 성격을 부여한다. 이 안에서 부족의 행동 양식뿐만 아니라 감성, 정서가 모두 결정된다. 그리고 하나의 토템부족이 된 인간은 자연 안에서 그 부족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한다. 서로 다른 부족의 역할이 겹치지 않게 음식 금기부터 정한다. 어떤 것을 먹고 먹지 않고 하면서 자기가 살아가는 세계의 부분 질서를 책임진다. 그렇게해서 음식이 되는 종의 멸종을 막고, 환경 생태계를 보존한다. 야생의 사고를 하는 사람들은 세계에 질서를 유지하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자각을 하고 있다. 각자가 맡은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다양한 종과 어떻게 관계 맺을 것인가를 사유한다. 이 사고에는 어떤 존재도 소외되지 않는다. 온갖 잡다한 사물들도 다양성을 위한 관계의 짜임에 필요하다. 수많은 관계 안에 자기 자리가 있는 것이 ‘부’를 소유하는 일이다. 이 사회에서 가난한 자는 관계를 소유하지 못한 사람이다.
토템적 분류법의 본질적 기능의 하나는 집단의 폐쇄성을 타개하고 무한에 가까운 다양성을 조합한다는 데 있다. 이는 그들이 살아가는 공간 개념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공간 또한 이름이 부여된 장소들의 사회이다. 거기에는 길과 강, 산이 영적인 존재로 여겨지며 집에도 모두 이름이 붙어 있고 일상생활에서 지명이 인명 대신 쓰인다. 인간과 비인간의 사회적 관계의 전 체계는 다시 우주체계와 연결되어 나와 우주가 분리되어 존재하지 않게 된다.
주기 위한 소유, 자연을 모방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소유를 탐하는데, 그것은 무엇보다 그것을 나눠주면서 관대함의 느낌을 향유하기 위해서다. 만물이 자연의 풍요로움과 관대함에 신비로운 경외감을 드러내듯이, 풍요를 나눠주는 자신의 관대함에 남들이 감탄하는 모습에서 위신과 명예를 느낀다.
트로브리안드린들은 밭 작업을 인내와 목적을 가지고 조직적으로 열심히 한다. 그래서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생산하고, 잉여분은 다른 사람을 준다. 그 잉여에는 자연에 되돌려 주는 잉여도 포함되어 있다. 잉여를 생산하는 노동에는 많은 부분이 실용적인 생산보다 ‘심미적인 측면에 투입된다.’ 밭농사를 짓는데 실용적인 생산보다 밭을 꾸미는데 시간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마을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도 있지만, 수확물을 자연에 돌려주기 위해서 밭에서 그대로 썩히는 것을 보면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의 실체를 의식하고 있다. 열심히 일해서 많은 수확량을 생산해 그것을 다시 자연에 되돌려 주고 자기 힘을 들여 예쁘게 꾸며 자연을 기쁘게 해주는 것이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연을 순수한 증여를 모방해 자연처럼 많은 선물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자연의 대리자로 여긴다. 그래서 관대한 그 사람에게 위세와 명예를 부여한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선물을 주고받으면서 제자리를 지키고 있는 세계를 모방한다. ‘선물’이라는 형식을 반복하며 자연의 질서를 기억하고 유지하려는 지혜를 발휘한다. 이들은 이 질서에서 탈락해 고립될 때 따라오는 위험을 알고 있다. 선물을 받기 위해 떠나는 ‘쿨라’ 여행은 타자를 향하는 여행이지만 그 또한 단단히 자기 자리를 지키기 위한 것이다. 나와 네가 자기 자리에서 서로를 붙들고 있어야 서로를 살릴 수 있다는 감각을 기억하기 위한 의례 행위다.
쿨라의 순환 안에서 팔찌(음왈리mwali)와 조개목걸이(술라바soulava)는 서로를 끌어당긴다.팔찌와 조개목걸이 중 하나를 받았으면 다른 것을 줘야 하기 때문에 주고받는 관계는 처음부터 서로를 향해 있다. 정해진 방향으로 움직이는 선이 더 단단히 서로를 붙들게 만드는 그물망의 방식으로 묶여있다. 정기적 쿨라를 통해 바다 너머 멀리 떨어져 있는 타자로부터 내 삶이 꾸려진다고 생각하는 일은, 모든 것이 나로부터 이루어진다는 사고 체계와 확연히 다르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은 나의 폐쇄성으로부터 멀어져가는 야생의 사고를 한다.
소유, 존재 자체가 선물이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이 쿨라 여행을 떠나는 목적은 선물을 ‘받기’ 위해서다. 그러나 받기 위해 떠나는 여행이 실은 자기에게 선물을 줄 사람을 생각해서 내가 무엇을 답례로 줄 수 있을지 생각하는 일로 시작된다. 이 과정이 반복되면서 선물을 주는 사람과 받는 사람은 서로 상대방을 향한 마음의 크기를 키우며 점점 더 위대해진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위대하다’는 것은 더 많이 줄 수 있는 사람이다. 자신을 헌신해서 남에게 줄 것을 더 많이 생산하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은 타인에게 존재 차체가 선물이 된다.
야생의 사고는 ‘인간의 자연화’가 바탕이 된 일종의 주술이다. 자연의 일부인 인간이 감각적으로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시작된다. 연결된 감각체계를 이용해 자신에게 좋은 방향으로 자연 전체의 사고체계를 구성한다. 연결된 감각을 조작해서 내가 좋은 것이 우주가 좋은 것이 될 수 있게 생각한다. 그들은 인간을 넘어선 인간 이상을 본다. 현대인의 사고처럼 인간만, 나만 좋은 방식으로 사고체계를 구성하지 않는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을 때, 나도 좋고 너도 좋다.
야생의 사고를 하는 트로브리안드인들은 바다 한가운데에서 만물과 연결된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 의례와 같은 ‘쿨라’여행을 떠난다. 그들의 여행 이력이 그들이 지나쳐온 장소에 기록되어 공동체의 이야기가 된다. 여행 중 만나는 서사들과 주체들의 사이에서 새로운 풍경이 만들어진다.
그들은 내가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기 위해, 내가 타자에게 더 좋은 선물이 되기 위해 내가 소유해야 할 것은 우주 자연과 맺는 수많은 관계라는 것을 알고 있다. 내가 받은 선물은 어떤 식으로 보상되어 돌려주어야 한다. 그런데 이 관계에서는 서로가 서로에게 선물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