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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이해하다

작성자
유나
작성일
2024-12-21 20:59
조회
74

마음인류학 에세이 / 2024.12.21 /손유나

이해하다

사람은 자신과 다른 이념, 문화,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까? 이해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갖춰야 할까? 이해는 사물의 본질과 내용을 파악, 분별 해석하는 고도의 두뇌활동이므로 이성과 논리, 합리성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왔다. 하지만 나와 다른 것을 맞닥뜨리고 이해하려고 할 때, 내가 마주한 것은 차가운 이성의 활성화가 아니라 당혹, 놀람, 분노, 혐오과 같이 온몸을 뒤트는 듯한 감정이었다.

수렵·채집 경제를 바탕으로 소위 원시 문화를 먼 거리에서 조망할 때는 온화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대칭적이고 평등한 사회, 자연과 더불어 사는 원시 문화의 정신을 배워야 한다고 말했다. 지구 어딘가에서 어떤 부족이 임신은 특정 햇빛이 여성의 뱃속으로 들어왔기 때문이라고 믿어도 나는 평온했다. 그래서 나는 내가 원시 문화를 충분히 이해하고 존중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원시 문화의 신화와 주술이 본질적으로 근대 과학과 다르지 않음을 피력한다. 한 일례로 시베리아 벌판에서 순록 유목으로 살아가는 야쿠트족을 언급하는데 이들은 치통이 있을 때마다 딱따구리 부리와 접촉한다. 레비 스트로스는 이 또한 과학이라고 말한다. 쉽사리 수긍이 가지 않았지만 인류학의 대가가 한 말이니 이해해보고자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나의 가식이 벗겨지고 본심이 드러났다.

내가 야생의 사고에 대해 평온했던 이유는 원시 문화권 사람을 나와 다른 사람들로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동물의 행동에 가치평가를 하지 않듯이 말이다. 그렇기에 주술을 믿는 사람들이 우리와 같은 동일한 과학적 사고체계를 가지고 있다는 주장을 도저히 납득하기 어려웠다. 정말로 동일한 사고체계를 공유하고 있다면 원시인들은 사물의 원리와 작동방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의료행위는 아무리 봐도 덜 발달했다.’ 이미 한물가버렸다고 생각한 진보관이 내 깊숙한 곳에서 얼굴을 들었다.

 

이해하기는 나를 향한다

사람이 주술을 진심으로 믿는다는 사실이 놀라운 건 아니다. 행운의 네잎클로버, 4층이 없는 병원, 수험생 자녀를 위한 기도, 사주와 타로점. 주술은 언제나 우리 가까이에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고, 불확실한 세상을 살아가며 불안해한다. 그래서 자신들이 몸담고 있는 세상의 이치를 파악하고자 했다. 더 나아가 자연의 질서에 개입하여 원하는 결과를 이끌어내려 애써왔는데 그 노력의 한 형태가 주술이다. 단지 어떤 문화에서는 주술이 사회를 지탱하는 축이자 공동체의 본질로서 자리잡았고, 어떤 문화에서는 주술은 미신, 심리술과 같이 치부한다. 혹여 한 개인이 주술을 진정으로 믿는다고 해도 사적인 영역에서만 허용될 뿐이다. 이런 배경으로 보아 나는 이성 대 감정이라는 대립 구도처럼 주술 대 과학구조가 성립하고, 어느 측면에 우세하느냐에 따라 문화의 양상이 달라진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레비 스트로스는 주술 역시 과학이며, 주술이 근대 과학을 포함한다고 설명한다. 왜냐하면 과학의 목적은 자연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이고, 야생의 사고와 과학 둘 다 질서를 찾아 구조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기 때문이다. 다만 주술은 근대 과학보다 포괄하는 범위가 더 크다. 인간, 동물, 사물, 태양과 달, , 바람 등 지구상의 모든 것이 연결되어 있어 함께 인과의 고리를 이루고 있다. 그래서 햇빛을 쬐어 임신한다는 차원을 뛰어넘는 인과가 성립한다. 반면 근대 과학은 물리학에 바탕을 두고, 여러 개의 차원을 구분하고, 그중 일부에만 인과를 성립한다.

이 대목에서 한참을 생각하면서 나는 그간 인식하지 못했던, 나의 견고한 믿음을 발견했다. ‘과학은 무조건 옳다.’라는 믿음이다. 근대 과학은 실험, 수학 공식 등을 통해 검증을 여러 번 거치고, 검증을 통과하지 못하면 기존의 지식을 폐기한다. 이 모습을 보며 과학은 언제나 옳음을 지향하고 있다고 느꼈고, 오류를 포함하고 있는 건 결코 과학일 수 없다고 느꼈다. 하여 주술이 과학의 일부라는 것을 인정할 수 없었다.

그보다 더 강력한 의문은 실용성과 실효성을 담보할 수 없는 주술이 무슨 쓸모가 있는가였다. 딱따구리 부리는 치통에 아무런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 치통은 사람이 몸으로 겪는 고통으로, 증상이 완화되는지 악화되는지는 경험적으로 명확히 알 수 있다. 그런데 왜 딱따구리와 치통이라는 이 연결성을 폐기하지 않을까? 곰곰히 생각을 하던 와중에 실용적인 목적과 이익이 없는 것은 쓸모가 없다고 단언하는 내 모습이 낯설게 눈에 들어왔다. 다른 문화를 이해하려 애쓰던 과정에서 과학은 진리이다’, ‘실용성이 없으면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는 는 속마음이 드러났다.

 

이해하기는 격렬한 소화다

한 권씩 책을 읽고 책장에 올려둔다. 프로이트에 대해, 스피노자에 대해, 푸코에 대해 알고, 그들이 펼쳐낸 지성세계를 산책하듯 돌아보았다. 이해는 일종의 영토 확장이었다. 굳이 애써 질문을 던지지도 않았고, 사상가의 철학과 나의 생각을 연결하려 시도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로 섞이지 않았다.

하지만 야생의 사고는 너무나 낯설어서 산책하는 가벼운 마음으로 지나갈 수가 없었고, 내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시키는 작업이 필요했다. 화학작용에서 불꽃반응이 일어나는 것처럼 되도 않는 것을 이해하려고 고군분투하는 와중에 격렬한 감정이 일었다. 과거 지식의 토대가 충분히 갖춰지지 않아서 생긴 오류가 아니라, 동시대에도 주술이 근대 과학과 동등한 위상을 가진 과학이라는 걸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한참을 한 곳에서 맴도니 답답함, 짜증, 분노가 일었다. 그때 위로가 되었던 것이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저자인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의 일화였다. 말리노브스키가 트로브리안드 섬에서 현지조사를 하며 쓴 일기가 사후에 출판되었다. 그 일기에는 원주민에 대한 경멸, 혐오, 적개심이 날것 그대로 실려있어 이중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말리노브스키의 일화를 보니 나와 다른 것이 불러일으키는 적대감은 누구나 느끼고, 어쩌면 그런 감정을 인내하며 다른 것을 계속 바라보는 것이 이해하기 자체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이 씨름 끝에 얻은 성과가 있다. 오류가 어떻게 과학일 수 있느냐고 한참 애를 쓰며 생각하다가 미국에서 절찬리에 팔렸던 라듐 화장품이 떠올랐다. 방사능을 노화를 막는 물질로 착각해서 벌어진 일로 1930년대에 들어서야 방사능의 위험성이 알려지고 금지되었다. 그 사실이 떠오르자 과학은 오류가 없는 것이라는 골조가 허물어졌다. 레비스트로스가 말한 대로 야생의 사고와 현대 과학은 구조화를 시도한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런 와중에 우연히 올바른 배열과 마주하게 되는데, 그 확률이 근대 과학이 조금 더 높을 뿐이다. 왜 근대 과학이 범한 수많은 오류를 과거의 일로만 생각하며 절대적인 진리로서 과학을 생각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이해하기는 잠복된 것의 시작이다.

애니 칭은 세계 끝의 버섯에서 불확정성은 역사의 끝이 아니라 오히려 많은 시작이 잠복해 있는 교점이다.”(450)라고 말한다. 확장성이란 단일 작물 농업처럼 내부적인 틀에 어떤 변화도 없이 규모를 바꿀 수 있는 능력이다. 이 확장성은 변화와 마주침을 통해서만 중단된다. 야생의 사고와 같이, 지금까지의 방식으로는 수용할 수 없는 지점이 애나 칭이 말한 확정성이 끝나는 지점이 아닐까. 그렇다면 이곳에서는 온갖 새로운 것들이 싹을 틔울 수 있는 곳이다.

앞서 밝혔던 질서를 파악하 것 자체가 과학이라는 점은 확실히 이해가 되었지만 실용성 없는 과학이 가치가 있는가에 대한 의문은 여전히 남아 있다. 이 지점에서 나는 방향을 틀어 인간에게 실용성이 반드시 필요한지에 대한 의문을 던져본다. 근대 과학은 효과 좋은 마약성 진통제다. 근대 과학은 더운 여름날에 냉기를 느끼게 해주고, 공기의 입자에 관여하여 인공 강우를 내릴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 효과로 인해 기후변화와 생태계의 교란으로 우리 미래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높은 확률로 파국을 맞이할 기술과 효과는 덜 하지만 오래 지속 가능한 주술 중에서 선택하라 한다면 사람들은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일까? 사람마다 답은 다르겠지만 실용성이 있어야 가치가 있고, 그걸 좇아 나아간다는 진보는 이제 필연적인 경로가 아니라 하나의 선택지에 불과하다.

애니 칭은 나는 좋은 의도라는 이유로 차이를 덮어 가려버리는 방식을 거부하면서 차이를 인정할 것이다.”(450)라고 선언한다. 나는 지금까지 어떤 사안에 대해서 서로 의견이 달라도 상대방과 의견을 나눌 필요를 외면해왔다. 얘기해봐야 서로의 생각은 자기나름의 타당성을 갖고 있어 바뀌지않고 괜히 감정만 상할 수 있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런 태도를 설명해줄 훌륭한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상대주의라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회피로는 결코 다른 것을 진정으로 이해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다. 한번은 상대가 하는 이야기와 격렬하게 부딪혀야 했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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