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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술 인류학

두 손으로 도구를 다듬었던 인류의 지혜를 배우자

 

[기술인류학 에세이] 농사에 어울리는 동사를 찾아서 (최종)

작성자
coolyule
작성일
2024-12-23 23:48
조회
58

기술인류학 2024-12-23 김유리

 

 

농사에 어울리는 동사를 찾아서

 

 

기술 인류 세미나를 같이 하는 미자 샘이 묻는다. “벼농사는 벼라는 생산물을 ‘만드는’ 일이죠?” 동사 탐구 과제의 주제를 못 정해 뭉개고 있는 나에게 실낱같은 빛이 스친다. 나는 냉큼 대답한다. “생산물은 부차적이죠. 처음부터 끝까지 토지의 문제예요. 흙이 만들어져야 작물도 결실이 있고요. 흙이 안 만들어진 상태에서 결과부터 뽑아내려고 하면 밖에서 뭘 사다가 투입해야 해요.” “그렇군요. 유리 샘에게 당연한 것들이 다른 일을 하는 사람들이 보기엔 생각지도 못한 일들일 수 있어요. 농사짓는 일에서 토지를 보는 사람은 없어요. 대부분 생산물을 보죠.”

나는 농부다. 농부는 토지에서 일한다. 농부와 토지가 맺는 적절한 관계는 어떤 것일까? 농부는 토지의 지배자인가, 아니면 자식인가? 농부가 토지를 대하는 태도는 인간이 살아가는 방식이 되고 문명의 운명을 결정한다. 이 글에서 나는 E. F. 슈마허가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적절한 토지 이용”에 대해 들려주는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면서 농부로서 농사일에 알맞는 동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동사를 찾아서

 

벼를 ‘만든다’는 말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작물은 인간이 제조한 것이 아니라 자연이 주는 것을 받은 것이다. ‘만든다’와 ‘받는다’ 사이 어딘가에 위치한 동사 없을까? 세미나에 참가하는 다른 샘인 진진 샘은 ‘기르다’라는 동사를 제안한다. ‘기르다’는 축산에 쓰이지, 작물의 재배에는 맞지 않는 것 같다고 생각한다. 기른다고 할 때는 작고 여린 생명체를 다 자랄 때까지 먹이고 돌보는 장면이 떠오른다. 아무래도 동물성이다. 강아지는 기르고, 열무와 유자나무는 키운다. 농사에는 ‘기르다’와 ‘키우다’를 아우르는 동사가 더 어울릴 것 같다.

일단 ‘작물을 키우다’를 포함하는 문장을 완성시켜 본다. 주어의 자리엔 무엇을 넣을까? “농부잖아요?” 진진 샘과 친구들이 대답한다. 하지만 농부는 동의하지 않는다. 주어의 자리에 농부를 넣으면, 농부는 부적절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농부가 아무 일 안 하는 것은 아니다. 농부는 농사를 마칠 때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지 못 하고 바삐 움직인다. 그렇다고 농부 혼자 작물을 키우는 것은 확실히 아니다. 농부가 최선을 다해도 작물이 잘 안 되는 경우도 있다. 농사 결과가 매년 달라지지만 그 과정에 어떤 변수가 작용했는지 알 수 없어 짐작만 할 따름이다.

농부는 자연과 공동으로 생산한다. 농부는 비 오기를 기다려 콩을 심는다. 비가 안 오면 콩을 심어도 싹이 안 난다. 그렇다고 비가 너무 많이 오면 농부가 잡초의 성장 속도를 쫓아갈 수 없어 콩이 풀에 치인다. 시간당 강수량이 도를 넘으면 표토가 침식된다. 벼 이삭이 처음 나올 때 태풍이 오면 벼꽃 수정이 잘 안 된다. 삼복 더위가 없으면 벼가 안 큰다. 초가을 벼 이삭이 영글 때 비바람이 불면 대가 가는 재래벼는 전문 용어로 ‘자빠진다.’ 그러면 농부가 출동해서 일일이 묶어서 일으켜준다. 농부는 토지와 비와 바람과 햇살과 공동으로 콩과 벼를 생산한다.

 

농사는 작아지는 일

 

농사는 농부 혼자 짓는 것은 아니라고 하자 윤영 샘이, 그렇다면 농사짓는 일은 슈마허의 『작은 것이 아름답다』에서 말하는 맥락에서 인간이 ‘작아지는’ 방식인 것 같다고 말한다. 공감한다. 인간이 거인이 되어 자연 전체를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자연과 협동해서 일하는 그림이 농사일에 더 어울린다. 농사가 산업이 될 때, 가족 단위 농부들이 경작해 온 일터를 병합해 대규모 농장으로 키우는 경향이 발생한다. 투입 대비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농업 종사자 수를 줄이고 기계로 작업을 대체한다. 농부가 트랙터에 한번 올라가면 다시 내려오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아무리 자연과의 협력이 농사 본연의 모습이라고 해도 농부가 몸이 아프면 어떻게 해야 하나 궁금할 수도 있다. 나도 손모내기 중에 허리 부상을 입고 지루한 회복 과정을 밟고 있다. 미자 샘은 이 과제를 첨삭해 주시면서 몸이 아프면 기계에 의존해야 되지 않은가 하고 의견을 달아 주셨다. 과연 도시인다운 지적이라 흥미롭다. 차이에 기뻐하며 즐겁게 답변하자면, 몸이 말을 안 들어 일을 할 수 없게 된 농부들이 흔히 선택하는 대안은 토지에 나무를 심는 것이다. 일 년 단위로 돌아가는 식량 작물 재배는 매년 새로 땅을 갈고 새로 씨앗을 심는다. 심은 작물이 초기에 풀과의 경합에서 밀리지 않도록 농부가 개입해서 풀을 제어해준다. 토지의 자연스러운 천이 과정을 역이용하는 경작 방식이다. 일년 단위 농사 주기의 속도를 감당할 수 없는 몸이 되면 농부는 다년생 작물을 심어서 노동 강도를 줄이고 속도를 느긋하게 조정한다. 나아가 나무를 심는 것은 인간의 생애 주기보다 큰 순환의 리듬에 올라타는 일이다.

농부는 취약한 생명체로서 토지와 협동한다. 농사를 짓는 일은 기계와 합체된 크기에서 사람의 본래 크기로 ‘돌아오는’ 일이다. 자본이 필요한 거대 기계에 의존하지 않으려면 여럿이 모여 일을 나누므로 농사는 ‘많아지는’ 일이다. 농사는 농부의 신체 조건에 맞추어 ‘조율하는’ 것이다.

 

농사일은 생산일까, 소비일까?

 

농사일은 생산일까, 소비일까? 한편으로 농부는 먹을거리를 생산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토지와 공동으로 생산한다. 슈마허는 토지를 흙과 거기 사는 모든 생명을 포함한 것으로 정의한다. 다른 한편, 농부는 소비한다. 농부는 사치스럽게도 맛있고 건강하고 사랑스러운 먹을거리만 탐한다. 바로 자기 집 작물 말이다.

농업에서는 생산과 소비 행위가 동시에 일어난다. 사실 인간이 하는 모든 행위가 그렇다. 인간 행동의 동기를 이기심 하나로 보는 경제학의 차원을 넘어서는 메타-경제학의 차원이 있다. 인간은 영혼을 가진 존재로서 행동한다. 기존 경제 질서는 인간 행위를 생산과 소비로 이분법적으로 나누고 인간을 비인간적으로 취급했다. 이런 모욕은 물질적 부로 보상되지 않는다.

농업은 산업이 아니다. 농업에 산업의 원리를 적용하면 심각한 현실 문제가 발생한다. 농업은 살아있는 존재들을 다룬다. 그런데, 산업의 이상은 생명체를 배제하는 것이다. 산업은 인간을 포함하여 살아 있는 요소를 배제하고 생산 과정을 기계에 맡기는 것을 이상으로 한다. 슈마허는 오늘날 토지에 대한 주요 위험, 그리고 농업을 비롯한 문명 전체의 주요 위험은 농업에 산업의 원리를 적용하기로 결정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단언한다.

농업과 산업의 원리는 본질적으로 다르며 대립한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농업이 1차적이고 산업은 부차적이다. 슈마허를 읽으며 농부의 가슴은 초심으로 돌아가 두근거렸다. 농업은 생명을 그 자체로 목적으로 여기는 문명의 방어선이다. 나의 일터는 근현대 산업주의의 큰 파도가 치고 들어오는 것을 저지하는 경계선이다. 농사란, 경제학을 넘어선 영혼의 가치를 붙들고 있는 일이로구나 하는 깨달음이 솟구쳐 올랐다.

 

전통의 가르침

 

그동안 나는 왜 그런 지혜를 다 잊고 있었을까? 언제부터인가 반복되는 일상에 묻혀 푸념만 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슈마허에 의하면, 공부에 게을러서 그런 것이다. 인간의 존엄한 위치와 신성한 임무에 대해서 일깨우는 “형이상학적인 진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을 주는 지혜로운 이야기들을 무시하고 살아서다. 물질적인 자원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신적인 자원이 부족해서 삶은 열악해진다.

농사 학교를 마치고, 논밭을 마련해서 농사를 시작할 때의 일이 떠오른다. 어설픈 초보 농부의 출발이 안쓰러우셨던지 농사 선생님은 충청도에서 트럭을 몰고 단숨에 이곳 전라도까지 찾아오셨다. 땅을 함께 둘러보며 대화를 나누다가 “여기를 에덴 동산으로 가꿔 봐” 라는 말을 남기셨던 기억이 난다. 둘 다 기독교인은 아니었지만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후의 나의 농사 적응 과정은 걸음마를 배우다가 앞으로 넘어지고 뒤로 자빠지기의 연속이었다. 그로부터 15년이 지난 지금 슈마허를 읽으면서 선생님의 그 말씀이 농부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온 전통적인 지혜를 전수하는 의식이었다고 새삼 의미를 부여하게 된다.

토지와 적절한 관계를 맺는 태도에 대해서 모든 전통은 가르침을 전달해왔다. 귀중한 옛 관념들은 모두 토지가 그 자체로 목적인 가치를 가진다고 가르친다. 무지와 탐욕으로 토지를 파괴하지 않으면 문명은 건강성과 건전성을 보전한다. 토지를 생산의 수단으로만 대하면 토지와 함께 문명이 병든다. 정성껏 돌봐온 동물을 효용이 다한 도구처럼 폐기하는 것은 동물과 적절한 관계를 맺도록 가르쳐온 모든 전통에서 끔찍하고 위험한 일로 경고할 만하다. 토지의 남용은 타락의 증거다.

슈마허는 토지와 그 위의 생명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에 대한 전통적 가르침의 예로, 에덴이라는 정원에서 하나님이 인간과 나누는 대화 장면을 이야기한다. 하나님이 인간을 정원에 데려와서 “게으름 피우지 말고 잘 가꾸고 돌보라(not to be idle, but to dress it and keep it)”고 하는 장면이다. 신은 육지와 바다에 사는 동식물을 만들고, 그것들을 참 좋은 것이라고 생각한다. 신이 좋다고 한 것은 인간에게 선한(good) 것이다. 신이 인간에게 정원의 지배권을 주면서 ‘가꾸고 돌보라’고 한 것은, 땅이 벌거숭이가 되지 않게 입히고(dress) 모든 피조물이 영속할 수 있게 지키는(keep) 일을 시키신 것이다.

 

선한 노동

 

인간은 신성한 임무를 받았다. 그것은 선한 일(good work)이다. 에덴은 비옥한 토지에서 생물다양성이 폭발하는 신의 정원이다. 인간은 이를 가꾸고 지키는, 어렵지만 고귀한 사명을 부여받았다. 그의 일터는 사치스러울 만큼 최상의 작업 환경을 갖추었다. 그곳은 건강하고 아름답고 영속적이다. 그가 맡은 임무는, 하나의 피조물인 인간 자신도 처음 해보는 일이지만, 대담한 상상력과 창의성을 발휘하며 타고난 잠재성을 최대로 끌어올릴 수 있는 종류의 일이다. 어려운 현실 문제에 봉착할 수도 있다. 그럴 때면 선선한 초저녁 신과 함께 정원을 산책하는 시간에 그 주제로 느긋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아름답고 풍요로운 정원에서 사려 깊게 일 하는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 전통적인 가르침 속의 인간 본연의 모습이다. 옛 이야기가 가르쳐 주는 형이상학의 체계 속에서 인간은 우주 속의 자기 위치를 확인한다. 인간은 높은 수준의 동기로 자기 삶을 끌어가며 인간을 인간으로, 동물을 동물로 대한다. 인간을 동물처럼 대하고, 동물을 기계처럼 대하는 경제학적 차원의 맹목은 일어나지 않는다. 메타-경제적인 형이상학의 위계 질서 속에서 인간은 존엄하고 모든 생명은 신성하다. 농업은 그 가르침을 따를 때만 고귀한 일일 수 있다.

농사는 토지를 신의 정원으로 가꾸고 돌보는 일이다. 선한 농부는 전통의 지혜를 배우는 데 게으르지 않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농사는 ‘공부하는’ 일이다. 공부는 인간이 되는 길이다. 인간이 된다는 것은 토지를 신의 정원처럼 대하는 일이다. 농부의 영혼에 긍지가 차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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