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항해하다(최종)
멈추지 않는 항해로 우주 활동에 참여하다
현대인이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날 경우 그 항해의 목적은 선명한 몇 가지로 축약된다. 물품을 수출해 돈을 벌거나 힐링을 위한 여행을 떠나거나 새로운 일자리를 찾기 위해서 등이다. 나름 모두 유익한(?) 것들로, 항해의 목적과 이유가 납득이 된다.
그런데 여기 납득되지 않는 모호한 이유로 험난한 항해를 하는 이들이 있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 소개된 ‘쿨라(Kula) 원정대’는 물건을 사고팔아 이윤을 남기기 위해, 혹은 낯선 타지로 가서 정착하기 위해 항해하지 않는다. 이들은 그저 타인에게 조개 목걸이를 선물하기 위해 바다 위에 배를 띄운다. 굳이 말하자면 선물을 교환하고 싶은 욕망, 이것이 이들이 항해하는 목적의 전부이다.
‘쿨라(Kula)’는 뉴기니 해안과 그 주변 섬에 사는 파푸아–멜라네시아인들이 일정한 교역 루트를 따라 특정한 형식 아래 행하는 교역 행위이다. 일상에 필요하지도 않는 두 개의 순수 장식품, 팔찌 므와리(mwali)와 목걸이 소우라바(soulava)를 항해를 하며 끝없이 되풀이해서 교환한다. 그런데 이상하다. 필요도, 기능도 없는 이 장식품 교환 행위에 부족 사람들은 엄청난 정열을 보인다. 그렇다고 이 장식품을 소유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심지어 이것은 크기가 매우 작아 착용하기에도 불편하다.
파푸아–멜라네시아인들은 모든 불필요와 불편을 감수하고서 왜 이토록 두 개의 장식품 교환에 정열을 보이는가? 이윤도, 기능도, 장식조차도 이 항해의 목적이나 필요가 아니다. 무용해 보이는 이 물건을 주고, 또 받기 위해 이들이 그 멀고 험한 길을 떠나는 이유가 무엇일까?
쿨라(Kula), ‘관계 맺기’라는 욕망
쿨라의 또 다른 유별한 특징은, 그 본질을 이루고 있는, 교환 행위 그 자체의 성격이다. 절반은 상업적이고, 나머지 절반은 의례적인 교환인 쿨라는, 물건을 소유하고 싶은 깊은 욕망을 충족시키는 가운데, 쿨라 그 자체가 목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여기서도 주의할 것은 그것이 보통의 소유가 아니라 특수한 유형의 소유로서, 두 가지 종류의 물품을 번갈아가며, 짧은 기간 동안만, 소유하는 것이다. 소유의 상태는 영구적이 아니라는 점에서 완전한 것이 못되지만, 물품을 계속적으로 소유하게 되는 빈도로 보면 소유의 기회는 높아지며, 그런 점에서 누적적 소유라 부를 수 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전남대학교 출판부, 670쪽)
팔찌와 목걸이 교환은 매우 엄격한 제한과 규칙 아래서 행해지는데, 쿨라(Kula)에 참가하는 남자는 정해진 몇 사람하고만 교환하며 이 상대들하고의 관계가 평생에 걸쳐 지속된다. 그런데 여기서 공동체 내 이 남자들의 지위 차이가 드러난다. 어떤 평민 남성은 교환 상대가 단지 몇 명에 지나지 않는 반면 추장이나 지위가 높은 노인의 경우 많으면 몇백 명까지, 교환 가능한 상대의 범위가 넓다. 쿨라를 위한 항해의 목적이 타자들과의 관계 맺음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이 관계라는 게 예나 지금이나 만만치 않다. 쿨라는 서로에게 많은 의무를 지우고 선물과 봉사를 지속적으로 요구하며 수확물이 있을 때면 더 좋은 것을 골라 상대에게 제공해야 한다. 지위가 높아 관계망이 넓을수록 이 같은 수고를 기꺼이, 그리고 더 많이 해야 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현대를 사는 우리들은 상대에게 선물과 봉사의 의무를 지우기도 꺼릴뿐더러, 좋은 것이 있다면 내가 먼저, 더 많이 갖고 볼 일인데 파푸아–멜라네시아인들이 관계에 대한 생각은 현대의 우리와 확연히 다르다.
그뿐만 아니다. 이 두 개의 장식품은 서로에 대해 역방향으로 움직이기 때문에 두 개를 같은 사람이 받는 일이 없고, 멈추어서는 안 되기에 장식품이 누군가에게 들어왔다 하더라도 1-2년의 보관이면 충분할 뿐, 그 누구도 이 물건들을 영구히 소유할 수 없다. 쓰임도 없는 물건을 단지 1-2년 보관할 뿐인 일에 그 많은 수고를 한다고? 이 일시적 소유의 의미가 무엇일까?
저자는 이 소유가 일시적이긴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가 그 물건을 과시하고, 그것의 입수 경위를 이야기하고, 그 이후에 누구에게 줄 작정인가를 말하는 기회’를 준다고 말한다. 물건이 어떤 사람으로부터 들어왔고, 또 내가 그 물건을 어떤 사람에게 줄 것인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이야기, 관계의 흐름을 함께 보여준다는 것이다. 쿨라는 그렇게 관계의 흐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일종의 ‘장(場)’을 연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이들 부족 사회에서는 관계와 관계에 대한 이야기가 그 사람의 ‘명성’을 얻게 한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명예와 영광이란 타인과의 관계에 있어 얼마만큼 더 넓게 더 많이 엮어 들어가 있는지에 달려 있다. 이 부족을 관찰한바, 물건 교환은 곧 관계 맺음을 의미했다. 관계를 곧 명성으로 생각하는 이들에게 하나의 물건을 영구히 소유하여 하나의 관계를 맺는 것보다 각 물건을 일시적으로 소유하는 대신, 많은 물건을 교환하여 결과적으로 타인과 관계 맺을 수 있는 기회를 더 확보하는 것이 명성을 얻는 데 유리한 것은 당연하다. 소유하는 중에 관계 사이에서 만들어진 이야기를 누적시켜 가고 이후 물건을 밖으로 회향시켜 다음 기회를 얻는다. 그렇게 물건은 떠나지만, 이야기는 점차 쌓여간다.
더 많은 물건을 교환할 수 있는 자, 해서 더 많은 관계를 맺고 더 많은 이야기를 누적할 수 있는 자, 그가 더 높은 명성을 얻는 자이다. 더 높은 명성을 위하여 상대에게 더 좋은 것을 선물하고, 나에게 온 것도 잠시 보관 후 다시 밖으로 돌려보내 이 관계 맺음의 운동을 멈추지 않는다. 파푸아–멜라네시아인들 영구히 소유할 수도, 이윤을 남길 수도 없는 물건을 오직 ‘관계’를 증식시키기 위해, 해서 더 큰 명성을 얻기 위해 교환해 왔던 것이다. 그렇다면 타인과 관계 맺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왜 타인과의 관계 맺음이 명성을 얻는 것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
관계, 힘과 지혜를 키우는 유일한 통로
레비 스트로스는 『야생의 사고』에서 고도로 체계화된 지식이 꼭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서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인간은 생리적, 경제적, 실용적 목적을 넘어 ‘지적 욕구’ 그 자체를 충족시키고 싶어 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지적 욕구는 혼돈처럼 보이는 우주에 어떤 원초적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욕구, 해서 이 세계를 더 잘 ‘알고 싶은’ 욕구이자 이 세계를 새롭게 창조하고 싶은 욕구이기도 하다.
인류는 우주와 세계에 대한 지적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세상을 면밀히 관찰하며 고도화된 지식 체계를 만들어 낸다. 각자 사용하는 언어, 또 그 언어와 함께 만든 개념은 달라도 우주에 원초적 질서를 부여하고 싶어 하는 마음, 우주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의지는 동일하다.
파푸아–멜라네시아인들이 보여준 타자와 맺는 ‘관계’에 대한 욕구는 곧 우주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욕구가 아닐까. 내가 안정적으로 머물고 있는 이 섬 밖으로 나가 더 넓은 곳, 이질적이고 생소한 환경에서 낯선 사람들과 관계를 맺음으로써 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고 자신들의 지식 체계를 재구성한다. 이 변화의 과정을 통해서 세계에 대한 ‘앎’과 이해의 폭은 넓어지고 변화무쌍한 우주 활동에 참여하는 정도도 점차 활발해진다. 사회관계망 안에서 더 많은 관계를 맺을 수 있다는 것은 우주를 이해하는 정도의 폭이 더 넓다는 것, 더불어 우주 활동에 참여할 수 있는 능력치 또한 더 높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니 이들 부족에게 관계 맺는 폭의 정도가 곧 이들의 명성과 직결된다는 사실이나 또 왜 이들이 그토록 ‘쿨라’에 열정을 보였는지, 왜 쿨라를 위해 기꺼이 험난한 항해를 떠났는지가 이해된다. 세상을 이해하고 우주를 변화시킬 수 있는 힘과 지혜, 그것이 곧 사회적 능력과 명성을 가늠하는 척도가 된다. 그리고 이는 오직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
주술로 우주를 새롭게 하다
그런데 세상을 알고, 우주 활동에 참여하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관계의 폭을 넓혀가는 과정에 ‘주술’을 불어 넣어 이 욕망을 더 밀고 간다.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는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에서 이 항해자들의 쿨라에 주술이 극도로 중요하며, 차지하는 비중 역시 매우 높았다고 말한다. 그는 원주민들이 근본적 중요성을 가진 문제에 직면할 때면 주술의 도움을 받는 것을 발견했다. 원주민들에게 주술은 ‘인간에게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을 부여하여, 인간이 겪을 수 있는 온갖 위험에 대응하도록 해주는 무기와 갑옷’(521)과 같다.
주술은 항상 존재했던 것으로 전해져 내려왔다. 주술은 인간에게 지극히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모든 것에 내재하는 요소로 간주되어 왔다. 주술사가 사물에 대해 그의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사용되는 말(=주문) 또는 과정(=의식)은 그것들(=인간에게 중요한 모든 것)과 항상 함께 있었다. 주술의 형식과 그것의 주제는 함께 태어난 것이다. (같은 책, 527쪽)
원주민들의 삶 모든 곳에서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주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 아니다. 주술은 이미 만들어진 형태로, 인간이 아닌 존재로부터 인간에게 건네진 것이다. 원초적으로, 본래부터 있던 것이 어떤 형태로 조상에서 자손으로 또 그다음 자손에게, 태초의 모습 그대로 ‘변형 없이’ 전승되고 있는 것. 해서 주술은 언제나 현재적이고 동시적이다. 지금 현재를 살고 있는 자손은 이 주술을 통해서 조상들과 연결되고 우주의 원초적 힘을 현재의 힘으로 현실화한다. 주술을 행하는 가운데 우주, 조상, 자손은 같은 시공간에 공존하고 있는 것이다.
주술은 인간이 창조한 것도, 인간이 변형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지금 여기에서 주술을 실행하는 것은 인간이다. 주술을 한다는 것은 인간이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믿음이 원주민들의 삶 전체를 지탱한다. 원주민들은 천둥을 피하기 위해 주술을 하는가 하면, 음식물을 오래 보존하게 하는 주술도 있으며, 마을 전체의 이익을 추구하는 공동의 밭 주술도 행한다. 자신들에게 불경한 힘을 주술로 막고, 원하는 바를 성취하기 위해 주술을 부리기도 한다.
원주민들은 그렇게 주술의 힘이 우주 운행을 변화시킨다고 믿는다. 어찌 보면 주술을 행하는 인간의 힘을 꽤 과신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는 지나친 인간 중심주의가 아닐까? 인간을 세상의 중심에 놓고 살아서 환경오염, 생태계 파괴, 생물의 멸종 등 온갖 폐해가 드러나고 있는 현대와는 무엇이 다른가? 이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역시 우주 운행에 있어 인간을 그 중심에 두지만 중심을 회항하며 열어둔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간 중심주의와는 구별된다.
가능한 수단들을 동원하여 자연의 힘을 사로잡은 다음 개인 혹은 특정 집단만을 위해 사용하고 가두지 않는다. 그 힘을 소유하지 않는다. 비인간의 힘을 끌어와 인간만을 위해 복종시키고 희생시키는 방식이 아니라 ‘인간 내면의 힘이 자연에 대한 자기주장을 하는 것’(534)으로, 이때 인간이란 부족 전체와 조상까지 모두 포함한다. 그리고 인간 스스로 자신들을 자연의 일부로 이해하며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잊지 않는다. 주술을 통해 우주로부터 기운과 영향을 받아 부족, 조상, 자연을 이롭게 한 뒤, 그 기운과 영향을 다시 자연과 우주로 돌려보낸다. 부족, 조상, 자연은 하나로 연결되어 분리되지 않는 것으로 부족의 이로움은 곧 자연 전체의 이로움이 된다. 그 힘들이 들어왔다 나가는 일종의 통로이자 매개자로서 인간을 중심에 둔다는 점에서 현대의 인간 중심주의와 다르다. 우주로부터 온 힘이 다시 우주로 회향하지만 ‘인간 통로’를 거친 힘의 성질은 변화되어 우주 활동에 새로운 움직임을 만들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