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 인류학
[마음 인류학 에세이] 주술을 말하다(최종)
마음 인류학 / 최종 에세이 / 2024.12.23. / 강박순
주술을 말하다 : 말의 힘
이번 학술회 주제의 동사는 ‘말하다’이다. 올해 국회의원 선거가 있었다. TV를 틀면 듣게 되는 정치인들의 발언은 항상 화제였다. ‘제가 국회의원이 된다면 지하철 노선을 확정지어서 경제를 살리겠습니다’, ‘약속을 지키는 국회의원이 되겠습니다’ 등… 다양한 약속을 했다. 그러다가 나중에 여당 혹은 야당 의원들이 과거 발언에 이의를 제기하면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었냐?!’라면서 발뺌을 하거나 당시 증거화면을 제시하면 ‘실수해서 발언했다, 과장해서 발언했다’라는 핑계를 대곤 한다. 이렇게 말은 힘도, 무게감도 없이 깃털처럼 가벼워지고 희미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대방이 하는 말에 신뢰가 없어져 녹음기를 틀어 놓고 대화한다. 나는 말에 대한 무게감이 전혀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말에 대한 무게감을 어디서 찾아야 할까. 주술문화가 있는 서태평양의 부족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주술하다 : 주술 탓
서태평양의 트로브리안드 지역은 여러 개의 섬들이 각각 떨어져 있는 곳이다. 이곳에는 각자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가지고 살아가는 부족들이 있다. 서양 인류학자인 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는 이곳에서의 경험을 통해 이들의 문화와 전통을 이해하는 『서태평양의 향해자들』을 집필했다. 그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바로 ‘주술과 쿨라’이다. 그는 이들의 삶이 주술과 아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들의 삶 자체가 주술로 시작해서 주술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까지 수집된 모든 자료는 쿨라에 있어 주술(magic)이 극도로 중요하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다. (중간생략) 원주민이 근본적인 중요성을 지닌 문제에 맞부딪힐 때는 반드시 주술의 도움을 받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들이 생각에 따르면, 주술이 인간의 운명을 지배한다고 해도 과장은 아닐 것이고, 주술은 인간에게 자연력을 지배하는 힘을 부여하여, (중간생략) 모든 종류의 고통스러운 질환이나 만성질환도 주술 탓으로 돌려진다. 『서태평양의 향해자들』(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지음, 최협 옮김, 전남대학교출판부, 521쪽)
여기에서 흥미로운 점은 트로브리안드 사람들이 대부분의 일을 ‘주술 탓’으로 돌린다는 것이다. 내가 잘못을 했거나, 상대방이 실수를 했거나 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주술 탓’이다. 직접적으로 상대방의 실수를 지적하는 오늘날과는 많이 다르다. 예를 들어서 트로브리안드에서 가장 기본적인 경제활동은 2가지이다. 하나는 밭을 경작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바다에 나가서 하는 고기잡이이다. 이것은 개인의 주술이라기보다는 공통체적 주술이다. 공동체의 주술은 흩어진 에너지를 한곳에 모아서 힘을 강하게 한다. 밭을 경작하는데 비가 오지 않는다면, 이들은 주술이 잘되지 않아서 주술의 힘이 부족했나 보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주술사에게 요청해서 주술을 한다. 경건한 마음으로 주술사가 주문을 낭송한다.
경제활동 잘잘못의 대부분은 잘 되도 못 되도 ‘주술 탓‘이다. 경작과 어업은 운이나 우연에 좌우되고, 부족들은 초자연적인 힘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저자는 트로브리안드에서 경제활동은 주술에 대한 믿음이 강하고, 주술은 조직화와 체계화를 가져주는 중요한 심리학적 요인(같은 책, 523쪽) 이라고 강조한다.
주술로 신체에 새기다 : 낭송
이들 부족들에게는 타 지역의 섬에 가기 위한 이동수단으로 카누를 만드는 문화가 있다. 그들은 카누를 만들기 전 나무 고르는 일부터 의식을 치는데, 주술로 시작한다. 주술 의식을 받지 않은 카누는 바다에 타고 나갈 수 없다. 그렇다. 하나의 카누를 만들기 위해서 많은 부족들이 공동체의 일원으로 참여한다. 카누를 다 만들었다고 해도 끝이 아니다. 카누를 만들고 다른 지역으로 향해하는 동안에도 주술은 끊임없이 이어진다. 바나나 잎을 따서도, 카누에서 노를 젓는 일에도, 도착해서도, 삶 전체가 주술이다.
부족들은 주술의 힘을 강력하게 믿어왔다. 주술은 낭송으로 한다. 그냥 말하는 것이 아니다. 낭송은 암기된 주문이여야 한다. 주문 내용은 오랫동안 내려오는 신화의 조상 이름과 사건들의 이야기이다. 이렇게 암기된 주문은 신체의 배 부위에 저장되어 있다가, 발성을 통해 주술자의 신체 밖으로 나오면서 힘을 발휘한다.
주술의 말을 끊임없이 되풀이함으로서, 그 힘이 물질에 전이되도록 하는 것이다. (중략) 암기한 주문과 마음으로 배운 전통은 몸속의 더 깊은 곳인 배 부위에 저장된다. 어느 남자가 많은 주문을 외울 수 있을 때, 그 남자는 좋은 나노라를 갖고 있다고 말 한다. 『서태평양의 향해자들』(브로니스라브 말리노브스키 지음, 최협 옮김, 전남대학교출판부, 544쪽)
낭송은 곧 물질에 새기는 행위이다. 그들은 왜 이렇게 주술을 대상에 새기려고 할까? 낭송에는 어떤 힘이 존재하는 것일까? 이렇게 하는 이유는 단 하나이다. ‘자신이 과거를 계승하는 자라는 것을 증거한다(같은 책, 548쪽)’이다. ‘나’라는 존재는 하늘에서 뚝딱 떨어진 것이 아니라 조상의 업에 의해서, 신화적 이야기를 통해서 태어났다. 주술사가 낭송하는 행위는 결국 조상과 연결성이 있기 때문에 그것을 잊지 말라는 의미해서 새기는 것이다.
주술에는 이렇게 말의 무게감이 있다. 그 무게감은 체중계로 측정할 수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것 중에서 구두약속, 거짓말, 헛소리, 은어 들은 신체에 새길 수 있고, 무게감이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신체에 새길 수 있는 말하기는 조상과의 연결이기도 하지만, 온전히 자기 자신에게 집중하는 내면의 힘을 키우는 것이기도 하다. 본인 스스로 말을 할 때 마다 그 말들이 각인이 된다고 생각한다면, 더욱더 조심스럽게 언어를 사용하지 않을까. 그게 진정으로 무게감 있는 말하기가 아닐까.
작년 아버지 제사 때 형을 대신해서 제사 상차림 앞에서 제사 지방을 쓰고 축문(祝文)을 읽었던 적이 있었다. 그 축문을 읽을 때 낭송하듯이 읽었었는데, 온몸에 전율이 흘렀었다. 그 해 여름에 할아버지 제사까지도 했었는데 전과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이런 낭송이 몸에 새기는 것이 아닐까? 이런 자세와 음성으로 말할 때 신체에 힘도 생길 수 있고, 동시에 말의 무게감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