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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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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노동의 의미

작성자
최수정
작성일
2024-12-30 22:48
조회
46

2025. 1월 글바다

 

노동의 의미

2024.12.29. 최수정

 

주제문: 노동은 인간을 생산한다.

글의 취지: 야생의 노동과 현대 노동의 차이로 인간성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이는 사회적 삶도 없으며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삶의 최우선이 되고, 노동으로 얻는 즐거움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이 충분하면 노동을 그만둘 것이고, 노동할 시간에 다른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살고 싶어 한다. ‘노동이 자신을 속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을 하며 행복을 느끼지 않고, 노동이 오히려 삶을 고통스럽게 한다는 생각이 깔려있다.

나도 마찬가지다. 노동을 떠올리면 우선 고단함이 느껴진다. 자아실현, 타인과의 관계 맺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정감보다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이 더 크게 느껴져서 가능하다면 노동에서 멀어져 살고 싶다.

그런데 최근에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고 나의 이런 노동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자 직접 노동 현장에서 체험한 동사들의 이야기다. ‘연결하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저자는 노동 현장을 옮겨다니며 특정한 노동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희로애락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노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노동을 통해 먹고 살고, 먹고 산 분투의 흔적이 신체에 각인된 모습이 나다. 노동하는 순간순간은 나를 스스로 만들어가는 제작과정이 될 수 있다.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택배회사의 강도 높은 밤샘 노동이 끝난 후 아침 해를 바라보며 삶의 기쁨과 자신감을 느끼던 모습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통해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사람들은 자기 효능감을 느낀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기 때문이 아닐 것이다. 노동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어떤 것이 있는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이를 좀더 생각해보기 위해 인문세 인류학 시간에 읽었던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노동 모습을 떠올려 본다. 그들은 노동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낀다. 그들이 경작한 작물들을 위해 부단히 갈고 닦아온 노력을 자랑스러워한다.

 

노동과 기쁨

서태평양의 항해자들트로브리안드인들은 식용작물을 얻는데 필요 이상의 노동을 하여 잉여를 생산한다. 그들의 노동은 많은 부분이 실용적이기보다는 심미적 측면에 투입된다. 밭을 깨끗하게 하고 산뜻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깔끔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치며 강하고 큰 나무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밭을 보기 좋게 가꾸는데 많은 시간과 노동을 바친다. 비실용적 요소들이 오직 장식과 주술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습도 보인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일과 노력은 그 자체가 목적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노동은 즐거움과 여가의 문제와 구분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잘 해볼지 고민하는 일에 끝이 없다. 노동을 통해 자연물의 질을 향상하고 미적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긍지를 느끼는 모습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밭이 말끔하고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밭을 가꾸는 이 모든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그것에 투자할 수 있는지를 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 생산된 잉여물은 밭에서 그냥 썩어서 버려지고 만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점은 밭의 주인이 거둔 대부분의 수확물은 모두 이런저런 결혼관계로 맺어진 친척들에게 나눠준다.

과잉생산된 잉여물은 다른 사람을 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명성이다.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이익을 챙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작자는 그의 경작 규모와 수확의 양과 질적인 면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상황에 맞는 굉장한 칭찬과 명성을 얻는다. 그 위세와 명성을 위해 노동한다.

트로브리안드인은 눈앞의 이익추구에만 급급하거나, 실용적 목적의 달성만을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이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잉여는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축적되지 않는다. 이들의 노동은 처음부터 관계에 대한 사유로 시작된다. 내 힘으로 생산된 생산물을 누구와 나누고 어떻게 쓰일지 생각하는 기쁨이 동기가 되었다.



노동과 미()-일상과 예술이 구분되지 않았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노동은 그들의 필요와 소유를 충족하기보다는 차라리 재능과 취미에 따른 것이다. 원주민들은 이러한 재능과 취미가 주술적 영감에 의하여 배태된 것으로 믿으며, 따라서 그러한 작업에서는 높은 예술적인 감흥과 즐거움을 느낀다.

이들 원주민 예술가들은 좋은 재료가 어떤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며, 완전한 작품을 빚는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특별히 좋은 재료를 발견하면 그것에 매혹되어, 엄청난 노동을 투입하여, 너무 훌륭해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그 때문에 그런 물건은 더욱 더 갖고 싶어진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해야 할 것이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자신의 고유성을 조직해나가는 고귀하고 즐거운 활동이다. 다양한 것들과 관계 맺는 능력을 과시하며 우주에 하나인 나의 고유성과 독특함을 과시한다.

그런 점에서 트로브리안드인의 심미적 생산을 위한 노동은 예술의 행위를 닮았다. 그들은 노동과 삶을 구별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일상을 조형하는 예술가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아이디어와 포부가 가득 차오를 때다. 일상을 창조적 예술 활동으로 만들며 삶의 풍요와 행복을 느낀다. 그들에게 일과 여가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럴 때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의 표출처럼 보인다. 노동에 창조성과 즐거움이 함의되어 노동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된다.

노동은 고된 것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임을 상기한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로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미적 감각이 사라진 노동

현대의 분업화된 노동은 자신이 생산하는 생산물의 전 과정을 볼 수 없다. 하나의 완성된 물건을 위해 좋은 재료를 고르고, 주의를 집중해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있는 경탄할 만한 인내를 기를 시간이 없다. 노동의 목적은 단지 돈이 되었다. 삶의 수단인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서 오히려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인간의 자연화를 염두에 둔 노동이라면 현대의 노동은 자연의 인간화를 위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가공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돈을 위한 노동이 절대화되면서 현대인에게는 노동과 여가가 분리되었다. 자기 삶의 모든 수단을 만들어내는 인간의 노동이 정작 자기로부터 소외되어 있다.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능력이 사라진 자리에 돈으로 살 수 있는 번쩍이는 것들이 자리 잡았다. 돈은 내가 소유하고, 나를 위한 과시용품을 구입하는데 사용한다.


생산된 인간의 모습

인간의 신체도 삶을 위한 도구. 인간이 노동을 위해 사용하는 도구는 도구를 사용하는 신체도 변화시킨다. 트로브리안인들은 밭작물들 속에 자신을 표현한다. 땅과 밭작물은 인간 신체에 저항하는 힘으로 자신을 각인시킨다. 인간의 신체는 투쟁의 흔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흔적들로 변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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