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로 건너뛰기

일본과 스웨덴 특파원이 들려주는 슬기로운 외국살이

[슬기로운 tOkyO살이] 한 그릇에 담은 염원, 연말연시 음식 이야기

작성자
토토로
작성일
2025-01-04 14:15
조회
59

  시간은 피곤하지도 않은지 쉬지도 않고 흐른다. 어김없이 올해도 연말에 접어들었다. 일본은 연말부터 연초까지 비교적 긴 연휴가 있다. 올해는 최대 9일까지 쉴 수 있다고 하니, 그야말로 꿀 연휴다. 뭐하지? 하고 잠시 생각해 보았지만, 엄마에게 긴 연휴는 엄청난 가사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기간이다. 동네에 있는 가게들도 연휴에 들어가기 때문에, 미리미리 식량 준비를 해 두어야 한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치자마자 바로 마트로 향했다.

  마트의 분위기는 마치 한국의 명절 전을 방불케 한다. 오랜만에 집에 오는 가족들을 맞이하기 위에 완성된 요리를 사는 사람, 요리 만들 재료를 사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내가 장을 보러 간 시간은 보통 젊은 사람들이 장을 많이 보는 시간대인데, 이번엔 연세가 지긋한 분들이 많다. 장바구니에 설렘과 신남을 가득 담고 있는 것 같은 표정이다. 자식들과 손자들을 생각하며 즐겁게 장 보는 마음이 느껴져서, 보는 내 마음이 따뜻해진다. 비록 나는 전투 식량을 준비하고 있지만…

  한국에서는 새해 첫날 떡국을 끓여 먹는 반면, 일본 역시 연말연시에 먹는 음식들이 있다. 한 해의 마지막 날에는 ‘토시코시 소바(年越しそば)’를 먹는다. ‘토시코시(年越し)’는 ‘해넘이’라는 뜻으로 12월 31일 오오미소카(大晦日)의 저녁 식사로 이 소바를 먹는 풍습이 있다. 가늘고 길게 뻗은 소바 면발은 우리의 삶이 길고 끊어지지 않기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또, 메밀로 만든 소바 면은 다른 면에 비해 쉽게 끊어지는데, 이는 묵은해의 액운을 깨끗이 끊어버리고 새로운 해를 맞이하자는 상징적인 의미가 있다. 나는 토시코시 소바를 챙겨 먹지는 않지만, 올해는 토시코시 소바를 먹고 우리 모두 힘들었던 2024년을 보내고, 새로운 2025년을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토시코시소바

사진 출처 : おいしいマルシェ


  새해 아침에는 쥬바코(重箱)라고 불리는 겹겹의 도시락에 담긴 오세치 요리(おせち料理)를 먹는다. 오세치 요리는 단순히 여러 가지 반찬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라, 각각의 음식에 특별한 의미가 담겨 있다. 검은콩 조림인 ‘쿠로마메(黒豆)’는 건강과 장수를, 청어알 절임인 ‘카즈노코(数の子)’는 자손의 번영을, 멸치 볶음인 ‘타즈쿠리(田作り)’는 풍요로운 수확을 기원한다. 달걀말이의 일종인 ‘다테마키(伊達巻)’는 학문 발달을, 우엉 조림인 ‘고보마키(ごぼう巻き)’는 튼튼함을, 그리고 새우 ‘에비(海老)’는 허리가 굽은 새우의 모습에서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처럼 다양한 음식들을 통해 새해의 행복과 번영을 기원하고 있는 것이다.


오세치요리

출처 : 虎ノ門コラム

  오세치 요리는 예전에 ‘오후로 사건’의 친구네에서 가족들과 함께 만들어 본 적이 있었지만, 요즘에는 주문을 해서 먹는 가정이 많아서 연말이 다가오면 백화점, 마트, 레스토랑 등에서 샘플을 전시하며 주문을 받는다. 나도 제대로 된 오세치 요리를 먹어보고 싶어 값이 나가는 오세치 요리를 주문한 적이 있다. 비싼 가격에 잔뜩 기대했지만, 냉동으로 배송이 와서 한번 놀랐고, 생각보다 맛이 없어서 놀랐다. 맛이 없었다기보다는 내 입맛에 맞지 않았던 것이겠지만… 그때 이후로 오세치 요리는 맛으로 먹는 요리가 아니라 의미로 먹는 상징요리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30만 원이 넘는 오세치 요리를 시켜 놓고, 결국 남은 것들과 김치를 다 넣고 볶아서 정체불명의 김치볶음밥으로 만들어 먹었다는 안타까운 추억과 함께 우리 집에서는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 요리다.

  우울하고 안타까운 소식들이 가득한 연말이라 뭐라도 희망이 될 만한 것을 붙잡고 싶어서 장바구니에 소바도 하나 넣어보고, 간단하게 나온 오세치 요리 세트도 하나 담았다가, 마음을 바꾸고 대신 덩어리 고기를 샀다. 배추도 사고 나물거리도 샀다. 집으로 돌아와 고기를 삶고 겉절이도 담그고 나물도 무쳤다. 아주 진한 시골 된장에 고춧가루를 넣고 칼칼하게 끓여서 한국식으로 한 끼 거뜬하게 먹었다. 식사를 하며 남편과 아이들과 함께 한국의 안타까운 사고, 슬픈 소식, 혼란스럽고 화가 나는 정치 상황 등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잘 먹고 힘내서 잘 극복하자고 다짐하며, 새해에는 우리나라에 즐겁고 행복한 소식만 가득했으면 좋겠다고 한국식 밥상에 내 진심을 담아 기원한다.

전체 6

  • 2025-01-05 11:39

    왠지 국가별, 지역별 요리 인류학도 흥미로운 이야깃거리가 가득하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한국에서 결혼식 같은 잔치에 국수를 먹는 풍습은 긴 행복, 인연을 염원하는 것이라고 들었던 것 같은데 일본과 비슷하군요. 서양에도 그런 의미가 담긴 요리가 있을지도 궁금해지네요. 또 같은 면이지만 소바면으로 묵은 해의 액운을 끊고, 새해를 맞이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도 재미있습니다. 요리에 의미를 부여하고 염원한다는 것을 생각해봅니다. 오늘 저녁에 요리는 면으로^^


    • 2025-02-01 20:47

      지역별 요리 인류학…가장 흥미로운 분야 아닐까요? ㅎㅎ 먹는게 젤로 중요합니다요 쌤. ㅎㅎ


  • 2025-01-06 17:44

    툭툭 끊어지는 소바면은 한해의 액운을 끊는다는 의미라니 면에 대한 상반된 해석이 재밌습니다. 일본과 한국이 가까우면서도 새해 음식은 서로 많이 색달라 이 또한 인상 깊네요.
    2024년을 큰 사고와 함께 보내게 되어 암울하기도 하고 새해를 앞두고도 신나는 기분을 낼 수도 없습니다만, 토토로 선생님의 새해 밥상에 담은 기원으로 힘을 내봅니다. 이런 시국에도 마음을 다잡으시고 새해 소식을 전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선생님.


    • 2025-02-01 20:50

      선생님, 기다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음을 다잡고 일상으로 돌아오려고 하면 뭐가 빵빵 터집니다. ㅎㅎ 웃지요.


  • 2025-01-07 15:23

    오세치 요리가 뭔지 처음 봤습니다만. 그림을 보면 제철 음식, 신선한 재료가 주일 것 같은데 냉동 배달되었을 때의 당혹감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사진으로보면 시각적 미각적으로 뛰어난 음식 같은데요..결국 남은 것들과 김치를 볶아 볶아 ㅋㅋㅋㅋ. 나물을 무치고 칼칼하게 시골된장국으로 한해를 여셨군요. 선생님의 밥상을 떠올리다보니, 함께 토토로 샘과 밥을 먹고 싶어집니다. 곧 뵈요. 선생님의 목소리가 그립습니다.


    • 2025-02-01 20:52

      지금은 냉동 음식에 대해 크게 거부감은 없지만, 당시에는…아니, 내가 이 돈 주고 냉동식품을 먹어? ㅎㅎ라고 생각했답니다!! 나물과 된장국이 최고입니다!! 선생님^^ 근데 된장국을 끓인 날 잠시 옆집 꼬마가 집에 들렀는데, 개 냄새 난다고 해서 충격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