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학 탐구생활》 편집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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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학을 나눌레오] 노동의 의미
2025. 1월 글바다
노동의 의미
2025.1.13. 최수정
주제문: 노동은 인간을 생산한다.
글의 취지: 야생의 노동과 현대 노동의 차이로 인간성과 노동의 관계를 생각해보자.
많은 사람들이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하고 돈을 벌기 위해 노동을 한다. 자본주의사회에서 돈 없이는 사회적 삶도 없으며 사실상 생존이 불가능하다. 따라서 노동을 통한 경제적 이익이 삶의 최우선이 되고, 노동으로 얻는 즐거움은 부차적인 것이 된다. 이런 이유로 노동을 하는 많은 사람들이 돈이 충분하면 노동을 그만둘 것이고, 노동할 시간에 다른 것을 하며 자유롭게 사는 꿈을 꾼다. ‘노동’이 삶의 자유를 속박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나 또한 예외는 아니다. 나도 노동을 떠올리면 우선 고단함이 느껴진다. 자아실현, 타인과의 관계 맺음,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안정감보다 노동으로 인한 피로감이 더 크게 느껴져서 가능하다면 노동에서 멀어져 살고 싶다.
그런데 최근에 한승태 작가의 『어떤 동사의 멸종』을 읽고 나의 이런 노동관에 대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저자가 직접 노동 현장에서 체험한 동사들의 이야기다. ‘연결하다’, ‘운반하다’ ‘요리하다’ 등. 저자는 노동 현장을 옮겨다니며 특정한 노동을 통해서만 발현되는 희로애락을 본다. 그리고 그 노동을 통해 성장하고 완성되어 가는 특정한 종류의 인간이 있다고 한다. 그것이 무엇일까? 생각해보면 노동은 삶과 분리될 수 없다. 인간은 평생 노동을 통해 먹고 살고, 먹고 산 분투의 흔적이 신체에 각인되어 나를 만든다. 인간의 노동이 생명현상의 연장임에도 불구하고 노동의 가치를 폄하하고 노동에서 환멸을 느끼는 것이 무언가 정상적이지 않아 보인다.
『어떤 동사의 멸종』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택배회사의 강도 높은 밤샘 노동이 끝난 후 아침 해를 바라보며 삶의 기쁨과 자신감을 느끼던 모습이었다. 힘들고 고통스러운 노동을 통해 오직 현재, 오늘 하루에만 집중하며 ‘지금 이 순간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사람들이 느끼는 ‘자기 효능감’이 있었다. 어떤 상황에서도 스스로 적절한 행동을 하며 자기 삶을 창조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념을 갖게 된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이유는 단지 먹고 살기 위해서 혹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숭고한 일이기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에는 내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나는 이 주제를 위해 인문세 인류학 세미나에서 읽었던 브로니슬라브 말리노프스키의 『서태평양의 항해자들』의 노동 모습을 함께 떠올려 봤다. 그들은 자신들의 노동에서 긍지와 자부심을 느꼈다. 자신이 경작한 작물들이 온전히 자기 소유가 되지 못하지만 수확물을 위해 부단히 갈고 닦아온 자기 노력을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나와 다르게 노동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를 통해 나의 편협한 노동관을 바꿀 수 있는 실마리를 찾고 싶다.
노동과 기쁨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식용작물을 얻는데 필요 이상의 노동을 하여 잉여를 생산한다. 그들의 노동은 많은 부분이 실용적이기보다는 ‘심미적 측면’에 투입된다. 밭을 깨끗하게 하고 산뜻하게 보이도록 만들고, 깔끔하고 튼튼한 울타리를 치며 강하고 큰 나무 지지대를 설치하는 등 밭을 보기 좋게 가꾸는데 많은 시간과 노동을 바친다. 비실용적 요소들이 오직 장식과 주술적인 목적으로 사용되는 모습도 보인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일과 노력은 그 자체가 목적처럼 보인다. 이들에게 노동은 즐거움과 여가의 문제와 구분되지 않는다. 어떻게 하면 잘 해볼지 고민하는 일에 끝이 없다. 노동을 통해 자연물의 질을 향상하고 미적 아름다움을 더하는데 긍지를 느끼는 모습에서 ‘노동’이란 무엇인가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다.
그들은 밭이 말끔하고 근사하게 보이도록 하기 위해 경쟁적으로 무한한 에너지를 쏟아붓는다. 밭을 가꾸는 이 모든 행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람이 얼마나 많은 노동을 그것에 투자할 수 있는지를 ‘과시’하는 것이다. 따라서 과잉 생산된 잉여물은 밭에서 그냥 썩어서 버려지고 만다. 그리고 가장 주목할 점은 밭의 주인이 거둔 대부분의 수확물은 모두 이런저런 결혼관계로 맺어진 친척들에게 나눠준다.
과잉생산된 잉여물은 다른 사람을 주며 그들이 원하는 것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명성’이다. 실용적인 의미에서는 이익을 챙기지 못한다 하더라도, 경작자는 그의 경작 규모와 수확의 양과 질적인 면을 통하여 직접적이고 상황에 맞는 굉장한 칭찬과 명성을 얻는다. 그 위세와 명성을 위해 노동한다. 노동은 타인의 인정으로 자기 정체성을 확인하는 수단이 된다. 자기 노동을 통해 스스로 공동체 속에 자기 자리를 만드는 유능한 자가 된다.
트로브리안드인은 눈앞의 이익추구에만 급급하거나, 사적 소유권 확보를 위해 일하지 않는다. 그들이 노동을 통해 만들어낸 잉여는 사적으로 소유되지 않고, 축적되지 않는다. 노동은 처음부터 관계에 대한 사유에서 시작된다. 처음부터 끝까지 내 힘으로 생산된 생산물을 어떻게 누구와 나누고 쓸지 생각하는 상호관계에 노동의 동기가 있다. 인간이 자연과 협력하지 않는 한 좋은 수확을 얻을 수 없으며,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고, 생명을 돌보기 위해서는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배운다. 노동 통해 자기중심주의에서 벗어나 자연을 보살피고 다른 사람들과 협력함으로써 자신의 삶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완성해간다.
노동과 미(美)
트로브리안드인에게 노동은 기쁨이다. 그런데 나는 이 기쁨을 아름답다고 느낀다. 내가 그들의 노동에서 느끼는 아름다움은 ‘일 자체를 잘하기 위해 일하는‘ 그 순수한 창조성에 대한 것이다. 트로브리안드인에게 노동은 그들의 필요와 소유를 충족하기보다는 차라리 재능과 취미에 따른 것이다. 원주민들은 이러한 재능과 취미가 주술적 영감에 의하여 배태된 것으로 믿으며, 따라서 그러한 작업에서는 높은 예술적인 감흥과 즐거움을 느낀다.
이들 원주민 예술가들은 좋은 재료가 어떤 것인 줄 잘 알고 있으며, 완전한 작품을 빚는 예리한 감각을 지니고 있다. 이들은 특별히 좋은 재료를 발견하면 그것에 매혹되어, 엄청난 노동을 투입하여, 너무 훌륭해서 사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물건을 만들어낸다. 흥미롭게도, 그 때문에 그런 물건은 더욱 갖고 싶어진다.
인간이 노동을 통해 생산해야 할 것이 유용하고 실용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노동은 자신의 고유성을 조직해나가는 고귀하고 즐거운 활동이다. 다양한 것들과 관계 맺는 능력을 과시하며 우주에 하나인 나의 고유성과 독특함을 과시하며 아름다움을 생산한다.
그런 점에서 트로브리안드인의 심미적 생산을 위한 노동은 예술의 행위를 닮았다. 그들은 노동과 삶을 구별하지 않고, 노동을 통해 일상을 조형하는 예술가다. 인간이 가장 인간다울 때는 아이디어와 포부가 가득 차오를 때다. 저마다의 특정한 인간들이 일상을 창조적 예술 활동으로 만들며 삶의 풍요와 행복을 느낀다. 그들에게 일과 여가가 따로 분리되어 있지 않다. 그럴 때 노동은 고통이 아니라 인간의 가장 깊은 욕구의 표출처럼 보인다. 노동에 창조성과 즐거움이 함의되어 노동 자체가 삶의 기쁨이 된다.
노동은 고된 것이지만, 그 속에서 인간은 자신을 발견하고, 세상과의 관계를 새롭게 정의한다.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자연과 인간이 분리된 존재가 아니라, 상호 의존적이고 조화로운 관계임을 상기한다. 그들은 노동을 통해 얻은 생산물로 자신을 기억하게 하고, 삶의 의미를 찾는다.
노동, 삶의 구체성을 만든다
인간은 노동을 통해 자기 개성이 발휘할 때 즐거움을 느낀다. 또한 그로 인해 공동체에서 자기 정체성 발견하고 공동체와 조화를 이룬다. 각자의 능력과 본성에 맞는 이상적인 노동을 통해 사회에 참여하며 노동의 값진 기쁨을 보상으로 얻는다.
자기 삶의 주인인 사람들이 자신을 믿고 신뢰하는 자기 효능감으로 생산한 인간은 따뜻함을 지니고 있다. 사회참여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이를 통해 정체성을 획득하려는 사람들은 삶을 긍정한다. 이들의 시선은 자기 바깥을 향해 있다. 노동을 통해 인간과 사회를 더 깊이 이해하고 정체성과 자신감을 획득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노동으로 형성된 관계망 속에서 자신감과 정체성을 얻는다.
노동을 싫어하는 나는 요리하는 일은 좋아한다. 특별히 무얼 사야겠다는 생각도 없이 산책하듯 나가는 동네 시장에서 나는 그날의 물 좋은 생선이나 야채를 골라 집으로 데려온다. 하얗고 매끈한 흰 파뿌리를 보면 지나치지 못하고 계획에 없던 파김치를 담고, 반들반들 윤이 나는 파릇파릇 시금치 잎 초록물을 떨쳐내지 못하고 아름다운 소품을 사듯 싸들고 온다. 통통하게 살이 오른 초콜릿 색을 띠고 있는 생물 오징어는 흔히 나오는 재료가 아니기 때문에 보일 때 반드시 사야 한다. 번거롭더라도 즉석에서 내 손으로 마늘을 까고, 손에 빨간 고춧가루를 묻히며 김치를 버무리고 나물을 무친다. 직접 채소와 생선, 고기를 다듬으며 요리를 할 때, 그들이 살아 있는 동안 어떻게 취급받았는지도 볼 수 있으며, 음식이 되는 생명체의 고마움도 느낀다.
매일 세끼 식사를 위해 신선한 재료를 구하고 원초적 손질을 해서 완성된 요리를 만드는 데까지 시간이 많이 걸린다. 하지만 나는 이 과정을 ‘노동’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나는 요리하는 이 모든 과정을 즐거워한다. 같은 재료라도 완성된 요리는 항상 같지 않고, 어떤 때는 볶음, 어떤 때는 무침, 어떤 때는 국과 같은 즉흥적 요리가 된다. 그리고 그 음식을 맛있게 먹는 사람들을 보면 기쁘다. 요리도 너무나 어렵고 힘든 노동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째서 나는 요리가 노동이라고 생각되지 않을까. 이제와 생각해보면 아마 이것이 내가 선택한 세계와의 관계 맺음의 방식이기 때문인 것 같다.
누군가는 매일 먹는 식사를 위한 주부의 이런 1차적인 노동을 노동으로 치지 않는 사람도 있다. 무언가 거창하고 돈이 되는 노동만이 사회적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자기 먹을 것을 스스로 준비하는 이런 기본적인 노동 없이 세상은 돌아가지 않는다. 누가 뭐라 해도 내 방식의 노동이 나의 고유한 삶의 토대를 만든다. 나의 고유한 노동이 나로부터 점점 멀어질 때 나는 그야말로 삶에서 소외된다. 그러고보면 노동을 싫어한다던 나도 누군가와 관계맺는 방식의 노동을 하며 내 삶의 고유성을 지키고 싶었던 것 같다.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어떤 관계를 맺어야 한다. 트로브리안드인들은 자신들의 경작지를 아름답게 가꾸고 수확물을 나누면서 함께 하기 위해 긴 시간 신체적 노동을 한다. 자신의 신체를 매체로 하는 노동을 통해 땅과 사람을 연결하고 소통한다.
어떤 노동이 여기 나와 내 삶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면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런 의미로 노동은 서로의 삶을 공유하는 ‘의미’를 만들어낸다. 삶의 의미는 나로부터 바깥으로 뻗어 나간다.
구체성이 사라진 노동
현대의 많은 노동은 하나의 완성된 물건을 위해 좋은 재료를 고르고, 주의를 집중해 마무리 작업을 할 수 있는 경탄할 만한 인내를 기를 시간이 없다. 노동의 목적은 단지 빨리빨리 벌어들이는 돈이 되었다. 삶의 수단인 돈을 목적으로 삼으면서 오히려 노동으로 고통받고 있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은 자연과 일체를 이루며 ‘인간의 자연화’를 염두에 둔 노동이라면 현대의 노동은 ‘자연의 인간화’를 위한 노동이다. 노동을 통해 자연을 가공하고, 지배하고 소유하려고 한다. 주체와 객체를 구분하고 주체인 자신의 삶을 위한 대부분의 노동을 다른 사람이 대신할 때 그 사람의 삶의 구체성이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삶의 구체성이 상실된 그 자리에 인간은 결국 자기로부터 소외된다. 삶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낼 능력이 사라진 자리에 돈으로 살 수 있는 번쩍이는 것들이 자리 잡았다. 삶 자체가 빛을 잃으면서 그 자리를 대신할 빛이 필요해졌다.
인간의 신체도 삶을 위한 ‘도구’다. 인간은 노동을 위해 신체를 사용하고, 노동을 통해 신체를 변화시킨다. 트로브리안인들은 밭을 꾸미고 작물을 키우면서 땅과 작물에 자신을 표현한다. 땅과 밭작물은 인간 신체에 저항하는 힘으로 자신을 각인시킨다. 인간의 신체는 투쟁의 흔적들을 포함하고 있으며, 그 흔적들로 변형되고 성장한다.
음식을 준비하는 것은 내게 노동으로 생각되지 않는다. 나의 음식으로 인해 즐거워하는 사람들을 위해 창의력과 상상력이 동원된다. 남이 해준 음식을 먹고 오면 나는 그 요리를 집에와서 만들어 본다. 내가 만지는 식재료와 도구들이 나의 몸을 변형시킨다. 그러나 나는 그 변형이 즐겁다. 슬라이스 칼보다 더 얇고 가늘게 칼질하기 위해 가끔 손가락을 자르고 굳은살이 잡히더라도 노동이라는 단어에 스며있는 의무감과 고단함 대신에 기쁨이 있다.
그러나 오랫동안 우리 삶 속에 있던 노동은 삶과 분리되면서 하나의 상품이 되었다. 누구나 손쉽게 노동을 사고 팔 수 있게 되자 돈으로 거래될 수 없던 삶의 영역도 사고 팔 수 있다. 좋아서 하는 일은 취미가 되고 그렇지 않은 일은 노동이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람들은 더 이상 노동을 하지 않으려고 죽을 힘을 다해 노동을 한다. 이런 노동은 삶에서 생기를 앗아간다. 특정한 고유의 인간을 창조할 도구가 무뎌지고 둔탁해지며 불안해진다.
노동하는 인간은 완성되어가는 생산물로 자신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인정받는다. 노동은 우리 신체의 구조와 기능에도 변화를 주지만 인간이 사물과 맺는 관계에도 영향을 준다. 노동을 통한 활력과 기쁨을 경험한 사람은 자신의 삶을 꾸려갈 관계를 활용하는 능력도 얻는다. 그러나 노동이 고통스럽고 불안하다면 그가 모든 삶에서 맺는 관계도 절망적이다. 자기 효능감을 느낄 수 없는 노동은 모든 관계 자체를 부정하게 될 것이다. 싫지만 살아남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노동은 그 자체로 생명을 위협한다.
노동을 통해 생산되는 인간성
『어떤 동사의 멸종』 의 택배기사는 무엇보다 현대의 자본에 속한 임금노동자이지만, 자기만의 고유의 의미를 생산했다. 그는 택배 물품을 옮기고 배열하며 자기 삶의 질서도 만들어갔다. 고된 노동을 반복하며 얻은 자기 효능감으로 삶의 기쁨과 자신감을 얻었다.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트로브리안드인의 노동은 자기 존재를 자연에, 공동체에 각인하는 인간적 행위였다. 저마다의 노동으로 고유의 가치 얻고 공동체에서 정체성을 부여받았다. 이들에게 노동은 견뎌야만 하는 어떤 것이 아니라 내가 주도적으로 선택하고 창조하는 과정에서 삶의 즐거움과 만족을 찾는 기회가 되었다. 자신의 노동을 통해 세상과 소통하고, 세상에 변화를 만드는 주체가 되었다. 노동으로 주도적인 자기 삶을 생산하고 자신의 가치를 세상에 알렸다.
나는 왜 이 사람들의 노동에서 나에게 없는 무언가가 있다고 생각했을까? 그 이유 중 하나가 내가 생각하고 있던 노동의 의미에 있었다. 나는 그동안 노동이 너무나 개인적인 행위라고 생각했었다. 생계를 위해 어쩔 수 없이 하는 고립된 개인적 활동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나의 요리하기는 생계를 위한 임금노동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데 있다. 임금노동만이 진짜 노동이고, 좋아하는 일은 노동이라 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삶을 정확히 이분화하고 있었다.
그러나 ‘어떤 동사의 멸종‘ 택배기사와 ‘서태평양의 항해자들‘ 트로브리안드인은 노동을 기쁘고 아름다운 삶과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았다. 나와 공동체의 삶을 따로 떼어 생각하지 않았다. 반복되는 자기 행위의 인과에 자기와 세계가 함께 있음을 믿었다.
인간의 노동은 자기 혼자만의 삶을 위한 일이 아니고, 노동으로 자기의 모든 관계를 만들어간다. 삶을 위한 노동을 통해 자기를 창조하는 사람들은 고귀하거나 긍정적인 인간성을 스스로 만들어가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