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양 인류학
[블루 머신(3)] 인간, 자연의 하나
블루 머신(2)_2부 블루 머신을 여행하다_강평_250218
인간, 자연의 하나
과학으로 인간이 잃은 것
『블루 머신』 1부는 바다가 엔진이 되어, 태양에서 도달한 에너지를 둥근 지구 전체를 작동시키는 원리를 설명했다. 바다의 온도, 염분, 자전을 주요 요인으로, 표층에서부터 심해까지 인류 역사 내내 작동해온 원리였다. 1부가 바다가 시스템으로 작동되는 것에 대한 설명이라면, 2부는 이 바다라는 시스템에서 살아가는 참여자들에 대한 설명이다. 1부가 거대한 시스템이라는 하드웨어라면, 2부는 시스템에 대한 파인 튜닝 혹은 소프트웨어이다. 참여 방법에 따라 전달자, 표류자, 항해자로 나뉜다. 전달자는 빛과 소리에 의한 전달로 나뉜다. 표류자와 항해자의 차이는 의도 여부이다. 2부에서 헬렌 체르스키는 항해자인 인간이 오랫동안 ‘생존의 문제’로서 주위 환경에 귀 기울여왔음을 말한다. 전달자, 표류자, 항해자가 각자의 위치에서 생존을 두고 착착 기계처럼 돌아가고, 인간이라는 생각하는 포식자들도 각 플레이어와 함께 살아가기 위해 주위를 ‘관찰’했다. 하지만 현대사회 들어서 주위 환경을 읽는 직관이 사라져버렸음을 비판한다. 나는 이 부분에서 울산 반구대 암각화가 생각난다. 기원전 5천 년 전 고래 잡고, 돌에 고래를 새기던 울산 앞바다에 최첨단 정유, 조선, 자동차 회사가 즐비하다. 산업으로 대체된 자리는 고래를 잡기 위한 기술, 협력, 그리고 고래라는 함께 살아가는 생물에 대한 의식이 있던 곳이다.
헬렌 체르스키는 인간의 바다와의 단절 광경으로 범선의 자리를 대체한 ‘증기선’을 상징적으로 꼽는다. 주경철의 『바다 인류』에 따르면 범선은 속도, 비용, 환경 면에서 막 생기기 시작한 증기선에 앞섰다. 범선과 증기선은 거의 100년 이상 공존했다고 한다. 증기선이 마침내 범선을 이긴 것은 다름 아닌 ‘정확성’때문이었다고 한다. 산업사회는 기차, 공장이 시계에 맞춰 돌아가는 세계로서, 정확성, 예측 가능성이 전제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헬렌 체르스키는 증기선으로의 변화를 다른 무엇보다 자연과 함께하는 항해에서 자연과 상관없는 항해로 설명한다. 범선은 거친 바다에서 최소한의 장비, 맨발, 끊임없는 육체적 활동으로 선박의 형태를 변화시키는 배이다. 범선의 항해는 자연의 바람, 근육질로 끊임없이 움직이는 선원, 선원과의 협업, 고독한 리더 선장이 만들어간다. 반면 증기선을 탄 노동자는 바다로부터 격리된 강철 감옥에 갇혀 타오르는 불을 공급하는 ‘하인’이라고 한다. 증기선을 통해 인간은 힘겨운 노동에서 해방된 것이 아니라, 지식과 기술, 연대감, 그리고 자부심을 내어주게 되었다. 헬렌 체르스키는 수 세기 동안 쌓아 올린 지식, 자연과의 연결고리를 기술적 성과라는 낫으로 싹둑 베고 자신을 바다의 생생한 현실에서 분리했다고 평한다.
지구본을 태평양 쪽으로 틀면 온통 파랗다. 군데군데 섬이 있는데, 이 광활한 바다 한가운데 섬에는 사람들이 살고 있다. 그곳에 섬이 있는 것은 어떻게 알고, 또 어떻게 찾아갔을까. 이동 경로상 최초로 폴리네시아에 도착한 사람은 서에서 동으로 이동했다. 표류하다 얻어 걸려서 도달했다면 해풍상 동에서 서였어야 한다. 하지만 그들은 서에서 동으로 이동했다. (‘왜’에 대해서는 『인류의 대항해』에 나온다고 한다) GPS는커녕 나침반도 없는데 어떻게. 1976년 폴리네이시아 마지막 항해사 마우 피아일루그는 선원 13명과 함께 길이 18.7m, 폭 4.7m 카누로 하와이에서 타히티섬까지 4,200Km를 폴리네시아 방식으로 항해하는 데 성공한다. 별자리를 나침반 삼고 리더가 이끌고 선원들의 협업한 결과이다. 이후 현대 하와이인 몇 명을 제자로 양성하기도 했다. 체르스키는 인류가 증기선 이후 엄청난 과학 발전, 그리고 뒤따라온 자만으로 푸른 기계의 작동을 방해할만큼 영향력이 커졌음에 깊은 우려를 표한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자연, 인간의 구성원이 함께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자연을 대하는 겸손함이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제는 부메랑이 되고 있다.
바다의 소리
횟집 수족관을 보면서 그 안에 있는 물고기는 밖이 어떻게 보일까 잠깐 생각한 적이 있다. 그들의 시력, 청력이나 작동방식은 다를 것이다. 또 나는 육지에서 공기를 마시고 그들은 바다에서 호흡한다. 내가 바다에 가면 시각, 청각이 다르게 작동한다. 헬렌 체르스키는 4장 전달자에서 빛과 소리를 차례로 설명한다. 인간은 청각보다는 시각을 더 중요하게 쓰지만 바다생물은 청각이 더 중요하다. 체르스키는 해수면 아래가 ‘소리의 영역’이라고 한다.
인간이 볼 수 있는 것은 빛 중 가시광선 밖에 없다. 가시광선의 양 끝은 보라색 파장 380nm, 빨간색 파장750nm이다. 보라색, 빨간색 파장의 바깥쪽이 말 그대로 자외선, 적외선이다. 스펙트럼으로 보면 감마선, 엑스선, 자외선, 가시광선, 적외선, 마이크로파, 전파이다. 가시광선 중 파란색은 굴절되어 깊은 바다까지 도달한다. 그래서 수심이 낮은 곳에서 피를 흘리면 파란색으로 보인다.
체르스키는 바다가 침묵한다는 말에 분노한다. 바다는 고요하지 않고 매우 많은 소리 신호가 오가는 시끄러운 곳이기 때문이다. 동영상을 보니 돌고래는 주위를 탐색할 때 딸깍 소리를, 의사소통할 때는 휘파람 소리를 낸다. 물고기는 종마다 청력 차이가 커서 수중에서 나는 소리의 일부만 들을 수 있다고 한다. 이기헌샘 제공 동영상을 보니 샛비늘칫과(랜턴피쉬, 손전등 물고기)는 길이 2cm~15cm, 250개 어종, 심해종 중 65%를 차지한다. 랜턴피쉬는 소리 음파 측정을 통해 수심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분명히 심해임이 분명한데 소리로 측정해보니 100m로 나왔다고 한다. 그것도 지구 곳곳에서 말이다. 장비 고장인가? 그런데 어떨 때는 100m, 어떨 때는 500m로 나오기도 해서, 바다 바닥이 움직인다고 생각하기도 했다고 한다. 결론은 거대한 군집이 포식자를 피하고 효과적인 먹이를 구하기 위해 낮, 밤마다 주기적으로 수직 이동했기 때문이다. 서로 다른 층은 소리 탐지기를 그 거대한 군집이 일종의 길막을 했기 때문이다. 이 수직 이동 때문에 이산화탄소가 바다에 빠르게 녹아들어가게 된다고 한다.
고래 귀지에는 고래의 생애가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스트레스까지도. 고래의 스트레스 지수는 포경업자들의 남획으로 1950년, 1960년대 매우 높은 수치에 도달한다. 그런데 문제가 된 것은 세계대전 중에 포경이 중단되었으니 그 시기에는 고래가 모처럼 스트레스 프리여야 한다. 하지만 실제로는 포경이 중단된 1940년대 초 추가로 정점을 찍은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래는 소리로 의사소통한다. 1940년대 고래는 사냥 당하지는 않았지만 2차 세계대전 당시 엄청난 전쟁 소음이 바다를 가득 채웠으니 그 고통이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뜻밖의 부유
플랑크톤은 그리스어 뜻으로 하면 표류자, 부유생물을 뜻한다고 한다. 5장 표류자는 의도하지 않고 이동하게 되었다는 점에서 의도성을 가진 항해자와 구분된다. 코끼리 거북은 에콰도르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갈라파고스 섬까지, 탄자니아에서 멀리 떨어진 세이셸 공화국까지 제각기 표류해서 들어간 것으로 추정된다. (코끼리 거북을 보며 생존력의 중요한 요소로 느긋하고 아무 것이나 잘 먹고, 좀 못먹어도 오래 버틸 수 있는 일종의 무던함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린란드 상어도 그렇게 천천히 자라서 임진왜란부터 지금까지 살기도 한다고 한다. 장수의 비결은 천천히와 무던함인가)
훔볼트 황금 해안도 영양가 많은 심해 한류가 서쪽 해풍으로 표층으로 올라오고 플랑크톤이 덕분에 햇빛을 보면서 시작되었다. 멸치, 정어리, 새로 이어지는 먹이 사슬은 플랑크톤으로 시작되었다. 플랑크톤이 연결하는 연결망이 없다면 있을 수 없는 황금 어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