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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인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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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세 여행기 [최부의 표해록] (후기)기록의 힘

작성자
강평
작성일
2025-03-02 23:13
조회
77

최부 표해록(1)/250302/강평

 

기록의 힘

 

표류자에서 항해자로

중세 여행기 이번 회차 최부(1454~1504)의 표해록(漂海錄)극한 체험, 그 와중의 AI급 기록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간 중세 여행기를 통해 살펴본 조선 외교 통신 사절단의 해로, 육로를 통한 임무 여정은 준비된 루트, 식량, 인원으로도 힘든 여행길이었다. 최부는 클래스가 다른 여행을 한다. 그는 제주로 도망간 노비를 잡는 추쇄경차관(推刷敬差官)으로 공무를 수행하던 중 부친상을 당해 탄 고향 전남 나주로 가는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중국 땅에 도달하게 된다. 망망대해를 떠돌다, 낯선 중국 땅에 도착해서 조선으로 귀향하기까지, 바다와 육지에서 최부가 겪은 몸과 마음의 고통이란 생고생이라는 말로는 다할 수 없다. 생존 귀환만으로 영화의 소재가 될만하다. 표해록은 43명이 13일 표류, 136일 중국 대륙 종단 끝에 전원 귀환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최부는 중국 소식을 알고 싶은 성종(成宗, 1457~1495)의 명으로 표해록을 8일간 저술했다. 표해록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8일이라는 시간은 기록을 다듬는 시간일 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구체적인 매일의 날씨, 지명, 인명을 비롯하여 사건 사고에 대한 놀라운 기억과 세부 기록, 그리고 200페이지가 훨씬 넘는 양이 그 근거이다. 죽을 고비를 넘긴 것만 여러 번, 매일 놀라고 좌절하고, 무엇보다 힘들고 지쳐서 쓰러져 자기도 바빴을 일정이었다. 나는 최부가 왜, 어떻게 이 엄청난 기록을 남겼을까 궁금했다. 허남린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귀환 후 있을 조정의 심문에 대한 대비라고 한다. 나는 이번 강의를 듣고 최부가 그 어떤 순간에도 관찰하고 쓰는 자로서 보인 기질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표해록은 연행사들이 한양에서 신의주를 거치는 육로로만, 수도인 북경까지 북쪽만을, ‘공무로 가서 남긴 종전의 여행기와는 달랐다. ‘바다를 표류하다, ‘남쪽’(월남)공무 외일을 기록한 자료이다. 덕분에 표해록은 중국의 사신 이외 도둑, 하급 관리를 비롯한 중국 필부들의 생활상, 그들이 생각하는 조선에 대한 생각을 들여다볼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표해록은 제목과 달리 바다에서 표류한 기록은 짧고, 중국 땅에서 겪은 일과 그곳의 문화를 다룬 내용이 훨씬 많다. 최부는 제주 바다에서 휩쓸릴 때와 중국 땅에 도달 후 초반 도둑들에게, 이어 왜구로 오인하는 관리들에게 속절없이 휩쓸리는 표류자였다. 하지만 신원이 확인된 이후로는 조선을 알리고, 중국의 문화를 파악하고, 또 그것을 기록하는 적극적인 항해자로 변모한다. 그의 변신 원동력은 그가 시종일관 기록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나는 최부가 매일 기록하고, 기록하기 위해 주의 깊게 관찰하고, 그리고 그 기록을 남기기 위한 무사귀환의 절실함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기록이야말로 최부를 극한 상황 속에서도 살아가게 하는 힘이었다. 최부는 바다에서의 추위, 허기, 갈증, 땅에서의 폭력으로 몸은 만신창이가 되고 때로는 업혀 가기도 하고 조선 땅에 도착할 때는 수레에 실려 들어올 정도로 병약한 상태가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사건 속에서 그는 쓰고 또 썼다.

 

디테일에 나타난 가치관

기록이 힘을 가지려면 내용의 일관성이 있어야 하고, 또 디테일이 그 일관성을 뒷받침해야 한다. 표해록은 조선 선비의 유교사상을 일관성 있는 디테일로 지지하고 있다. 표해록은 중국 강북, 강남의 평범한 일상과, 중국을 바라보는 조선 선비의 가치관도 들어있다. 그래서 독자인 나는 15세기 중국 문화 이야기, 중국인에게 전하는 조선도 재미있지만, 그것을 기술하는 화자의 말에 더 주목하게 된다. 최부가 전하는 말에는 그의 가치 척도가 고스란히 드러나 있기 때문이다. 최부는 유교의 가치로 중무장된 선비였다. 생각해 보면 그가 제주로 파견을 간 것도 도망간 노비를 잡는 공무를 집행하기 위해서였다. 노비가 노비로 살게 만드는 것, 도망가면 붙잡아서라도 끝내 제자리로 돌려놓는 것은 조선의 시스템을 굳건하게 지키기 위한 중요한 방편이다.

유교를 따르든 말든 배가 좌초하고 갈증과 허기로 허덕이면 누구나 처절해지기 마련이다. 최부가 제주 바다에서 표류한 때는 정월이다. 배에 물이 들어오자 물을 퍼낼 도구도 없어 칼로 북을 찢어 그릇을 만든다. 한겨울 춥고 배도 고프고 갈증도 나는데, 말 그대로 밑 빠진 배에 물을 퍼낸다. 배는 우여곡절 수리를 하지만 거의 열흘간 물도 먹을 것도 없이 지내며 오줌을 먹기도 한다. 비가 오지만 담을 그릇도 없고 옷은 바닷물에 젖어, 그 옷에 물을 저장할 수도 없다. 여분으로 둔 옷을 적셔 짜낸 다음 숟가락으로 배급을 준다. 최부는 숟가락 밑에 간절히 입을 벌린 모습을 제비 새끼가 모이를 바라는 모습 같다고 묘사한다. 노비를 잡으러 온 관리와 잡으러 온 그 노비는 아니라도 어떤 노비가 그 물을 함께 마실 때, 노비를 바라보는 그 관리는 어떤 마음이었을지 나는 궁금해졌다. 표해록에는 그에 대한 감상이 없는 것은 최부에게 그것이 관심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긴 혹여 있다 하더라도 기록에 남겼다가는 사대부들의 극심한 비판에 직면했을 것 같다.

표류가 끝나고 땅에 도달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도둑들의 탈취와 폭력, 뒤이은 관리들의 신원 검증이었다. 최부는 조선에서 중국인을 본 적이 없다. 그는 중국인을 유교의 가치를 따르는 한자 문화권의 동류이자, 조선이 공물을 바치는 나라 사람으로 인식했던 것 같다. 그가 처음 중국 땅에 사는 중국인을 만나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그들의 생김새, 옷차림이 조선인과 비슷했다. 그가 중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은 그들이 시끄럽게 중국어를 쓰면서이다. 그는 필담으로 그들과 대화를 한다. 중국과 조선은 말은 달라도 글은 통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어느 중국인은 수레 폭이 같은 바퀴를 쓰고 글은 같은 문자인데, 왜 말은 다르냐고 한다. 중국인과 조선인은 서로에 대해서 아는 바가 거의 없었고, 또 그 알지 못한다는 사실 또한 몰랐던 것 같다. 한편 처음 중국에서 만난 이들은 도둑이었는데 최부 일행에게 금, , 그리고 후추를 요구했다. 당시 이 품목들이 귀중품이었음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조선과 중국의 차이에 대한 해석

최부가 중국에서 느낀 조선과의 차이로 유교, 불교, 상업을 꼽을 수 있다. 중국에서 새 황제가 불교, 도교를 억제한다는 말은 지금까지는 불교가 성행했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조선은 불교뿐만 아니라 상업을 억제했다. 허남린 선생님께서는 중국, 일본이 상업을 자유롭게 허용했던 것에 비해 조선은 양반의 지위를 공고히 하는 방편으로 상업을 억제했다고 말씀하셨다. 최부는 조선이 불교 등 사교가 없고, 장사치의 이익을 따지지 않는 진정한 유교의 나라라고 해석한다.

중국에서 자칭 숨어 사는 선비가 최부의 소식을 듣고 불쌍히 여겨 술을 권하는 장면도 인상적이다. 술은 환대의 표현이지만 최부는 상중임을 알리며 정중히 거절한다. 그 선비가 조선의 불교에 대해 묻자 최부는 조선이 유교만을 따른다고 말한다. 어떤 중국인은 조선, 일본, 고려와 서로 왕래하느냐고도 묻는다. 최부는 고려가 바뀌어 조선이 된 것을 알린다. 중국은 조선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고위 관료가 아닌 것도 있고 조선이 관심 있는 나라가 아니기 때문도 있는 것 같다. 일종의 국정원 관리를 만나 드디어 입국 경위를 설명할 때도 흥미롭다. 그간 최부는 거짓을 고하면 진술이 맞지 않을 것을 염려해 초지일관 꽉 막힐 정도로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둑을 만난 경위에 대한 부분을 혹여 황제가 치안의 부재로 관리들을 책망할까 봐 중국 관리가 편집을 요구하자 이에 응한다. 거짓을 요하는 것이 아니라 완전 삭제를 원하기도 했고, 중국 관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을 보면 최부가 유연함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최부는 압록강을 넘는 마지막 날 글을 마치는 말에 해당할 정도로 긴 분량으로 중국 문화에 대한 총평을 한다. 강남북 할 것 없이 귀신, 불교, 유교를 숭상하고 상업을 중시하는 점, 그리고 작은 눈금으로 이익을 따지는 점을 기록한다. 쓸 것이 없지만 다 기록할 수가 없다고도 쓴다. 그는 상중이라 감히 구경하고 돌아다니거나 경승지를 찾아다니지 못했음도 적는다. 자신이 나설 수 없어 다른 이를 시켜서 소식을 전해오게 했으나 하나를 찾으면 만 개를 빠뜨렸다고 푸념할 정도로, 스스로의 기록을 다른 이들의 관찰력, 표현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점을 적는다. 사선을 넘나드는 격변의 땅에서도 충, 효의 가치를 한순간도 놓지 않고, 상중의 삼감도 유지하며, 그 제한된 조건에서 관찰과 기록을 했다는 최부의 자부심도 느낄 수 있었다.


최부만큼 파란만장한 표해록

중국 필부의 일상, 강북 이외 강남까지의 풍속을 담은 조선시대의 기록을 담은 최부의 기록이 왜 그렇게 귀할까? 조선 500년 동안 표류하다 중국 땅에 간 사람들은 없었을까, 표류한 이들은 모조리 표류하다 죽었을까? 더러 살아 돌아온 경우가 있기는 해도 글자를 모르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기록을 남길 수 없었다고 한다. 한편 내가 생각하기에 글 잘 쓰는 선비들은 평소에 몸을 잘 쓰지도 않아서 표류한다면 생존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표해록 5년 전 무신 이섬이 추자도를 표류했다가 귀환한 적이 있는데 성종이 글쓰기를 시켰으나, 무관이라서 그런지 문에는 밝지 못해 기대치에는 많이 미치지 못했던 것 같다. 김종직이 문장을 정리하였으나, 워낙 초고가 간단해서 아쉬움이 많은 글이었다고 한다. 제아무리 명문장가라도 초고를 줄이고 다듬을 수는 있어도 내용에 살을 붙이고 늘리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 같다. 단순히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보이는 것도 표현에 비례했을 것이다. 결국 글 잘 쓰고, 자세히 관찰하고, 생존력 있는 자가 표류를 하고 돌아와서 글을 쓰는 조건을 모두 충족하는 것은 그만큼 희귀한 일이었던 것 같다.

표해록은 이후 중국을 설명하는 유용한 실용서로 쓰였다고 한다. 강의를 들으면서 야전을 통해 중국통이 되었으니 이후 연행사 후보 0순위가 되지 않았을까라는 추측을 해봤다. 자료를 찾아보니 나중에 연행사 서장관으로 중국을 갔다고 한다. 어쩌다 간 중국의 실상을 머리로 스캔하듯 기록한 인물이니, 공식 임명된 서장관이라면 어마어마한 기록을 남겼을 것이라고, 충분히 추측할 수 있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 기록은 없다고 한다. 어떻게 된 일일까. 최부는 표류 당시 부친상을 당한 상주였다. 표류는 의도하지 않았더라도 귀환 후 하루바삐 고향으로 돌아가 3년상 여묘살이를 하는 것이 당시 효를 최우선시하던 조선의 예이다. 이미 오래 표류를 한터라 한시가 급하다. 그 와중에 왕이 글을 쓰라 명한다. 효와 충이 충돌하는 순간이다. 성종의 입장도 이해하는 것이, 그 사이 최부의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최부는 4년을 꼬박 나주에서 여묘살이를 해야 한다. 효의 예를 다하고 난 뒤라면 4년 전 기억을 되살려서 글을 쓴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나는 최부가 원한 것도 아니고, 왕명이면 일종의 까방권(프리패스)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현실은 8일 동안 왕명을 받드느라 효를 저버린 자의 업보가 기다리고 있었다. 글도 쓰지 못한 것인지, 썼으나 기록만 남지 않은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표해록 이후 저술은 남은 것이 없다고 한다. 표해록을 보면 최부는 죽음을 넘나드는 순간에도, 옆에서 아무리 실용을 따져도, 상복을 벗지 않은 효를 사수했다. 유교에 대한 신봉을 여러 차례 밝혀, 유교의 원산지인 중국 사람들을 놀라게 한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효의 가치를 놓지 않았던 최부는 아이러니 하게도 효의 가치를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배제된다. 허남린 선생님의 말씀에 따르면 조선 내내 왕의 충과 신하들의 효라는 가치가 충돌했다고 한다.

최부의 시련은 이 8일의 기록 때문에 서장관으로 가서도 기록을 남기지 못한 것이 끝이 아니었다. 내내 이 8일간의 왕명 때문에 조정 대신들과 왕이라는 고래 싸움에 등이 터졌을 뿐만 아니라, 연산군 때는 다시 이 일로 갑자사화 때 처형을 당하게 된다. 처형과 함께 그가 쓴 글도 흩어지고 사장될 위기에 처한다. 이후 다시 중종반정으로 최부는 복권되고 그의 외손자 미암 유희춘의 손으로 표해록이 발행되었다고 한다. 유교가 시작되고 본원지인 중국보다 유교를 숭상했으나 정치적 해석과 상황으로, 최부와 최부가 쓴 표해록은 풍랑에 휩쓸려 파란만장한 운명을 살았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날, 15세기 조선이 바라본 중국 문화의 귀중한 자료가 되었다.

 

글은 해석, 해석은 모든 곳에

나는 최부가 극한 체험을 했기 때문에글을 쓰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평소에 관찰도 하고 글을 쓰고 있던 사람이었기에 그때도글을 썼을 것이라고 상상해보았다. 김영하 소설가는 공항에서 맛있는 햄버거 냄새에 홀려 먹다가 환승 비행기에 놓쳤는데, 이 사건을 글로 쓰면 된다는 생각이 바로 들었다고 한다. 물론 글을 쓰기 위해 비행기를 일부러 놓친 것은 아니다. 언제든, 어떤 사건이든 글이 쓰는 순간, 사건은 해석이 되어, 의미가 부여된다는 뜻인 것 같다. 나는 최부의 극한 고생담을 읽으며, 후일담으로 그 고생이 파생시킨 기구한 최부와 그의 책 표해록의 운명도 접하게 되었다. 사람이나 책이나 타이밍에 따라 운명이 결정되는 것 같다. 운명은 큰 틀에서 정해지고, 바다에 나가면 더러 풍랑도 만나기 마련이다. 그런 출렁거리고 변덕스러운 운명에서 어느 때라도 글 쓰는 항해자의 모습을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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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3 15:02

    목적없이 인생을 흘러가게 하는 것이 깊고 넓은 바다와 낯선 땅만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최부의 한 자루 붓도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 같아 정말 재밌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