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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 인류학


 

수요종교인류학 글바다(5)_살다 보면 죽고, 죽다 보면(?) 다시 태어나고

작성자
윤정임
작성일
2025-03-20 17:51
조회
30

수요종교인류학 글바다(‘내 안의 신을 찾아서순례기 쓰기5) 2025.3.20.

 

살다 보면 죽고, 죽다 보면(?) 다시 태어나고

 

주제문 :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다.

글의 취지 : 삶과 죽음이 분리되는 과정을 알아보고 다시 연결시키는 방법을 모색한다.

 

일본 조몬 중기의 마을의 모습을 보면 환상취락의 형태라고 한다. 그리고 가운데에 무덤이 있다. 무덤이나 화장터나 납골당 등 죽음과 관계있는 모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외곽으로 배치하는 지금의 우리와 너무 다르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지금의 우리는 죽음을 두려워한다. 그래서 보이는 곳에서도 치워버리고 생각하는 것도 터부시하는 경향을 보인다. 모르면 두려워하게 된다고 한다. 우리는 죽음을 모르기 때문에 두려워하는 거라며 알아보면 알아보면 어떨까?

 

고대인들은 죽음과 함께 생활했다. 일상생활이 펼쳐지는 가운데 공간에 무덤을 배치했다. 언제 어디서든 늘 죽음을 보고, 시체가 썩는 냄새를 맡고 있다면 죽음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왜 그렇게 했을까? 이런 의문은 삶과 죽음을 예리하게 갈라서 이분법으로 사고하는 현대인들의 생각일 것이다. 이유 같은 것은 없다. 원래 삶과 죽음은 이어져 있는 것이니까. 생명이라는 것은 죽음을 전제로 한 말이다. 태어난 모든 존재는 죽는다.

조몬 중기 시대에 발굴된 토기를 보면 개구리의 등을 가르고 태어나는 아기의 얼굴을 표현해 놓았다. 이들은 죽음이 태어남과 연결되어 있다고 생각했다. 죽음을 통과하면 다시 태어나게 되는 것이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까? 나카자와 신이치 교수는 뫼비우스의 띠를 모델로 제시한다. 뫼비우스의 띠는 안과 밖이 구별되지 않는다. 안인가 하면 다시 밖으로 연결되고, 밖인가 하면 다시 안으로 연결된다. 이처럼 삶과 죽음은 순환하여 살다 보면 죽게 되고, 죽다 보면(?) 다시 태어나게 된다. 뫼비우스의 가운데를 자르면 두 개의 뫼비우스가 생기는 것이 아니라, 안과 밖으로 구분된 커다란 원이 생긴다. 이것이 현대의 우리가 사고하는 방식이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통로를 잃어버렸다.

삶과 죽음을 연결하는 방법을 초월과 내재적 초월도 저자는 설명하는 것 같다. 자연사에서 일어나는 대칭성 깨짐으로 질량이 생기는 것처럼, 스피리트들과 그래이트 스피리트의 세계에서 대칭성이 깨짐으로 신 GOD이 등장했다. GOD은 현실세계를 초월한 존재이다. 여기에서 죽으면 현실세계를 초월한 장소인 천국으로 가는 것으로 설정한다. 여기에서부터 삶과 죽음의 분리가 일어난다. 반면 대칭성이 깨지기 전의 스피리트들과 그래이트 스피리트의 세계에서는 삶과 죽음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을까? 그들은 중공 공간을 통해 연결되지 않을까? 저자는 중공공간을 스피리트들이 살고 있는 곳이고 증식이 일어나는 곳이라고 한다. 이 공간이 이승과 저승을 연결해주지 않을까? 티벳불교에서 이와 비슷한 개념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49일 동안 바르도체가 되어서 중음의 공간(이승과 저승의 사이)에 머물다가 다시 태어난다. 스피리트들도 중공 공간에 머물다가 지나가는 여자의 태에 들어가서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한다.

고대인들은 왜 일상의 한가운데에서 죽음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 맡으며 감각적으로 경험하게 하는 환상 취락으로 마을의 구조를 만들었을까? 죽음은 타자들 중에 가장 먼 타자라고 한다. 죽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무도 모른다.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존재하지 않으므로. 그러나 3만 년 전 인지 유동성을 획득한 호모사피엔스는 초월을 경험하게 되고 수많은 미지의 타자를 통합할 수 있었고, 마침내 제일 거대한 타자 죽음도 포함하여 우리를 만드는 방법의 하나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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